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 4인이 보내온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단 한 가지

명사 4인이 보내온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단 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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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자락 후회 없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명사들에게도 후회의 순간은 무수하다. 김창완, 손숙, 김홍신, 김성녀가 지난날의 나에게 보내는 후회의 편지를 들려준다. 인생 후배들에게 건네는 조언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늘 못마땅했던 나
김창완

유난히 키가 작았던 나는 등굣길에 놀림을 받았다.
“가방이 땅에 닿으려고 그런다. 가방이 창완이를 학교 데려다주는구나.”
그렇게 놀리는 동네 할머니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걸어가며 나는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STRONG>가수
</STRONG>1977년 그가 리드 보컬을 맡은 그룹 ‘산울림’의 등장은 음악계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여전히 음악인으로서 녹슬지 않은 면모를 과시하고 있는 그는 라디오 진행자, 연기자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가수 1977년 그가 리드 보컬을 맡은 그룹 ‘산울림’의 등장은 음악계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여전히 음악인으로서 녹슬지 않은 면모를 과시하고 있는 그는 라디오 진행자, 연기자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저 쭈그렁바가지 할멈 거울 속에는 아마 달걀귀신이 들어 있을 거야. 그리고 그 달걀 안에는 새카만 고양이가 있지. 그 고양이는 나 같은 애들을 골탕 먹이려고 늘 엿보고 있지…. 나는 저 할멈 속에 고양이가 있는 걸 알지.”
놀림을 당할 때마다 나도 키가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그 할머니보다 키가 더 컸던 기억은 없다. 어린 시절 나는 늘 키가 작았고 그게 불만이었다. 키가 작으면서도 생쥐같이 동작이 빨라 축구도 잘하고 달리기도 큰 애들한테 뒤지지 않는 애들도 있었는데, 나는 키도 작은 데다 굼뜨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방과 후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야구를 하며 지르는 소리가 흙바닥을 달릴 때 피어나는 먼지처럼 뽀얗게 퍼지고 있었다. 나는 땅을 보며 걷고 있었고 가방이 나를 집으로 데려다주는 중이었다.

“공, 고옹~.”
나는 야구하는 아이들 쪽으로 고개를 돌려봤다. 타자가 홈을 떠나 1루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캐처는 일어서 있었고 수비수들이 공을 잡으러 가야 하는데 다들 자리에 서서 “공, 고옹~” 하며 외치고 있었다.

나는 하늘을 보았다. 파란 하늘이 예뻤다. 그때 매 한 마리가 쥐를 보고 돌진하듯 야구공이 날아오는 게 얼핏 보였다. 보였다기보다는 보이기 전에 눈을 감았던 것 같다. 그러곤 속으로 생각했다. ‘학교 운동장은 넓다. 야구공은 조그맣다. 이 넓은 학교 운동장에서 야구공이 내 머리에 맞을 확률은 무척이나 낮다.’ 공을 확실히 보기 전에 눈을 감았는데 확률 계산도 끝나기 전에 확실하게 공이 머리에 부딪혔다. 아이들이 조롱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구공을 머리통으로 받네. 깔깔깔….”
나는 운동신경이 비둘기처럼 느렸다. 축구나 배구처럼 편을 갈라서 해야 하는 게임에서는 내가 속한 팀 사기가 뚝 떨어지곤 했다. 축구 경기로 생각하면 한두 골 정도는 먹고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키가 작고 운동은 지지리 못하고 게다가 성적도 고만고만했다. 내 앞에는 늘 나보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열댓 명은 있었다. 나는 밥숟가락만 놨다 하면 졸음이 쏟아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데 걔네들은 잠도 안 자고 운동도 공부도 하는 듯했다. 그런 내가 늘 못마땅했다. 키가 작아서 불만이었고, 게을러서 마음에 안 들었고, 용기가 없어서, 수줍어서, 성적이 안 올라서, 주먹질을 잘 못하는 걸 친구들한테 숨겨야 돼서 못마땅했다.

그 시절 키도 크고 공부도 잘하던 김 박사한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요즘 잠자기 전에 외우는 걸 물었다.
“중국의 4대 미인이 누구누구지?”
“양귀비, 서시, 왕소군 또 누구였더라?”
“물고기가 가라앉았다는 그 여자?”
“아니 그건 서시고.”
“왕소군은 그 여자 구경하다 기러기가 떨어져 죽었다며. 양귀비는 꽃이 부끄러워서 오므라들었다잖아. 달이 부끄러워서 숨었다는 여자. 그 여자 맞다.”
“그래, 폐월 초선… 낄낄낄….”

