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커 출신 트로트 가수 조항조의 드라마틱한 러브 스토리
트로트 가수의 활동 무대는 중장년층을 타깃으로 하는 가요 프로그램이나 전국의 행사, 여기에 흔히 밤무대라 부르는 업소 스케줄로 알려졌다. 인기 트로트 가수들은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하고 디너쇼를 열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트로트 가수들에게는 방송 기회를 잡는 것조차 꿈같은 일이다. 그런데 조항조(51)는 대부분의 트로트 가수들과는 조금 다른 활동을 보이고 있다. 전국 순회 라이브 콘서트를 열어 승부를 보기 때문이다. 트로트 가수에겐 도박처럼 보일 만큼 무모한 일이다. 사실 몇몇 대형 가수들을 제외하면 1년에 한 번 기획하는 디너쇼마저 초대권으로 자리를 메우곤 하는 그런 풍토 속에 조항조는 2009년을 시작으로 매년 전국 투어 콘서트를 하고 있다. 올해로 벌써 세 번째다. 이미 인천, 대구, 전주, 서울 등 대도시에서 공연을 끝냈고 12월 3일 안동, 12월 10일 부산 공연을 앞두고 있다.
“콘서트에 주력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무대에 대한 욕심과 내성적인 제 성격 때문이죠. 연예인으로 이름을 알리고, 얼굴을 알려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것도 좋죠. 저도 그렇게 되고 싶고, 하고 싶어요(웃음). 그러나 전 이 나이 먹도록 스스로 연예인이란 생각이 별로 들지가 않아요. 그저 음악을 하고 노래를 부르면 족하다고 생각할 뿐이죠. 그러니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무대를 찾거나 만드는 일에 골몰하는 거죠. 또 하나는 제 성격인데… 무척 내성적인 편이거든요. 말주변도 없고요. 인기 관리를 하려면 예능 프로그램에 욕심도 좀 내고 해야 하는데 ‘그건 남의 일’이라고 생각될 만큼 자신 없는 일이거든요. 그러니 더더욱 무대에 욕심을 낼 수밖에 없는 거고요.”
그의 이름 앞에 붙는 많은 수식어 중에 ‘뉴 트로트의 거장’이라는 말이 있다. 그의 콘서트를 관람한 기자가 기사를 쓰며 붙여준 타이틀인데, 여기에는 ‘트로트 가수의 공연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고, 보다 새롭고 탄탄한 콘서트를 기획해 보여주고 있다는 의미가 담겼다. 조항조는 트로트 공연임에도 남다른 스케일로 무대를 세팅한다. 느리고 편안한 템포에 자칫 관객들이 늘어질까 다양한 세트와 특수효과까지 동원해 눈을 뗄 틈을 주지 않는다. 좌석 하나하나의 시선과 조명 효과, 사운드에 대한 철저한 체크까지 무대에 관한 한 그의 자세는 치밀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뜨거운 열정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닌가 보다. 처음 지방 공연에서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사람”이라며 달갑잖은 표정으로 앉아 있던 관객들의 반응이 공연 이후 “꼭 다시 와달라”라는 요청과 함께 180도 바뀌었다. 뿐만 아니라 소위 ‘오빠 부대’라 불리는 열혈 팬들이 생겨나 공연마다 무리 지어 객석을 채우기도 한다. 콘서트에서 조항조의 인기는 아이돌이 부럽지 않을 정도다.
노래만 부를 수 있다면
조항조가 처음부터 트로트로 음악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록 음악을 하며 그룹사운드 활동으로 미8군과 언더그라운드에서 기본기를 다졌고, 1979년 그룹 ‘서기 1999년’의 보컬로 정식 데뷔했다. 1983년부터는 ‘코리아 판타지’라는 그룹의 리드 보컬로 활동하다 이후 솔로로 전향했다. 그래서 아직도 강렬한 사운드의 록 음악을 하던 보컬 조항조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음악에 미쳐 있던 시절이었어요. 강렬한 비트의 팝과 밴드가 만들어내는 사운드에 푹 빠져 있었거든요. 그 리듬 속에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제겐 황홀함 그 자체였어요. 형편이 좋았던 것도 아니에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무원이시던 아버지가 크게 사기를 당해서 정말 가난했던 시절이었어요. 개발을 앞둔 부지라며 아버지를 헬기에 태우고 둘러보게 했으니(웃음), 누군들 속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그렇게 전 재산이 날아갔죠.”
