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유교 국가! 무속인 등장에 깜짝?
“한낱 액받이 무녀에 불과하옵니다”
조선은 엄연한 유교 국가였다. 그래서 장희빈이 궁궐에 무녀를 들였다는 것을 빌미로 사약을 받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해품달’에서는 아예 궁궐 안에 무신 기관인 ‘성수청’이 있고, 더구나 여주인공인 연우가 무녀인 것은 참으로 특별한 일이다. 실제 조선시대에 성수청과 무녀가 존재했을까?
조선 초기 약 1백년 동안은 유교보다 무신교와 불교가 장악하고 있었다. 실제 궁궐에 무속 신앙을 관장하는 ‘성수청’이 조선 초기에 존재했고 당시 무녀의 위상도 지금과는 조금 달랐다. 지금의 정치인, 경제학자, 과학자들이 미래를 점치듯 그 시대의 지식인으로 불렸던 사람들이 무녀들이다. 그 시대 무녀들은 신선이고 선녀였다. 하지만 훗날 유림의 지배를 받으면서 조선 초기에 꽃피웠던 무속신앙에 대한 기록이 사라지고, 후손들은 ‘조선시대=유교’라는 공식을 성립시키게 된다. 때문에 조선시대의 저변 문화인 무신교를 드라마 전반에 내세운 것은 역사적 관점에서 봤을 때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다.
특히 유교 세력과 무속 세력이 충돌하는 시기가 바로 성종 즈음인데 드라마의 배경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성수청을 없애겠다”라고 겁박하는 대왕대비와 연우도 지키고, 성수청도 지키기 위해 고심하는 국무의 모습에서 작가의 두터운 역사 지식을 느낄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궁궐 내에서 무속 행사들이 많이 열렸다. 수많은 방법을 동원해 액을 예방하고 피하고 쫓아냈다. 법사가 경을 외도록 하기도 하고, 왕실 사당에 몸을 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월처럼 잠자는 왕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액을 받아내는 ‘액받이 무녀’가 실존했다는 기록은 없다. 단지 왕의 안위를 기원하는 갖가지 무속적 행위들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해와 달의 엇갈린 운명, 세자빈 간택부터 합방까지
“중전을 위해 옷고름 한번 풀지”
세자빈 간택을 앞두고 연우에게 처녀단자를 올리라는 마음을 전한 세자. 하지만 연우의 오라버니 허염은 세자에게 명을 거둬달라고 읍소한다. 단 한 방에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공개 구혼. 지금의 어느 스타 오디션보다 더 치열한 경쟁력을 자랑했을 것 같은데, 왜 연우의 가족은 세자빈이 되는 일을 반대했을까?
간택 참여를 피하려 했던 것이 그 시대의 보편적인 반응이었다. 국혼을 주관하는 것은 대왕대비. 보통 내정자를 정한 후 형식적인 간택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의 딸을 들러리로 세우는 것이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지원자가 열 명 안팎에 그쳤다고 한다. 심지어 인조 때는 하도 지원을 하지 않아 무당의 신기를 동원해 처녀를 숨겨놓은 집을 찾아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처럼 세자빈 간택이 동화 속 이야기처럼 핑크빛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사도세자와 결혼한 혜경궁 홍씨의 기록에 따르면 전담 미용사와 몸종, 가마 등이 필요해 언니의 혼수 비용까지 긁어모으고 끝내 빚을 내야 했다고 전해진다. 무엇보다 가장 두려웠던 것은 연우처럼 정쟁에 휩싸여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한다. 또 최종 결승전인 3간택에 든 처자는 간택이 되지 않아도 평생 왕의 여자로 수절하며 살아야 한다는 점도 무서운 일이었을 것이다.
연우를 잊지 못하고 중전이 달갑지 않은 훤은 갖은 핑계를 대며 8년 동안이나 합방을 미뤄왔다. ‘잘 하고 있다, 훤!’ 하며 응원하는 마음 한편에는 ‘자그마치 8년이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왕이 이토록 오랜 기간 합방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
조선시대에 실제 그런 왕이 존재하기는 했다. 헌종은 열 살 때 첫 번째 결혼을 했다. 하지만 7년 만에 부인이 죽자 두 번째 부인을 간택하게 된다. 이때 3간택에 든 김씨에게 연심을 품었는데 왕실에서는 홍씨를 간택하고 만다. 억지로 홍씨와 결혼했지만 첫날밤부터 각방을 썼다고 전해진다. 합방이 없으니 후사도 없었다. 훗날 김씨를 후궁으로 들이며 그녀를 위해 낙선재를 지어주는 등 각별히 총애했다고 한다.
보통 세자와 세자빈의 결혼은 10대 초에 이뤄진다. 그리고 아직 옥체가 미령하다는 이유로 몇 년간은 별거를 하게 한다. 하지만 그도 오래가지는 않는다. 보통 10대 중반부터 방을 같이 쓸 수 있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예를 들자면 열 살에 결혼한 헌종은 3년이 지나 열세 살의 이른 나이에 합방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월을 보호하기 위해 중전과 합방을 하기로 결심한 훤. 옥체의 기를 더하는 침을 맞고 한약을 먹고 교태전으로 향하니 살아 있는 닭을 든 궁녀가 떡하니 서 있다. 더구나 ‘의관을 벗으시옵소서’, ‘옥대를 푸시옵소서’ 하며 단계별 솔루션을 제시하는 궁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이런 와중에 어떻게 거사를 치를 수 있을까?
