‘엘레강스하고 판타스틱했던’ 시아버지 앙드레 김

‘엘레강스하고 판타스틱했던’ 시아버지 앙드레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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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그 모습이 마지막이라고는 아버님도 우리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중저음의 굵고 조금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엘~레강스하고 판~타스틱해요”라며 우아한 제스처를 취하던 모습. 귀족 스타일의 흰색 의상에 검은색으로 색칠한 머리, 하얀 피부 화장에 검은색 눈썹.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그 이름, 앙드레 김. 순백의 열정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75세로 생을 마감한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삶을 되돌아본다.

‘엘레강스하고 판타스틱했던’ 시아버지 앙드레 김

‘엘레강스하고 판타스틱했던’ 시아버지 앙드레 김

정재계, 연예인 아우르는 조문 행렬 이어져
지난 8월 12일, 앙드레 김이 대장암 합병증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 7월 22일 건강이 악화돼 치료를 받아왔지만, 끝내 병세를 이기지 못했다.

2005년 대장암 수술을 받고, 항암 치료를 받아왔는데 몇 해 전부터 건강 악화설이 여러 차례 나돌았다. 하지만 올해 3월에도 중국 베이징에서 패션쇼를 열었던 터라, 주위 사람들은 병세가 그렇게 깊었는지 눈치 채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별세 소식에 많은 정재계 인사들과 유명 연예인들은 충격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12~14일까지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는 생전에 앙드레 김과 각별한 인연을 맺어왔던 인사들과 연예인들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박희태 국회의장과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 임태희 청와대 대통령실장 등 정계 인사들과 이상봉·장광효 패션디자이너, 성악가 조수미, 고현정, 김태희, 전도연, 최지우, 김희선, 권상우, 송승헌, 이병헌, 원빈 등 연예인들이 애통한 표정으로 고인을 조문했다.

장례식은 불교식 4일장으로 치러졌으며, 발인은 15일 오전 6시에 행해졌다. 운구 행렬은 고인이 30년 동안 살아왔던 압구정동 자택, 신사동에 위치한 의상실, 28년 동안 손수 지어 만든 앙드레 김 디자인 아틀리에를 거쳐 장지인 천안공원묘원에 안장돼 영원히 잠들었다.

“아버지 정말 존경하고, 사랑했다”
‘엘레강스하고 판타스틱했던’ 시아버지 앙드레 김

‘엘레강스하고 판타스틱했던’ 시아버지 앙드레 김

앙드레 김에게 남겨진 유족은 아들 김중도씨가 유일하다. 한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았던 고인은 1982년 생후 5개월 된 김중도씨(29)를 입양해 부자의 연을 맺었다. 장례식 내내 침착하게 감정을 자제하면서 조문객들을 맞이했던 김중도씨. 하지만 장지인 천안공원묘원에서는 끝내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다. 평소 아들에 대한 사랑이 유난히도 각별했던 앙드레 김. 아버지의 그 깊은 사랑을 받으며 살았던 김씨는 아버지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그제야 실감하는 듯했다.

김중도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믿을 수가 없었다”며 “원래 의지가 강하신 분이라, 훌훌 털고 일어날 거라고 믿었다”고 허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고인에 대해 “잠자리에 들 때면, 내가 잘 자고 있는지 꼭 확인하고 나가실 정도로 사랑이 깊었다”면서 “아버지를 정말 존경하고, 사랑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고 전했다.

외아들에 대한 앙드레 김의 사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김중도씨의 친구들도 고인이 김씨에 대해 얼마나 각별한 사랑을 쏟았는지 잘 기억하고 있다. 김씨의 친구들에게 앙드레 김은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아닌, 그냥 친구의 자상한 아버지일 뿐이었다고 밝혔다. 친아들도 아닌데, 어떻게 친자식보다 더 극진한 사랑을 줄 수 있었는지 존경스러웠다고.

앙드레 김은 생전 인터뷰에서 “아들을 키우면서는 손님을 집에 초대해 식사한 적이 없다”면서 “손님이 오면 아이가 방에서 못 나오기 때문”이라고 아들에 대한 극진한 배려를 밝힌 바 있다.

며느리 유은숙씨 “친아버지처럼 대해주셨다”
김중도씨는 지는 2004년 앙드레 김 신사동 의상실에서 근무하던 네 살 연상의 디자이너 유은숙씨(33)와 결혼했다. 앙드레 김은 아들의 결혼식이 끝난 뒤, 집에 와서 아들이 쓰던 빈방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김중도·유은숙 부부는 슬하에 여섯 살 된 이란성 쌍둥이 남매를 포함해 총 3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앙드레 김의 아들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은 손자손녀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손자손녀가 생긴 뒤로는 집에 일찍 들어가서 함께 시간 보내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또 손자손녀의 옷을 모두 직접 제작해주었는데 앙드레 김 의상실에는 아이들 전용 옷걸이가 비치되어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패션쇼가 끝나면 손자손녀를 런웨이로 올라오게 해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등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 보였다. 특히 경기도 기흥에 있는 앙드레 김 디자인 아틀리에에 놀이용 기차를 탈 수 있는 레일을 깔아놓는 등 세심하게 하나하나 신경 써주었다.

