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부대? 소녀 팬? 이들보다 더 열성적인 팬클럽이 있다. 걸 그룹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삼촌 팬이나, 미소년에게 마음을 빼앗긴 누나 팬들은 이미 10대들의 그것을 압도하는 팬덤(Fandom) 문화를 형성했다. 그런데 최근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적게는 열 살, 많게는 서른 살 이상 차이가 나는 연하의 스타를 동경하는 팬들의 활동이 눈에 띄는 것이다. 이모 팬, 아줌마 팬, 주부 팬 등으로 불리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뤄가고 있는 그녀들을 만났다.
지금까지 팬클럽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팬들은 10대들이 대다수였다. 아이돌 가수의 집 앞에서 밤을 새우고 스타의 일거수일투족을 쫓는 ‘사생팬’(연예인의 사생활을 쫓는 팬)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한류 스타에 열광하는 일본 아줌마들의 모습은 그저 남의 나라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도 점점 달라지고 있다. 팬층의 연령대가 조금씩 높아진다 싶더니 어느새 30대뿐 아니라 40, 50대 팬들의 활동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이다.
지난 추석 ‘주부 김광자의 제3활동’이라는 제목의 MBC-TV 단막극이 방영된 적이 있다. 가족밖에 모르고 살던 한 주부가 아이돌 가수를 좋아하게 되면서 가족 간의 애정과 신뢰를 회복하고 자신의 애환과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유쾌한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화제를 모았고, ‘광자 언니’는 40, 50대 주부 팬, 이모 팬, 아줌마 팬들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
또 얼마 전에는 KBS-2TV ‘안녕하세요’에 이와 비슷한 고민을 의뢰한 출연자가 등장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을 둔 엄마가 가수 백청강에게 빠져 아들에게 소홀하다는 것. 하지만 고민 공감 지수는 낮게 책정됐다. 이유는 엄마의 삶에 활력소가 되고 행복을 찾아주는 등 긍정적인 요소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 김현중, 이민호, 박유천(JYJ), 승리(빅뱅), 비, 이승기, 윤상현, 장근석 등은 30, 40대 여성 팬들이 많기로 유명한 연예인들이다. 갓난아이를 안고 공연장을 찾는 팬도 있고, 대학생 아들보다 더 어린 스타의 공연을 보기 위해 해외 원정을 떠나는 엄마들도 있다. 안방에서 TV를 보거나 인터넷을 통해 혼자 사랑을 키워왔던 30, 40대 팬들이 집 밖으로 나와 하나로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들은 공홈(공식 홈페이지)을 근간으로 하는 공식 팬클럽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소규모 모임을 만들어 또래 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활동은 각지에 흩어져 혼자 가슴앓이를 하는 개인을 집단으로 끌어들이는 강한 흡입력을 가졌다.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강한 결집력을 만들어준다.
단순히 스타를 좋아하는 것과 팬덤 문화에 합류하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개인이 모여 집단을 이루면 하나의 사회가 형성되고 문화를 낳는다. 그들은 함께 공연이나 영화를 보거나 사인회 등의 행사에 참석하면서 서로 돈독한 유대 관계를 유지한다. 물론 스타를 향한 사랑의 표현으로 대대적인 조공(스타에게 선물을 주는 것을 빗대어 표현한 말)을 하기도 한다. 거기다 스타와 눈인사라도 하기 위해 촬영장 앞에서 하루 종일 기다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스타를 향한 사랑과 열정은 10대들 못지않다. 콩나물 값은 깎아도 한 장에 만원을 훌쩍넘는 앨범을 살 때는 돈이 아깝지 않다는 그녀들. 무엇이 그녀들을 스타 앞에 서게 했는지, 그 이유를 지금부터 공개한다.
