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산다, 배우 남궁원의 세월의 층위가 더해진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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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금 나이에서 서른을 빼고 시작하려 합니다.
ㆍ같이 늙어가는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었어요”

왕년의 스타, 살아 있는 전설, 영화계의 산증인…. 지금 이 순간, 배우 남궁원을 설명하기에 이러한 말로는 뭔가 부족하다. 1959년 영화계에 데뷔해 그동안 3백여 편의 작품에 출연해온 그는 2011년, 50여 년 연기 인생에 또 하나의 작품을 보탰다. 근사하게 박제된 전설보다 균열 가득한 삶의 서사를 택한 남궁원은 여전히 클라이맥스를 기대할 수 있는 ‘현역 연기자’다.

오늘을 산다, 배우 남궁원의 세월의 층위가 더해진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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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배우가 천직이구나
‘그래서’ 남궁원이구나. 사람들은 생각했다. 한국의 ‘그레고리 펙’이라 불릴 만큼 품격 있는 외모와 중후한 분위기,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의 남자다운 체격, 그리고 다정하지만 울림 깊은 묵직한 목소리를 간직한 남궁원은 여전히 멋있었다. 배우 남궁원은 지난 7월 23일부터 방영되고 있는 SBS-TV 주말드라마 ‘여인의 향기’에 출연 중이다. 자신의 딸을 외면하는 남자 강지욱(이동욱 분)을 철저히 응징하는 냉혹한 재벌 회장 임중희 역할을 맡아 위엄과 카리스마를 보여주고 있다.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온전히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는 재벌 회장 역할이 꼭 맞는 옷을 입은 듯 무척 잘 어울린다는 평이다.

1959년 처음 연기를 시작한 뒤, 올해로 데뷔 52년을 맞는 그이지만 TV 드라마 출연은 이번이 처음이다. 본인 표현대로 ‘신인 배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신상옥, 배창호, 김기영 등 내로라하는 거장 감독들의 작품에서 주인공을 도맡았고, 멜로부터 액션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3백여 편에 출연하며 한국 영화를 이끌어온 ‘대배우’ 중 한 명인 그가 이제껏 한 번도 브라운관에 얼굴을 비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의외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예전에는 영화배우들이 조금 건방진 면이 있었다고나 할까, 아니면 자긍심이 무척 강했다고 할까요. 영화는 TV 드라마보다 스케일이 큰데다 당시에는 배우들을 ‘필름 연기자’와 ‘TV 연기자’라고 구분해 부를 만큼 영화에 대한 자긍심이 굉장히 강했어요. 그래서 TV 출연은 아예 생각도 않고 영화만 고수했었죠. 물론 지금은 차이가 전혀 없지만요. 내 생각이 틀렸던 것 같아요.”

드라마 출연 자체도 처음이지만 지난 2002년 영화 ‘싸울아비’를 마지막으로 10여 년간 연기 활동을 쉬었던 터라 이번에 실로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 선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지만 특별하게 다가왔다. 신인 때보다 훨씬 떨리고, 몇 배는 더 설레었다고.

“마치 처음 데뷔하는 느낌이었어요.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첫 촬영을 마쳤는데, 그때 마음 가득 차 있던 흥분과 열정을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아, 나는 배우가 천직이구나’라는 생각도 했어요. 역시 ‘연극배우는 무대에서 죽고 영화배우는 카메라 앞에서 죽어야 한다’라는 말을 다시금 떠올렸어요.”

오늘을 산다, 배우 남궁원의 세월의 층위가 더해진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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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비롯한 출연 연기자들의 연령대가 갈수록 낮아지고, 나이 마흔만 넘어서면 깍듯이 ‘선생님’ 소리를 듣게 되는 드라마 현장에서,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일흔일곱의 배우가 자연스럽게 녹아들기란 쉽지 않은 일일 수 있다. 게다가 아무리 많은 작품에 참여해왔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꽤 오래 지난데다, ‘드라마’라는 공간은 또 생전 처음 경험하는 곳이니 말이다. 다행히 후배 연기자들은 물론 현장 스태프들 모두 그에게 예의 바르고 살갑게 대해줘 고마운 마음뿐이다.

“첫 촬영 들어가기 전에 먼저 관계자들에게 ‘내가 TV는 처음이라 신인 배우나 다름없으니 모자란 점이 있으면 가르쳐달라’고 인사를 했어요. 자식 같고 막내 동생 같은 스태프들이지만 경험 있는 분들에게 많이 배워야죠. 사실 내가 워낙 나이가 있다 보니 후배들이 지나치게 어려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스스로도 언행이 조심스러워지는 면이 있어요. 그래도 다들 저한테 어찌나 예의 바르게 잘하는지…. 게다가 모두 각자 맡은 분야에서 정말 열심히들 해서 그저 대견스러울 따름이에요.”

