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숙의 고백! 절망의 시간 딛고 패션 사업가로 재기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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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윤현숙이 한국으로 돌아와 연기 활동을 재개했다. 현재 MBC-TV 주말드라마 ‘애정만만세’에 출연하고 있는 그녀는 지난 2008년 말 돌연 한국 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떠나면서 대중 앞에서 사라졌다. 그룹 ‘코코’ 출신의 가수라는 꼬리표를 떼고 연기자로 인정받기 위해 꾸준히 작품 활동에 매진하던 그녀의 갑작스러운 잠적, 하지만 거기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반가운 컴백 이후 처음으로 털어놓는 윤현숙의 눈물 어린 고백, 늘 환하게 웃기만 하던 그녀의 미소 뒤에는 우리가 몰랐던 깊은 슬픔이 숨겨져 있었다.

가수 그만둔 지 17년, 이제는 누가 뭐래도 배우
윤현숙의 고백! 절망의 시간 딛고 패션 사업가로 재기하기까지

윤현숙의 고백! 절망의 시간 딛고 패션 사업가로 재기하기까지

윤현숙(40)을 만나러 가던 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서울 곳곳이 한창 물난리를 겪고 난 뒤인데다 비가 퍼붓고 있어 혹시 차가 막혀 좀 늦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던 순간, 그녀가 창밖에서 반가운 눈인사를 건네며 직접 준비해온 의상과 소품들을 두 손 가득 들고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약속 시간 10분 전이었다. 큰 키에 날씬한 몸매, 주먹만 한 얼굴은 TV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카메라 플래시에 맞춰 연거푸 웃음을 지을 때는 왠지 모르게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던 이웃집 언니 같은 친근감이 들기도 했다.

윤현숙은 1990년대 초반 혼성 그룹 ‘잼’의 홍일점 멤버로 연예계에 데뷔해 뜨거운 인기를 누렸다. 이후 탤런트 이혜영과 함께 여성 듀오 ‘코코’로 활동했고, 어느 날부턴가는 연기자 전향을 선언하며 드라마와 영화에서 이따금 모습을 비쳐왔다. 이제는 가수로 활동할 때 발표했던 앨범 수보다 배우로 출연한 작품 수가 훨씬 더 많은데도, 아직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녀를 ‘한때 가수로 좀 활동했던 연예인’ 정도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알고 보면 윤현숙은 가수로 데뷔하기 이전부터 오랫동안 배우의 꿈을 키워오며 유학까지 다녀온 학구파 연예인인데다 그동안 출연해온 작품 수만 해도 30여 편이 넘는다.

“가수를 그만둔 지 17년이나 됐는데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배우 윤현숙’보다 ‘가수 윤현숙’이 더 친숙한 것 같아요.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웃음). 그런데 사실 제 원래 꿈은 연기자였어요. 가수의 기회가 먼저 찾아와서 노래와 춤으로 연예계에 데뷔했을 뿐 언제나 제 마음 한구석에는 연기에 대한 갈망이 있었어요. 이혜영씨보다 오히려 제가 더 먼저 연기를 시작했는데 아직도 저만 ‘잼’, ‘코코’로 알고 계시는 것 같아 때로는 좀 섭섭해요.”

2년간의 미국 유학, 연기의 참맛을 알게 된 시간
윤현숙은 ‘코코’ 활동을 끝으로 가수 생활을 접었다. 그리고 SBS-TV 특집 단막극 ‘촛불 켜는 사람들’에 캐스팅되며 연기자로서 첫 신고식을 치렀다. 연기가 처음이었던 그녀에게는 배우 이미숙과 나란히 호흡을 맞춰야 하는 주조연급의 꽤 큰 배역이었고, 그때부터 연기의 매력에 점점 빠지게 됐다.

체계적으로 연기를 배우고자 1997년에는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연극영화학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담당 교수는 그녀에게 “대학 내에서 특강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라고 제안했지만, 그녀는 ‘좀 더 많이 공부하고 돌아와서 하겠다’라는 마음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LA산타모니카 칼리지 필름에서 2년 동안 영화와 마케팅을 공부했다. 하지만 유학생활은 쉽지 않았다. 10, 20대 현지 학생들과 어울리려니 말도 잘 안 통하고, 뒤늦은 나이에 학구열을 불태우려니 체력적으로도 몇 번이나 한계에 부딪쳤다.