음악에 미쳐 있던 어린 청년에게 찾아온 첫 번째 시련이었다. 집과 연습실을 오갈 차비는커녕 끼니를 때울 밥값도 없었다. 하지만 노래를 부르고 싶은 패기만큼은 꺾을 수 없었나 보다. 그는 밥값이 없으면 굶고, 차비가 없을 땐 걸으며 버텼다. 한번은 공연장이 있던 강남에서 역촌동 집까지 서너 시간을 걸었다고. 집안에 ‘딴따라’가 나오는 꼴은 두고 볼 수 없다며 크게 반대하던 아버지도 변함없는 그의 모습에서 음악에 대한 진심을 보았고 결국엔 가수의 길을 허락해주셨다고 한다.
“사실 그때도 인기 연예인이 되어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아니, 할 줄도 몰랐죠. 앞서 말했듯 내성적이고, 말수도 없는 편이거든요. 노는 것에도 그다지 흥미가 없었고요. 큰 야망을 가지고 뭔가 일을 도모하는 것은 저와 거리가 있는 일이었지요. 어쩌면 제가 세상과 소통하며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가 노래였는지도 모르겠어요.”
세속적인 욕심 없이 그저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는 로커 조항조. 그런 그가 어떻게 트로트 가수의 길을 걷게 된 것일까? 좀처럼 보기 힘든 음악적 전향이다. 더구나 트로트를 ‘뽕짝’이라 부르며 폄하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로커 출신 트로트 가수 조항조의 드라마틱한 러브 스토리
아내를 위해 포기하고, 아내를 위해 시작한 음악
조항조는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하다. 그가 유부남인지 싱글인지, 그것도 아니면 ‘돌싱’인지 아는 사람은 오로지 매니저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한 토크쇼에서 조항조는 “장을 보러 간 마트에서 팬들이 나를 알아보자 조심스럽게 자리를 피해준 아내를 팬들이 내연녀로 오인한 적도 있었다”라며 웃지 못할 일화를 밝히기도 했다.
“저도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는 평범한 집안의 가장입니다. 밝히지 않고 말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밝힐 게 없고 말할 게 없다는 것이 맞아요. 저희 가족은 제가 노래하는 가수일 뿐 연예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들이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해요.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가족이 원하는 대로 저 또한 따르고 지켜주고 싶어요.”
그는 인터뷰 내내 자신은 특별할 것이 없노라, 평범하기 그지없노라며 겸손해했지만 정작 그가 털어놓은 아내와의 러브 스토리는 특별함 그 자체였고, 비범하기까지 했다. 한국의 가난한 청년 로커와 부유한 미국 교포 집안의 발랄한 아가씨와의 사랑이었으니 말이다. 때는 바야흐로 1970년대 후반이었다. 대강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미국에 사는 이종사촌 이모님이 한국에 들어갈 일이 있는 아내에게 저희 집에 무엇을 좀 전해달라고 부탁하신 거예요. 그 물건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심부름 왔다며 저희 집에 왔던 아내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해요. 그렇게 처음 만났죠. 보통 첫눈에 반했다면 선녀 같다는 둥 빛이 났다는 둥 하는데… 전 아내를 처음 본 느낌이 ‘정말 세련됐다’였어요. 왜 안 그랬겠어요. 1970년대의 한국과 미국은 엄청난 차이가 났잖아요. 미국 교포인 아내는 아무리 눈을 비비고 보아도 정말 세련돼 보였어요(웃음).”
지금도 여전히 세련미가 흐르는 조항조의 아내 홍숙재씨. 그녀는 방송 출연뿐 아니라 어떤 언론 매체에도 얼굴을 드러내길 꺼린다. 이번 인터뷰 자리에도 우연히 동석하게 됐다며, 사진 촬영도 한사코 고사했다.
“남편이 가수이고, 연예인이지 제가 그런 건 아니잖아요. 지금도 가족을 제외하면 남편이 가수 조항조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라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요. 그중 가장 큰 이유는 남편이 사랑을 노래하고, 인생을 노래하는 가수이기 때문이에요. 팬들은 남편의 노래를 들으며 그 이야기 속에 빠지는 거고요. 가수라는 예술가가 팬들에게 주는 판타지를 지켜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귀가해서 집으로 온 조항조는 내 남편이지만, 집 밖을 나서면 팬들의 조항조이길 바랐어요. 그뿐이에요.”