이제는 사람 이름 몇 개 외우기가 참 힘들다. 이제는 내 키 높이에서 뛰어내리지 못한다. 이제는 단어 몇 개 외우기가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옛날엔 달랐다. 그런 건 밥숟가락 드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그럼에도 나는 늘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결국 내 꿈을 접게 만든 건 나 자신이었다.

스물한 살의 결혼
손숙


나는 스물한 살 대학교 3학년 때 결혼했다. 오직 사랑 하나만 붙들고 우리 엄마의 엄청난 반대에도 꿋꿋하게 맞섰다. 그냥 내 눈앞에 보이는 그 남자 한 사람만 보고서 참 용감하고(?) 무모한 결혼을 감행했다. 그때의 내겐 미래가 암담했었고 아무런 확신도 없었으며 집안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STRONG>배우
</STRONG>대한민국연극제 여우주연상, 각종 문화훈장, 대통령표창 등을 수상한 우리 시대 대표 배우로 대표작을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제6대 환경부장관을 지냈다.

배우 대한민국연극제 여우주연상, 각종 문화훈장, 대통령표창 등을 수상한 우리 시대 대표 배우로 대표작을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제6대 환경부장관을 지냈다.

오랫동안 아버지는 소식조차 없었고, 무조건 자식들은 서울 가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어머니의 무모한 상경으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무척 힘들었고, 그 때문에 식구들은 모두 서로를 증오하며 으르렁댔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그 집구석에서 탈출하고 싶었고, 때마침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진 터라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보니 그곳도 낙원은 아니었다. 나는 그 남자가 나의 힘들고 허전한 부분을 모두 채워주고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한데 그게 얼마나 허망한 바람이었는지를 금방 알게 된 것이다.

사실은 그 남자도 몹시 힘들고 지친 상태였다. 그래서 결혼을 하면 아내가 자신의 의지가 되리라 믿고 있었던 거다. 게다가 엄청나게 힘든 경제적 문제가 우리의 사랑 따위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알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결혼은 꿈이 아니었다. 혹독한 현실이었으며 그 현실을 이겨나갈 아무런 준비 없이 나는 덜컥 결혼을 해버린 것이다. 남편도 나도 참 힘들었다. 나는 아름답고 우아한 현모양처를 꿈꾸었는데 현실은 나를 자주 악처로 만들었다. 백마 탄 남자는 어디에도 없었으며 때때로 내 자존심은 바닥이 났고 친정에 가서도 나는 늘 고개 숙인 딸이었다.

생각해보니 스물한 살 그때 이루고 싶은 것이 아주 많았었는데…. 다시 그 나이로 돌아간다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만 밤새워서 하고 싶다.

늘 나의 꿈이었던 글도 다시 치열하게 써보고 싶다. 신춘문예에도 응모해보고 동서양 고전, 철학책, 역사책도 눈이 아프도록 읽고, 외국어도 두어 개쯤 마스터하고 그리고 배낭 메고 훌쩍 여행도 떠나보고, 남학생들하고 미팅도 해보고 그리고 무엇보다 제때 대학도 졸업하고. (아주 나중에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그 시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나이에 덜컥 결혼이라니…. 너무 일찍 어른이 되는 바람에 아름다운 시절을 놓쳐버린 것만 같다.

결혼은 좀 더 나이를 먹은 다음, 그 나이에 할 일들을 어느 정도 이룬 다음, 죽도록 사랑하는 남자 말고(그 남자는 그냥 가슴속에 남겨두고) 친구처럼 편안하고 따뜻한 남자 만나서 인생을 걸 만큼 큰 기대는 하지 말고 그렇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

그런데 또 만일 내가 그때 그 남자랑 결혼하지 않고 다른 길을 갔더라면 그것도 평생 내 가슴속에 후회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인생에 정답은 없는 것 같다. 우리는 늘 가보지 않은 길을 그리워하고 후회하지만 막상 그 길을 갔을 땐 또 다른 후회가 생길 것이다.

그래서 요즘엔 그때 결혼을 해서 좋았던 일들을 생각해보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고 보니 좋은 점도 쏠쏠히 많았던 것 같다. 한때는 엄청나게 후회했던 결혼도 이제는 그저 무덤덤할 뿐…. 그렇게 내 인생은 끝나가고 있다.