“그때 몸무게가 43kg까지 빠졌어요. 부모님이 제게 ‘너 이러다가 죽겠다’라며 아무리 공부가 좋아도 그냥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학업을 중도 포기하고 귀국했죠. 지금 생각하면 마무리를 제대로 못하고 온 게 참 아쉬워요. 최소 4, 5년 정도 있어야 영어가 들린다고 하던데 저는 귀가 열리고 말문이 막 트이려고 할 때 돌아왔어요.”

그러나 미국에서 허탕만 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미국 유학 시절 인기 외화 시리즈 ‘600만 불의 사나이’의 주인공 리 메이저스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페이트’에 경찰 역으로 출연해 직접 대사까지 소화했다. 배우 전지현, 이병헌, 가수 비보다 더 먼저 할리우드에 진출한 셈이다.

윤현숙의 고백! 절망의 시간 딛고 패션 사업가로 재기하기까지

윤현숙의 고백! 절망의 시간 딛고 패션 사업가로 재기하기까지

“산타모니카에서는 해마다 필름 페스티벌이 열려요. 전 세계 영화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영화를 사고팔죠. 저는 거기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다가 우연히 영화 제작 프로듀서와 인연을 맺게 됐고, 경험 삼아 직접 작품에 출연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에 흔쾌히 오케이를 했어요. 정말 고마웠어요. 엑스트라 조연급 정도밖에 안 됐는데 일일이 제게 조명을 잡아주고, 개인 승용차와 대역까지 마련해주더라고요. 한국과는 제작 환경 자체가 확연히 다르죠. 더 열심히 해서 훗날 이렇게 좋은 시스템 속에서 연기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던 좋은 경험이었어요.”

비록 미국에서 학업을 제대로 끝내지는 못했지만 연기에 대한 열정은 더 뜨거워졌다. 한국으로 돌아온 윤현숙은 ‘홍콩 익스프레스’, ‘원더풀 라이프’, ‘비밀남녀’, ‘90일, 사랑할 시간’, ‘메리대구 공방전’ 등에 출연하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자신감을 갖고 묵묵히 배우로서의 길을 걸으며 조금씩 성장해나갔다.

삶과 죽음의 경계, 벼랑 끝 찾아 태평양 건너다
그런 그녀가 지난 2008년 드라마 ‘달콤한 인생’을 마지막으로 TV에서 사라졌다. 당시 윤현숙은 소속사로부터 전속 계약 위반을 이유로 2억8천여 만원의 손해배상금을 물어내라는 소송을 당했다. 그녀가 소속사와 상의 없이 자신의 서명과 초상권을 이용한 사업을 벌이고, 급기야 방송 출연 계약을 독단적으로 체결했다는 것이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가 소송을 당했다는 기사가 인터넷에 떴더라고요. 제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소속사와 저 사이에서 일을 봐주던 동생이 일을 벌여놓은 채 갑작스레 중간에서 빠지는 바람에 상황이 꼬였고, 저는 소속사 측에 좋은 매니저를 다시 구해서 빨리 일을 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그쪽에서는 무조건 계약금을 지불하고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정말 황당했죠.”

소송으로 한창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무렵 설상가상 그녀의 어머니마저 갑작스레 쓰러져 병상에서 힘겨운 사투를 벌였다. 당시 윤현숙의 정신적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엄마가 중환자실에 있는 상황에서 언론에서는 계속 제가 고소를 당했다는 기사를 쏟아내니까 온 가족이 이래저래 힘들었어요. 저는 분명히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주위에서는 저를 그저 ‘고소당한 여자’로만 보더라고요. 밖을 돌아다닐 수가 없었어요. ‘내가 아닌 나’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어요. 사람들이 전혀 못 알아볼 정도로 성형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요.”