둘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그리워하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 나갔다. 시련도 많았다. 예상은 했지만 처가의 결혼 반대가 무척 심했다.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을 멀리 한국으로 시집보낸다는 것도 허락하기 쉽지 않은데, 사윗감이 장래가 불투명한 무명 가수라는 것은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조항조에 대한 홍숙재씨의 사랑은 흔들림이 없었다.
트로트 가수 조항조입니다
“연애 시절 두어 번 아내가 한국에 나온 적이 있어요. 정말 꿈같은 시간을 보냈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어 김포공항까지 바래다줄 참이면 눈물바람 그 자체였죠(웃음). 고마울 따름이에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그저 노래 부르는 것이 좋다는 남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으니까요.”
혼자이던 시절에는 견딜 수 있었으나, 아내가 고생하는 모습은 음악인 조항조를 조금씩 흔들리게 했다. 가수로서 빛을 보지 못했고, 음악활동은 뜻대로 풀리지 않던 시기였다.
“사실 아내는 음악을 열심히 하라고만 했지, 힘드니까 미국에 들어가 살자는 얘기는 단 한 번도 건넨 적이 없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하며 사는 게 아닌지, 가족에게 미칠 듯 미안하더라고요. 이건 아니다 싶어서 제가 미국 이민을 결정했어요. 음악을 포기한다는 뜻이었죠.”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겠다며 떠난 이민길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곳에서 그가 한 일은 취업이나 장사가 아닌 ‘New Wave Band’라는 밴드 그룹을 결성한 것이었다. 이 밴드는 교포사회에서 사랑을 받으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여태까지 조항조가 음악을 놓지 않았다면 이제는 음악이 조항조를 놓지 않았다.
“이민을 가자고 한 사람은 남편이었어요. 그때 남편의 눈빛이 제법 무서웠어요. 음악으로부터 상처를 받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음악을 포기하겠다는 남편의 뜻을 선뜻 따랐던 거였거든요. 음악 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결혼 반대에 부딪혔을 때도 괴로워하긴 했지만 포기하겠단 말은 하지 않았어요. 미국에서 알겠더군요. ‘아! 이 사람은 무대에 서야 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말이죠. 그래서 다시 무대로 돌아가라고 했죠.”
다시는 음악을 하지 않겠다며 떠난 길이었지만 돌아오는 길은 달랐다. 음악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믿음을 재확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가수의 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발표한 두 장의 앨범 모두 관심을 받지 못했고 그 후로도 5년이라는 긴 공백의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다. 힘든 현실은 변함이 없었지만 예전의 조항조가 아니었기에 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러다 드디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알릴 곡과 만나게 된다. 트로트 가요계의 히트 제조기라 불리는 김종수 작곡가의 ‘남자라는 이유로’를 통해 길고 긴 무명의 세월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그 후로 ‘만약에,’ ‘아직도,’ ‘거짓말’ 등 히트곡을 줄줄이 내놓으며 트로트 가수 조항조의 입지를 굳건하게 다졌다.
“작곡가 김종수님이 그러셨어요.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처럼 불렀을 때 사람들로 하여금 감정이입을 쉽게 끌어낼 수 있다고요. 그런 면에서 제가 말하는 것처럼 잘 부른다나요?(웃음) 영광이죠. 한 곡의 노래를 부를 때 전 그 노래 속의 주인공이 되고는 해요. 듣는 분들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제 노래 속에서 위로를 받았으면 해요. 그거면 족해요. 사람을 위로하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 뭘 더 바라겠어요?”
다소 허황되더라도 좋으니 앞으로 이루고픈 목표나 꿈이 듣고 싶다고 했다. 연말 가수왕이나 대박 히트곡으로 부자가 되고 싶다는 답 정도가 나올 거라는 예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는 “콘서트 티켓이 판매 개시 10분 만에 매진되는 경험을 한 번 해보면 소원이 없겠다”라고 말했다. 소박하고 착한 사람임은 짐작했지만 3년째 전국 순회 콘서트를 하고 있는 가수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예상 답변은 아니었다.
그마저도 돈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자신의 노래를 듣고 싶어 하는 팬들의 마음을 가장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쯤 되니 ‘조항조, 당신은 정녕 가수로소이다’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꼭 한 번은 조항조의 공연장에서 노래를 들어봐야겠다는 마음과 함께 말이다.
■글 / 강은진(프리랜서) ■사진 / 원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