왕의 합방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었다. 지금의 대통령 선거에 비할까. 오로지 왕의 부부생활로 후계자를 만들어낼 수 있었으니 왕의 합방은 일국의 거사였다. 때문에 부부생활은 복잡한 공식절차에 따라 진행됐다. 더구나 ‘성자의 모습’을 요구받았던 조선의 왕은 개인의 쾌락을 위해 오늘은 1번 후궁, 내일은 2번 후궁 해가며 궁녀들의 방문턱을 마음대로 넘을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사람은 환관(내시)이었다. 왕의 일거수일투족이 이들에 의해 감시되고 기록된다. 왕이 혼자 있을 때나 심지어 중전이나 후궁과 하룻밤을 보낼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환관과 관상감이 ‘천지만물이 정기를 주는’ 길일과 합이 맞는 상대를 정하면 택일에 한해서만 ‘옷고름을 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어느 날 문득 부인을 품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던 조선의 왕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기록에 의하면 중전과 왕의 합방은 한 달에 한 번꼴이었고, 그 밖의 후궁들은 왕의 품에 안길 기회가 더 적었다고 한다. 가까스로 합방이 이뤄져도 단둘만의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왕의 합방은 우물 정(井)자로 돼 있는 방에서 이뤄졌다. 왕과 중전이 있는 가운데 방을 둘러싼 나머지 여덟 칸의 방에는 상궁이 한 명씩 들어가 자리를 지켰다. 상궁들은 왕에게 관계 중 조언을 할 수 있었으며 때에 따라서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 직접 도움을 줄 수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 들으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조선의 왕은 당연한 절차로 받아들여야 했다.
왕에게 연심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내가 잘생긴 건 잘 안다만, 그만 보거라”
일국의 왕에게는 연심이 허락되지 않았다. 부부생활은 왕이 맡은 소임을 다하는 것일 뿐. 사실 왕의 부부생활은 왕권과도 직결되는 일이었다. 군주로서 지켜할 법도를 어기고 자신의 의견을 얼마나 피력할 수 있는지는 왕권의 척도였다. 왕권이 강했던 연산군과 광해군의 경우는 엄격한 왕실 법도에서 일탈하기도 했으며 숙종 또한 장희빈을 가까이하며 여색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왕들조차 신분의 격차를 뛰어넘는 드라마틱한 연애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변의 반대를 뒤로하고 후궁을 들인 태종과 유난히 한 후궁을 자주 찾으려고 시도한 중종, 궁녀였던 최씨를 빈의 자리에까지 앉힌 숙종, 중전과의 합방을 거부한 헌종의 이야기가 역사에 기록될 만큼 아주 드문 일이었다.
드라마 속의 왕 ‘훤’은 궁궐의 담을 넘거나 툭하면 호위무사 운을 대동하고 잠행을 나선다. 저잣거리를 활보하고 무녀 월과 설레는 첫 데이트도 즐긴다. 길바닥에 앉아 손 인형극을 보는 국왕의 모습은 친근감 넘치지만 아무래도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지 않을까?
훤이 몸의 실루엣을 드러낸 채 물에 몸을 담그고 호위무사인 운에게 “너도 이리 들어오겠느냐”라고 묻는다. 그렇다면 실제로 궁궐 내 동성애가 존재했을까?
영화 ‘쌍화점’으로 대변할 수 있는 고려시대 공민왕의 유명한 일화 외에 특별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다. 실제 존재했더라도 기록으로 남길 리 없으며 행여 관련된 기록을 후대에 발견하더라도 들춰내려는 학자들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왕의 동성애와는 달리 궁녀들의 동성애는 공공연히 일어났던 것으로 보고 있다. 궁녀와 궁녀끼리는 물론 궁 밖의 친척이나 과부들을 불러들여 이른바 ‘대식’을 행했다. ‘함께 밥을 먹는다’라는 표현으로 대신한 동성애 사례는 민담에 자주 등장할 만큼 궁녀들의 문화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한 이들의 문화를 지금에 와서 비판할 수 없는 것은 왕의 승은을 입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던 그녀들의 평생 수절을 지켜야 하는 고통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민화 공주는 꽃도령 허염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허염과 힘들게 혼인하게 됐지만 이 커플 또한 8년간 합방을 하지 못한 상황이다. 장성한 양명대군(정일우 분)은 아직 혼례도 올리지 못했다. 실제 공주와 대군의 결혼생활이 궁금하다.
조선에는 두 가지의 국혼이 있었다. 왕세자의 가례, 대군과 공주의 길례다. 가례와 길례 모두 10대 초반에 이뤄진다. 양명대군 역시 이미 결혼했어야 마땅하다. 아직 혼사를 치르지 못한 것은 드라마니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민화 공주처럼 오랜 기간 합방을 하지 못한 것은 역사적 실례가 있다. 세종의 손녀 경혜 공주의 일. 세종이 죽기 직전 서둘러 결혼한 경혜 공주는 세종이 죽자 3년상을 치르는 동안 부부생활을 할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문종이 죽어 또다시 3년상을 치러야 했다. 도합 6년간 수절 아닌 수절을 해야 했던 경혜 공주는 후에 두 명의 자녀를 낳았다.
동아시아 역사 연구학자. 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동양사를 전공했다. 현재 ‘오마이뉴스’에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 읽기’ 코너를 연재하며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궁녀들의 내밀한 삶을 기록한 「왕의 여자」가 있다. |
■글 / 진혜린(객원기자) ■사진제공 / 이성원, M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