‘장근석닷넷’ 회원 ‘장어’들의 하루
온·오프라인상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대표적인 누나 팬 모임, ‘장근석닷넷’(이하 장닷넷)이 장근석 주연의 ‘너는 펫’을 ‘단관’(단체 관람)한다는 소식을 접수하고 그 현장을 찾아갔다. 그녀들은 자신들을 ‘장근석을 좋아하는 어른들’이란 뜻으로 ‘장어’라고 불렀다. 서로를 ‘님’으로 존칭하고 ‘벗’으로 여겼다. ‘장닷넷’ 회원 모두가 서로에게 ‘벗님’이었다.
이날(11월 12일)은 장근석의 무대 인사가 있는 날. 미리부터 이날의 단관을 준비한 정아크리님(장닷넷 닉네임·38)이 스무 장의 영화표를 예매해놓은 상태였다. 보통 이 같은 오프라인 모임은 공연이나 영화 개봉, 사인회 등과 같은 공식적인 자리나 촬영장을 방문하거나, 입·출국하는 스타의 모습을 보기 위해 공항을 찾아가는 등 아주 다양하다. 최근 ‘너는 펫’이 개봉됐기 때문에 그녀들의 발걸음은 더욱 분주하다고 한다.
우리 스타, 바라만 봐도 행복해요
정아크리(38) 근석이 트위터를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요. 보통 근석이가 잠이 안 올 때 새벽에 트위터를 하는 경우가 많아서 잘 때도 휴대폰을 들고 자거든요. 트위터에 글이 올라오면 알람이 울리도록 설정해놨는데 가끔 ‘폭트’(폭풍 트윗)를 할 때가 있어서 그때마다 일어나서 멘션을 달고 반응을 살펴보죠. 특별히 근석이가 글을 올리지 않은 날에도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트위터에 올라온 글은 없는지 쭉 훑어봐요. 그러고는 정신없이 아이들 등교 준비를 하고 출근한 뒤에는 쌓여 있는 업무를 처리해요. 책상에 놓인 결재 서류를 다 확인하고 나면 보통 10시쯤 되는데, 그때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장근석’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하죠. 밤사이 올라온 기사를 하나하나 살펴보고 댓글을 달고 악성 댓글에는 ‘신고’를 클릭해줘야 하죠. 세 개의 포털 사이트를 점검하고 나서 점심을 먹고 다시 업무에 매진합니다.
웬디(44) 정아크리님이 ‘장어’라는 것을 회사 동료들도 다 알지만 저는 회사에서 전혀 티를 내지 않아요. 주변 사람들이 제가 장근석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소소한 정보를 주기도 하겠지만 모든 것을 팬 활동 탓인 듯 몰아가는 분위기가 될 수도 있어서 조심하는 편이에요.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근석이를 볼 때 여성으로서 남자를 바라보는 느낌은 아니에요. 아들 같고 가족 같은 느낌이 더 크죠. 그래서 더 건강했으면 좋겠고, 크고 작은 사건으로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고…. 또 우리 아들도 근석이처럼 멋지게 자라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하죠.
뽀야(34) 저는 거의 10년 전부터 근석이를 좋아했어요. 일본 콘서트에도 가고 싶고, 직접 만나고도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더라고요. 혼자 ‘장닷넷’도 거의 1년간 눈으로만 보다가 이제야 겨우 가입을 했어요. 최근에는 4박 5일 동안 일본에 성지순례(스타와 관련된 곳을 돌아보는 여행을 일컫는 은어)를 다녀왔는데 무척 즐거웠어요. 아이를 낳고 혼자만의 시간이 없었는데, 여행도 가고 친구도 만나서 정말 좋은 시간을 가졌죠. 요즘 도쿄 거리에 가면 근석이의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어요. 광고나 포스터가 많거든요. 편의점에 들어가도 여러 가지를 볼 수 있죠. 물론 다른 스타들도 인기가 많지만 최근의 한류 스타는 장근석이 대세인 것 같아요(웃음). 이렇게 ‘장닷넷’에 가입하고 보니까 정말 좋은 정보가 많더라고요. 해외에서 판매되는 물건을 사거나 해외 콘서트 티켓을 구하는 것이 어렵거든요. 여기서는 단체로 구입하니까 신청만 하면 돼서 무척 좋아요. 진작 가입할 걸 그랬어요.