다행히 그녀는 소송에서 이겼다. 당당히 억울한 누명을 벗었지만 알아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마와 싸우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 무엇도 위로가 되지 않을 만큼 견디기 힘든 슬픔이었다. 그야말로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몇 달 사이에 저를 둘러싼 모든 것이 뒤죽박죽됐어요. 하나씩 터져도 감당하기 힘들만 한 일들이 한꺼번에 터지니까 정말 죽고 싶더라고요…. 더 이상 도저히 한국에 있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미국으로 갔어요. 공부하던 시절 혼자 살아봤던 곳이어서 그런지 거기밖에는 달리 갈 곳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사실은 저 그때 살려고 떠난 것이 아니라 죽으러 간 거였어요. 한국에서 못 죽을 것 같았거든요. 이만큼이면 원 없이 살아봤고, 누리고 싶은 것도 다 누려봤고, 여기서 그냥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만 들었어요….”

미국에서 가방 브랜드 론칭, 사업가로 성공하기까지
생에 대한 의지도 잃고,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 연명해나가던 윤현숙은 SM엔터테인먼트 대표 이수만의 소개로 미국에서 치과의사로 활동 중인 한국인 부부를 알게 됐고, 부모님처럼 늘 챙겨주는 그들 곁에서 힘을 얻었다. 그러다가 다시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참을 고민하다가 친구와 함께 LA에서 패션 브랜드를 론칭하고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그 상황에서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와 연기를 한다는 것은 제 스스로도 굉장히 무리였고, 제가 좋아하는 다른 일을 찾아 조금씩 예전의 저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찾은 길이 바로 패션이었어요.”

윤현숙은 과거 유학 시절에 SBS-TV 드라마 ‘러브 스토리 인 하버드’의 미국 로케이션 촬영 당시 김태희의 현지 스타일리스트를 맡아 3개월 동안 함께 작업했을 만큼 패션 쪽에 관심이 많았다. 현재 그녀는 친구와 함께 가방 브랜드 ‘Fabina LA’의 공동 대표를 맡고 있다. 미국 멀티숍을 위주로 판매하고, 한국의 현대백화점과 롯데백화점에도 입점해 있는 상태다.

윤현숙의 고백! 절망의 시간 딛고 패션 사업가로 재기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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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브랜드를 처음 론칭했을 때는 미국 시장을 타깃으로 했다. 그러나 평소 친하게 지내는 여배우들에게 협찬을 해주다 보니 미국보다 오히려 한국에서 붐을 일으켰다. ‘Fabina LA’는 김혜수, 황신혜, 손예진, 이수경, 김하늘 등이 드라마 속에서 들고 나오며 연예인 가방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그중에서도 황신혜와 김하늘은 평소 윤현숙이 가장 친하게 지내는 이들이다.

“미국에서 먼저 잘돼야 하는데 한국에서 더 반응이 좋더라고요(웃음). 그래도 어쨌든 수월하게 잘 풀려서 기분이 좋아요.”

하지만 친척이나 지인의 도움 없이 여자의 몸으로 타국에서 홀로 사업을 벌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특히 1남 3녀 중 막내딸로 자랐던 그녀였기에 한국에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가장 컸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4개월 만에 아버지가 암 선고를 받으셨어요. 무척 속상했죠.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갈까 싶다가도, 엄마가 돌아가실 때 저만 시집을 못 가고 혼자 남은 모습에 마음 아파하던 모습이 떠오르더라고요. ‘내가 당장 아빠 옆에 가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것보다는 일이든 결혼이든 둘 중에 하나라도 성공해서 돌아가야겠다’라는 생각으로 많이 울면서 참았어요. 아버지는 지금도 편찮으세요. 얼마 전에 수술하시고 계속 항암치료 받으면서 잘 이겨내고 계세요.”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서 패션 사업가로 성공을 거둔 윤현숙은 앞으로 의류, 액세서리 브랜드를 추가 론칭하며 사업을 확장시킬 계획이다. 아직 정식으로 가게와 홈페이지를 오픈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개인 미니홈피를 통한 팬들의 기대와 반응은 벌써부터 심상치 않다. 현재 윤현숙은 미국에서 직접 발품을 팔아가며 공수한 옷들을 착용하고 미니홈피에 사진을 올려두었는데, 댓글과 쪽지를 통한 구입 문의가 빗발친다.

“미국에서만 판매되고 한국에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은 의류를 잘 선별해서 판매하려고요. 미국에는 명품까지는 아니지만 대중적이고 트렌디하면서 스타일도 매우 좋은 부티크 라인이 많거든요. 청담동에 이런 물건들을 수입해서 판매하는 멀티숍이 몇 군데 있기는 한데 그곳은 가격이 무척 비싸요. 저는 질 좋은 브랜드를 저렴한 가격에 팔고 싶어요. 브랜드 이름은 ‘스타일바이윤(Style By Yoon)’이 될 예정이고요. 의류, 가방, 액세서리 등 다양하게 수입해서 판매할 생각이에요.”