앙드레 김의 며느리 유은숙씨는 고인에 대해 “시아버지가 아니라, 친아버지나 다름없을 정도로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다”며 어떤 부분이 아버지 같다고 느꼈느냐는 질문에 “평소의 모든 행동과 말씀이 그냥 아버지 같았다”고 기억했다.

사실 가족은 앙드레 김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아무도 이런 상황을 예상치 못했다고 한다. 유은숙씨는 “아버님이 그냥 감기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하셨기 때문에 평소랑 똑같았다”며 “마지막이라고는 아버님도, 우리도 생각 못했다”고 밝혔다. 이어 고인이 임종 직전에 마지막으로 어떤 말을 남겼느냐는 질문에 유씨는 “병원에 입원하셨을 당시 말씀을 못하셨기 때문에 임종 전에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며 “병원에 오기 직전에도 기침이 너무 심해서 별다른 말씀은 하지 못하셨다”고 밝혔다.

‘엘레강스하고 판타스틱했던’ 시아버지 앙드레 김

‘엘레강스하고 판타스틱했던’ 시아버지 앙드레 김

일각에서는 고인의 유산과 의상실 경영권, 그리고 유언장의 존재 등에 대한 궁금증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에 김중도씨는 “유언이 있다, 없다에 대해서는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는데, 왜 자꾸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다”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정신도 없고 마음도 좋지 않는데, 그런 불미스러운 이야기들 때문에 기분이 더 상한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유언에 대해 내가 대답할 의무도 없으며, 사람들이 궁금해할 부분도 아닌 것 같다”고 덧붙였다. 또 “앞으로 조용하게 아버지의 일을 도와드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순백의 열정을 사랑했던 디자이너, 앙드레 김
앙드레 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흰색’이다. 그의 의상은 최근 30여 년 동안 모두 흰색이었고, 구두와 신발, 자동차 등 그와 관련된 대부분이 모두 흰색이었다.

그가 이렇게 흰색을 사랑하게 된 것은 어머니의 모습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는 항상 정갈하고 흐트러짐 없이 헌신적인 분이었다고 한다. 여름에도 옷에 빳빳하게 풀을 먹여서 입혀주었을 정도란다. 앙드레 김은 늘 깨끗하고 정갈했던 어머니 때문에 30년 넘게 흰옷을 고집한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 또 앙드레 김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바로 일본의 유명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그가 쓴 책 좥설국좦을 읽고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엘레강스하고 판타스틱했던’ 시아버지 앙드레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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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인터뷰에서 앙드레 김은 “흰색이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정신세계로 이끌어주는 것 같아 정신적인 안정을 느낀다”고 밝혔다. 또 메이크업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얼굴에 결점이 많기 때문에 그걸 커버하기 위해서 오래전부터 가볍게 해왔다”고 덧붙였다.

50년 동안 400 회의 패션쇼, 외교사절 역할
흰색 의상과 검은 머리, 특유의 말투가 대중에게 각인된 것은 바로 1992년 옷 로비 사건 때다. 대중은 우아하고 세련돼 보이는 앙드레 김의 본명이 ‘김봉남’이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게 됐고, 그의 행동과 말투가 개그 프로그램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면서 그는 한층 대중에게 친숙한 느낌으로 다가가게 됐다.

자신을 소재로 희화화하는 게 싫을 수도 있었지만, 앙드레 김은 그걸 즐겁게 받아들였고 그 뒤로 오히려 사업적인 면에서 더욱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지난 50년 동안 앙드레 김이 패션쇼를 연 것은 무려 400 회에 달한다. 그의 패션쇼는 ‘패션 오페라’라는 별명까지 붙었을 정도로 여느 쇼와는 차별화된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의 패션쇼는 몽환적이고 낭만적이면서 화려하고 우아했다. 특히 그의 의상은 전통적인 한국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한국적인 단아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은 그를 통해 세계 곳곳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일찌감치 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세계는 당차고 감각적인 동양 디자이너에게 놀라움과 경의를 표했다. 지난 1999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앙드레 김의 날을 따로 지정하기도 했고, 2000년에는 프랑스에서 문화예술훈장을 받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앙드레 김의 사후, 문화계에 공헌한 바를 인정해 1등급 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을 추세했다.

‘엘레강스하고 판타스틱했던’ 시아버지 앙드레 김

‘엘레강스하고 판타스틱했던’ 시아버지 앙드레 김

앙드레 김은 가끔씩 외국 대사의 부인들을 패션쇼 무대에 세우기도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세계 각지의 대사들과 친분을 쌓았고, 그들은 디자이너 앙드레 김을 통해 한국을 알아갔다. 외국 대사들 사이에서는 한국에서 살려면, 꼭 앙드레 김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퍼졌을 정도란다. 앙드레 김의 패션쇼는 외교사절 무대, 친선 무대나 다름없었다.