그렇지 않아도 스태프나 배우 모두 완벽하게 역할을 수행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 자신의 데뷔 시절을 돌이켜보며 감탄을 거듭하고 있다. 만약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 이 현장에 서 있다면 과연 이들만큼 충실히 제 몫을 해낼 수 있을까 의문이 들만큼 말이다. 특히 젊은 주인공 배우들의 대사 외우는 템포와 장면 소화 능력에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 ‘후배’라기보다는 ‘자식’처럼 사랑스러운 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 즐겁고 행복한 요즘이다.

남보다 몇 배의 노력을 더한다
지금은 스스로도 ‘참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번 출연을 결정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모른다. ‘한다, 안 한다’ 결정을 번복한 것만 해도 수십 번이다. 평생을 영화만 고집해왔는데 이제 와서 드라마를 한다는 것이 낯설기도 하고, 후배나 동료 등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드라마 제작사로부터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 참 반가웠고 오랜만에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보다 이런저런 걱정이 더 앞서더라고요. 이제 와서 괜히 나섰다가 안 좋은 소리만 들으면 어쩌나 두려운 마음부터 들었고요.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별의별 변명을 다 갖다대면서 고민하다가 가족회의도 여러 번 열었어요. 아들 녀석(한나라당 홍정욱 의원)은 반대하더라고요. TV 드라마는 영화와 시스템도 다르고 템포도 빨라 적응하기 힘들 거라면서요. 젊은 연기자들과 호흡을 맞춰야 하는데 잘하실 수 있겠냐며 말리더군요.”

그럼에도 결심을 내리게 된 데는 평생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해준 아내의 강력한 지지가 큰 몫을 했다. 평소 부정적인 자세를 무척 싫어하는 아내는 “왜 해보지도 않고 먼저 겁부터 내느냐”라는 말로 용기를 북돋웠다. 하늘이 주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노력해봤으면 좋겠다는 아내의 격려는 세상 그 무엇보다 든든한 힘이 됐다.

“좀 더 객관적인 조언을 듣고자 친한 영화평론가한테 상의도 했어요. 그랬더니 단번에 지금이 어느 때인데 TV니 영화니 운운하느냐고, 다들 하고 싶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못하는 건데 이번에 무조건 해야 한다고 다그치더군요. 그런 말들을 들으니 저 스스로도 용기가 생겼어요. 젊었을 때 못지않은 열정과 패기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서 ‘할 수 있다’를 외치면서 오히려 더 뜨거운 의욕을 불태우게 된 거예요.”

시동을 걸기까지는 많이 망설였지만, 일단 결심을 굳힌 뒤로는 최선을 다해 맹렬히 달려보기로 했다. 몸에 밴 습관, 과거의 영광, 세월의 권위와 같은 것들이 오늘을 얼룩지게 만들지 않도록 스스로를 돌아보며 틈을 없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낮은 자세로 임하기로 했다.

오늘을 산다, 배우 남궁원의 세월의 층위가 더해진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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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연기를 보여드리기 위해 정말로 많은 노력을 해요. 저는 원래 ‘반짝’ 하는 순발력도 없고 매사에 좀 늦는 편이라 남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해야 하는 타입이에요. 젊었을 때도 그랬어요. 사실 연기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본 적 없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활동을 시작했어요. 한양공대를 다니면서 유학 준비를 하던 중에 어머니께서 암 선고를 받는 바람에 일을 찾다가 배우가 된 거였어요. 처음 영화를 찍을 때 ‘기차 시간이다. 가야겠어’ 이 짧은 대사를 스무 번도 넘게 했어요. 셔츠 아래로 땀이 줄줄 흐를 만큼 곤혹스러웠던 기억이에요. 그때부터 새벽에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면서 하루 종일 연구하고 연습을 했어요. 배우들이 어떻게 웃고 울고 표현하는지 노트를 빽빽이 채워가면서요. 제가 멋있는 역할만 하면서 순탄하게 연기 생활을 한 줄 아는 분들이 많은데, 실은 그런 노력들이 더해져서 지금의 제가 있게 된 거예요.”

이번에도 그 열정과 치열함을 꺼내들었다. 배운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백지 상태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교수들을 찾아다니며 드라마에 맞는 발성부터 다시 배웠다. 기대하는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열심히 하는 젊은 배우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물론 아직까지 만족스럽지는 않다. 첫 방송이 나가던 날은 부끄럽고 민망해 혼이 났다. 드라마 제작 환경에 익숙해지는 데도 시간이 더 필요하다. 촬영을 하고 돌아온 날은 후회스러워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참 고마운 경험이고, 좋은 공부라고 생각한다.