불혹의 나이, 윤현숙의 사랑도 궁금하다. 그녀의 절친 중 한 명인 배우 황신혜는 지난해 한 아침 프로그램에서 “동생 윤현숙이 결혼하면 섭섭할 것 같다”라고 말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실제 윤현숙의 생각은 어떨까? 그녀는 당분간 결혼할 것 같지는 않다고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결혼할 나이는 지났잖아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서둘러봤는데 결혼을 목표로 사람을 만나려니까 어렵더라고요. 조건만 보게 되고요. 마지막 사랑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 연애에서 나름 큰 상처를 받기도 했고요. 지금보다 좀 더 안정되고 편안해지고, 사람을 보는 눈이 생기면 그때 하고 싶어요. 때가 오겠죠? 이왕 늦은 거 지금은 일과 연기에 더 치중하려고요. 그래도 언젠가 사랑은 찾아오리라는 믿음이 있어요. 희망의 끈을 항상 쥐고 살래요(웃음).”

인생의 벼랑 끝에서 태평양을 건넜던 그녀는 그곳에서 삶의 이유를 찾아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멋지게 성공했다. 비 온 뒤 땅이 더 단단하게 굳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시련의 고통을 집어삼키듯이, 힘겨운 시간을 이겨내고 나면 누구에게나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 윤현숙의 인생은 지금 가장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30, 40대 알뜰족 여성들을 위한 윤현숙의 쇼핑 T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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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바겐세일을 놓치지 마세요!

제가 입는 옷의 대부분은 세일 기간 중 구입한 것들이에요. 웬만하면 모든 물건은 세일할 때 사요. 미국은 기본 50~70% 세일하거든요. 특히 옷은 세일할 때 사야 해요. 평생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티셔츠는 모두 만원도 안 되는 것들을 사요. 한 계절만 입고 계속 바꿔 입을 거니까요. 대신 트렌디한 것을 사죠. 베이식한 아이템들도 마찬가지예요. 질 좋고 괜찮은 상품을 구입하되 저렴하면서 유행을 타는 것으로요. 물론 아우터나 정장은 한 번 사서 오래 입을 수 있도록 좋은 것으로 골라야 해요.

② 백 번 고민하고 결정하세요!
쇼핑을 할 때는 가장 마지막에 사는 편이에요. 가방은 한참을 고민하며 기다렸다가 시즌이 다 지나고 나서 사요. 자기 전에, 심지어 꿈에서조차 생각날 정도로 간절해야 구입을 결정하는 거죠. 그때 사도 절대 늦지 않아요. 만약 그러다가 시간이 너무 흘러서 재고가 다 떨어졌다면 그건 어차피 제게 올 물건이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③ ‘자신감’과 ‘색깔’로 스타일 챙기세요!
그렇다고 스타일을 놓쳐서는 안 돼요. 30, 40대는 활동량이 많은 나이죠. 개인 활동은 물론 남편, 아이들과 관련된 활동 영역이 점점 늘어날 테니까요. 저는 다른 건 몰라도 옷을 입을 때는 자신감이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내가 입었을 때 어색하면 다른 사람이 볼 때도 굉장히 어색해 보여요. 하지만 내가 자신감 있게 입으면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도 왠지 모르게 더 멋지게 보이는 법이죠.

스타일을 어떻게 살려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분들은 ‘색깔’을 생각하세요. 자신만의 색깔을 만드는 것이 좋아요. 컬러는 곧 그 사람의 이미지와 연결되거든요. 앙드레 김 선생님을 떠올렸을 때 곧바로 화이트가 생각나는 것처럼요. 그러므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색깔을 찾으세요. 색깔만 잘 맞춰 입어도 그게 곧 훌륭한 스타일로 완성되거든요. 개인적으로 저는 옷은 무채색으로 자주 입되, 가방이나 신발은 튀는 색깔로 포인트를 주는 편이에요.

■글 / 윤현진 기자 ■사진 / 원상희 ■장소 협찬 / 칼릭스 서울(02-518-0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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