웃음여왕(36) 팬덤 활동을 하려면 경제적인 면도 고려해야 해요. 해외 공연을 보러 간다든지 하면 적지 않은 비용이 드니까요. 제가 아는 분 중에는 해외 공연 일정이 나오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대요. 남편의 수입으로 공연 보러 해외 간다는 게 미안하잖아요. 살림하고 아이 돌보면서 틈틈이 아르바이트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도쿄돔(‘장근석 2011 더 크리 쇼 인 도쿄 돔 - 더 비기닝’, 11월 26일 공연)이 있잖아” 하며 힘을 낸다고 하더라고요. 보통 ‘장어’들 중에는 사회활동 하는 여성이 많아요. 경제적으로 남편에게만 의존하는 사람들은 활발히 활동하기가 쉽지 않죠.
상하이벗(45) 저는 상하이에 간 지 1년이 채 안 됐어요. 말도 잘 안 통하고 남편은 일하느라 바쁘고, 아이들은 다 자라서 저만 홀로 외롭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그러다가 MBC-TV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 근석이를 봤는데 어린 나이에 생각하는 게 참 멋있더라고요. 외국에서 생활하는 저에게는 애국심이 많은 청년으로 보여서 기특하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근석이가 예쁘잖아요. 보고 있으면 눈도 마음도 참 즐거워져요. 처음에는 가족이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점점 활기를 찾는 저를 보며 지금은 응원해주는 편이에요.
해피고고(41) 저는 섬유근육통이라는 병을 앓고 있어요. 꾸준히 약을 먹어야 하는 병인데, 몸은 아프고 사는 건 매일 그날이 그날 같아서 재미가 없더라고요. 그러다가 일본 방송에 근석이가 나오는 것을 봤어요. 자신감 넘치고 활기 있는 모습을 보니까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니까 자꾸 보게 되고, 예전 작품도 살펴보면서 점점 빠져들게 됐어요. 그러다 ‘장닷넷’을 알게 됐고 저와 같은 마음의 사람들이 있다는 게 반가웠죠.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서 예쁜 근석이도 보고 즐겁게 생활하다 보니 이제는 약을 먹지 않아도 될 만큼 병이 호전됐어요. 그래서 가족이 더 좋아해요.
장근석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장어’들이 나누는 것은 비단 정보뿐만은 아니었다.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누던 그녀들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던 웃음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가정에서는 훌륭한 아내이자 엄마로서, 직장에서는 노련한 커리어우먼으로서 활동하고 있는 그녀들은 ‘제3의 활동’을 통해 자신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영등포 롯데시네마에서 오후 2시에 상영하는 ‘너는 펫’을 보기 위해 ‘장어’들이 모이기로 한 시각은 오전 11시. 일찌감치 약속시간을 잡았지만 교통체증이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조금씩 늦는 바람에 모두 모여 자리를 잡고 앉은 시간은 12시 즈음이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여자들의 수다는 아무도 못 말린다. 그런데 접시가 몇 번 깨지고도 남을 인원인 열 명의 회원이 식당에 자리를 잡자 북새통이 따로 없었다. 이들의 화제는 단연 관람을 앞둔 영화 ‘너는 펫’이다. 개봉한 지 3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적게는 세 번, 많게는 열 번 이상 영화를 봤다고 한다. “저는 중국 상하이에 살고 있는데 ‘너는 펫’ 상영에 맞춰서 한국에 들어왔어요. 개봉 당일 일곱 번 보고 어제 한 번 더 보고, 오늘까지 아홉 번 봤어요. 좀 있다 피카디리극장에도 갈 예정이라 총 열 번을 보는 셈이에요. 상하이로 돌아가기 전에 몇 번 더 볼 생각이에요.”(상하이 벗ㆍ45) 대충 메뉴를 주문하고 모임 첫 행사인 정아크리님의 ‘이벵’(이벤트)이 펼쳐졌다. 