“지난 주말 분량을 찍고 와서는 밤에 잠을 자다 벌떡 일어날 정도였어요. 왜 그렇게 연기했을까, 신경이 쓰이고 심지어는 어찌나 화가 나던지…. 이미 끝난 촬영인데도 혼자 욕실에 들어가서 몇 번을 다시 해봤는지 몰라요. 요즘은 아들이 우려했던 ‘드라마 분위기’라는 게 뭔지 좀 알겠어요. 조건이나 분위기가 다 갖춰진 상태에서 녹화를 하는 게 아니니까 대사에 신경 쓰는 사이 어영부영 촬영이 끝나요. 그런 상황에서도 똑 부러지게 해내는 젊은 친구들의 순발력이 대단하죠. 얼른 적응하고 좀 더 공부해야겠다는 다짐을 해요.”

첫 방송은 물론이고 아직까지도 그는 자신이 나오는 장면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도 많고 쑥스럽기도 해서다. 그래도 드라마 방영 이후 브라운관으로 만나니 반갑다는 인사와 함께 응원과 격려를 해주는 이들이 많아 뿌듯하게 생각한다. 특히 손녀딸을 포함한 가족의 꼼꼼한 모니터링에 큰 힘을 얻는다. 여러 가지를 염려하던 아들도 이제는 그 누구보다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어제도 손녀딸한테 전화가 왔어요. ‘할아버지, 연기가 그게 뭐예요. 말이 너무 빨라요’ 그러는데 뜨끔하더라고요. 어찌나 냉철한지 우리 손녀가 감독보다 더 무서워요(웃음). 좋은 평가를 듣도록 더 많이 노력해야죠.”

다만 일주일에 2회 분량을 촬영하기 위해 워낙 현장이 바쁘고 빠르게 돌아가다 보니 예전에 비해 여유나 정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 조금은 아쉽다. 연기자들도 자기 분량 끝나면 바로 흩어지고, 드라마나 역할 이야기 외에는 서로 제대로 대화할 시간조차 내기 힘드니 말이다. 언제나 과정도, 결과도 낭만적인 작품을 꿈꾸는 그에게는 그립고 안타까운 부분. 요즘도 가끔 ‘순교자’, ‘청녀’와 같은 옛 영화를 즐겨 보는 그는 다시 한번 그런 작품을 만나면 ‘이 생명 다 바쳐서라도’ 하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오늘을 산다, 배우 남궁원의 세월의 층위가 더해진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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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일곱, 같이 멋있게 늙어갑시다
쌓이는 세월의 무게가 버거운 시대, 그에게만 시간이 비껴갔나 의심할 만큼 여전한 외모와 열정을 자랑하는 남궁원은 자신이 나이 든 이들의 자신감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늘 새로운 꿈을 꾸고, 욕심도 내고, 도전하고, 노력하면서 말이다.

“몇 년만 지나면 제 나이가 80이에요. 이번에 활동 재개를 결심하면서 앞으로 제 나이에서 30을 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마흔일곱이면 패기도 연륜도 적당할 나이라 젊은 친구들과 어울려 멋지게 뭔가를 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저를 사랑하고 아껴줬던 팬들에게 뭔가를 보여주 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여러분도 나이를 의식하고 집에만 웅크리고 있지 말고 내가 이렇게 하는 만큼 활발하게 살아가자’라고요.”

남궁원은 드라마 촬영을 시작한 이후,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분명 힘든 점도 있지만 매일을 활기와 의욕으로 채울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자다가도 일어나 대사를 외우고, 완벽한 캐릭터 표현을 위해 옷을 사러 다니고, 식사시간을 놓쳐가며 인터뷰를 하면서, 머리가 저릿한 긴장감마저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다.

“겁이 난다는 이유로 이번 드라마 출연을 거절했다면 이 시간에 제가 뭘 하고 있었을까요? 친구나 만나고 공원이나 산책하면서 지냈겠죠. 물론 그런 시간들도 의미가 없진 않겠지만 ‘쭈글쭈글한 노인네’가 아닌 ‘의욕 넘치는 남궁원’으로 맞는 아침이 더욱 즐겁고 기대돼요.”

이번 기회를 계기로 앞으로 여러 배역을 욕심내보려 한다는 남궁원은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멋있게 같이 늙어가자”라는 말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아마도 그가 보여준 노력과 열정을 들여다볼 때 이 말은 반드시 지켜질 약속으로 보인다. 이 멋진 배우의 클라이맥스는 과연 언제가 될까, 무척 궁금해진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이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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