또 앙드레 김의 패션쇼는 스타의 등용문으로 통했다. 때문에 그의 패션쇼에 서는 것은 연예인들에게는 ‘스타’로 인정받는 것과 다름없었다. 김희선, 전도연, 송승헌, 원빈 등 한국의 내로라하는 톱스타들은 앞 다투어 그의 쇼에 서길 희망했다.

앙드레 김은 알려지지 않은 기부의 왕이었다. 그는 유니세프를 통해 끊임없이 기부를 실천해왔고, 많은 연예인들을 유니세프 활동에 동참시켰다. 그만의 환상적인 세계 속에서 자신보다 남들을 위해 살다 간 앙드레 김.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의 전설 같은 이야기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Mini Interview
28년 동안 앙드레 김 패션쇼를 연출해온
모델센터 도신우 회장 미니 인터뷰

‘엘레강스하고 판타스틱했던’ 시아버지 앙드레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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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앙드레 김은 평소 어떤 분이셨나요?
겉으로 보기에는 특이해 보이고 거리감 있어 보이잖아요. 하지만 굉장히 소박하고, 다정다감하고, 한 번 인연을 맺으면 오랫동안 이어질 정도로 의리도 있고, 소탈한 분이죠. 일부에서는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는 걸로 아는데, 알고 보면 남을 배려하면서 남을 위해 사신 분이세요.

Q디자이너로서는 어떤 분이셨나요?
일적인 부분에서는 매우 정열적이면서도 철두철미했어요. 작품에 대해서도 냉정하셨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대에서 리허설을 하다가도 폐기처분했거든요. 간혹 모델들이 잘 못하면, 정신이 번쩍 들도록 큰소리로 야단도 치셨어요. 굉장히 디테일하고 섬세하면서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분이셨죠.

Q고인이 자선행사 활동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해외에서 하는 자선 패션쇼는 모두 자비를 들여서 하셨어요. 좋은 일에 쓰는 돈은 전혀 아까워하지 않으셨죠. 또 좋은 공연과 뮤지컬 등도 즐겨 보셨는데, 각국 대사들을 모두 초청해서 보는 걸 좋아하셨죠. 유니세프에는 기부를 많이 하셨어요. CF 모델비 1억원뿐만 아니라, 수익금, 패션쇼에 출품했던 수백 벌의 의상을 매년 유니세프에 기증하셨거든요.

Q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호화롭게 사셨을 것 같은데요?
전부 남에게 베풀며 사셨지, 본인에게는 한 푼도 쓰지 않으셨어요. 명품만 들고 다닐 것 같지만, 가방도 싸구려 가방 들고 다니시고, 구두 같은 것도 새로 사는 것을 못 봤어요. 비싸고 좋은 음식은 별로 안 좋아하시고, 된장찌개 등 한식이나 떡볶이처럼 소박한 것들을 좋아하셨죠.

Q평소에 편안하게 다른 의상을 입으신 적은 없나요?
28년을 옆에서 지켜봤는데, 다른 의상은 본 적이 없어요. 똑같은 의상을 30벌씩 만들어서 하루에도 서너 번씩 갈아입으셨어요. 겨울에는 누벼서, 여름에는 시원한 소재로 만든다는 차이뿐이에요. 아~ 집에서 입는 잠옷은 알록달록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 이유는 손자손녀들이 좋아하는 색으로 동물이 그려진 옷들을 입으시더라고요. 순전히 손자손녀를 위해서죠.

Q메이크업을 하시는 이유는 뭔가요?
예의를 지키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셨어요. 화장을 하나의 옷을 입는 것처럼 생각하셨어요. 맨얼굴로 손님을 대하는 법이 없었죠. 저희도 맨얼굴을 본 적이 거의 없으니까요. 해외에서 모델들이 흐트러진 모습으로 다니거나 메이크업을 하지 않고 다니면 야단을 맞았죠. 한국을 대표해서 나온 거니까 품위를 지키면서 다니라고요.

Q고인이 유언을 남기지는 않으셨나요?
저도 확인한 바는 없으니까 자세히는 몰라요. 그런데 평소에 아들과 최측근인 임세우 실장에게 항상 이런저런 말씀을 많이 해온 것으로 압니다. 아마 생전에 유족에게 많은 말씀들을 남기셨겠죠.

Q앙드레 김 선생님을 보내시면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저는 우리나라의 국보급 보물을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패션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셨고, 디자이너라는 직업의 위상을 많이 높여놓으셨죠. 또 민간외교 사절 역할을 헌신적으로 하신 분입니다. 이런 분은 전무후무할 거예요. 패션 아티스트라고 표현하고 싶네요.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강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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