중국에서 최근 발매한 뜨끈뜨끈한 「Lounge H」 앨범 다섯 장을 정아크리님이 사비로 마련해 추첨을 통해 나눠주는 것이다. 참석한 회원의 닉네임이 적힌 종이를 종이컵에 넣고 무작위로 뽑는데,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온다. 이어 각자 가지고 온 물건들을 펼쳐놓고 서로 바꿔가며 꼼꼼히 살펴본다. 지난 1년간 일본, 중국, 한국에서 출시된 앨범, 잡지, 포스터 등이 한자리에 다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많은 관심을 모았던 것은 지난달 일본에서 출간된 「CRI-J vol.3」. 이것은 DVD와 사진집, 포스터가 포함된 에디션으로 1년 구독료가 15만원 정도 하는 장근석 개인 잡지다. 1년에 네 번 발행되며 최근 3권까지 출판됐다. 모두 일본어로 돼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깔끔하게 잘 찍힌 장근석 사진을 보고 ‘장어’들은 환호했다. 식당에서의 1차 모임을 정리하고 일찌감치 롯데시네마로 자리를 옮겼다. 때마침 1차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멤버들이 속속 도착하자 ‘너는 펫’의 대형 패널 앞에서 사진 촬영도 했다. 잠시 후 영화관 앞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때 적혈화향님이 준비한 미니 이벤트가 진행됐다. 장근석이 좋아한다는 호피무늬가 들어간 머리핀을 나눠주는 것. 한때 장근석이 호피무늬에 심취한 적이 있어서 ‘장어’라면 호피무늬 옷 한 벌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란다. 그때 다른 관객이 장근석 사진이 담긴 한 의류업체 포스터를 들고 있는 것을 포착한 정아크리님. 영화가 끝나면 근처 매장에 가서 포스터를 얻기로 결정하고는 상영관으로 향했다. 영화관에 입장한 ‘장어’들은 일단 무대 인사를 앞두고 카메라로 동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장근석의 입장. 관객 대부분이 장근석의 팬인 듯, 떠나갈 듯한 함성이 객석을 가득 메웠다. 일명 ‘면봉석’(스타의 얼굴이 면봉만큼 작게 보이는 자리라는 뜻)에 앉은 ‘장어’들인지라 아쉬움도 있었지만 스타를 직접 봤다는 만족스러움이 더 큰 듯 보였다. 순식간에 무대 인사가 끝났다. 장근석이 무대에서 사라지자 일본 단체 관람객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르르 몰려 나갔다. ‘장어’들은 “아마도 무대인사를 위해 또다른 극장으로 이동한 근석이를 따라 가는 것 같다”라며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영화도 보지 않고 나가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다”라고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덕분에 무대 인사 때 꽉 찼던 객석은 반 이상 텅텅 비었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됐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그녀들은 약속했던 장소로 달려갔다. 장근석이 슈트를 입고 찍은 포스터를 대량 확보한 ‘장어’들은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뒤 자리 잡은 인근의 커피숍. 무대 인사 단체 관람 모임은 그동안의 정보를 공유하고 이후의 계획에 대해 논의하는 것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일본 방송에 근석이가 나오는 것을 봤어요. 자신감 넘치고 활기 있는 모습을 보니까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니까 자꾸 보게 되고, 예전 작품도 살펴보면서 점점 빠져들게 됐어요. 그러다 ‘장닷넷’을 알게 됐고 저와 같은 마음의 사람들이 있다는 게 반가웠죠” |
■글 / 진혜린(객원기자) ■사진 / 안진형(프리랜서) ■취재 협조 / 장근석닷넷(www.jangkeunsuk.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