내가 숨쉬는 한 그대는 ‘사사’
김홍신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향기는 후회인지도 모른다. 부끄러운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것은 영혼의 눈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게 다가오는 후회는 태풍이 휩쓸고 간 폐허 같아서 드러내기 싫었다.

<STRONG>소설가·건국대학교 석좌교수</STRONG>
장편소설 최초로 1백만 부 돌파 기록을 세운 「인간시장」(1981년작)의 작가. 15, 16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김홍신의 대발해」, 「초한지」, 「인생사용설명서」 등을 썼다.

소설가·건국대학교 석좌교수 장편소설 최초로 1백만 부 돌파 기록을 세운 「인간시장」(1981년작)의 작가. 15, 16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김홍신의 대발해」, 「초한지」, 「인생사용설명서」 등을 썼다.

사람이 스스로 움직이는 동력을 잃으면 낙엽이 된다. 아내가 그랬다. 오랜 세월 병상에서 현대의학의 도움으로 겨우 숨을 쉬었다. 어려서 얻은 천식이 기관지 확장으로 이어지며 평생 병치레를 했다. 체중은 39kg을 넘어본 적이 없으며 마지막 2년 동안은 남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낙엽 같았다. 에어컨 실외기만큼 큰 산소발생기, 코에 줄을 연결하는 호흡기에 의지해 숨을 쉬고 병원에 갈 때는 이동용 산소통을 들고 돕는 이가 따라가야만 했다.

아내가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그 지경에 나는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내가 주동이 돼 한나라당의 개혁을 위해 ‘국민속으로’를 결성해 이우재, 이부영,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의원이 탈당했고 나도 약속대로 2003년 정기국회 마지막 날인 12월 10일 탈당과 동시에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아내의 병상을 지키던 나는 당시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과 김한길 위원장의 간곡한 청으로 정치 1번지라는 종로에 공천을 받았다. 투표일 40일 전에 아무 연고도 없는 종로에 출사표를 던진 것이다.

중환자실에 들어가 미동도 하지 않는 아내에게 물었다. “종로에 출마를 하라는데 할까?” 아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어 번 더 묻자 아내가 한참 만에 살포시 눈을 떴다가 감았다. 아내는 두어 달 넘게 눈을 떠본 적이 없었던지라 기적과도 같았다. 나는 출마해도 좋다는 뜻으로 해석해버렸다. 제15대 민주당 대변인으로 비례대표 4번을 받아 국회의원이 될 때 아내가 분명 반대를 했었음에도 나는 그 찰나의 눈빛을 찬성으로 단정해버렸다.

신경과 근육 마비 상태라도 의식이 있어 소리는 들을 수 있었을 텐데, 만약 아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도대체 뭐라고 했을까. 죽어가는 사람 놔두고 무슨 놈의 출마냐고 했으면 포기를 했을까. 선거 40일을 남겨두고 공천을 받아 종로에 갔지만 며칠을 허송세월했다. 정동영 의장이 출마하지 않는 한 민주적 절차를 통해 공천을 결정하자는 출마 예정자들의 반발은 거셌다. 그들은 결국 가장 열성적으로 내 선거를 도왔다.

아내 없는 선거운동은 힘겨웠다. 아내의 자리를 대신한 건 대학을 휴학한 딸이었고 군 복무 중이었던 아들은 먼 걸음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선거 기간 중에 아내는 단 한마디의 말도 못한 채 마흔아홉 해밖에 살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

딸아이가 싸늘한 엄마 품에 엎드려 “엄마, 이다음에는 절대 아프지 마”라며 짙게 울었다. 나는 딸아이의 이 한마디만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이 솟는다.
삼우제를 지낼 때까지 종로에 단 한 발자국도 딛지 않았다. 출마를 포기할 작정이었다. 아이들이 말리고 주변에서 말리자 마지못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결국 5백여 표 차이로 낙선했다. 각종 여론조사와 출구조사에서도 당선 가능성이 높았지만 하늘은 나를 쓸 데가 따로 있는 듯했다. 가장 안타까운 후보, 꼭 당선돼야 할 후보로 선정되는 영광도 동시에 누렸다. 낙선이 확정됐을 때 수고한 모든 사람들에게 “잘 놀다 간다”라는 인사를 하고 애써 웃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마당에는 이름 모를 가녀린 풀꽃들이 피어 있었다. 아내는 풀꽃은 물론 잡초조차도 뽑지 못하게 했다. 실낱같은 자신의 생명줄을 알기에 그러했으리라.
아프리카 스와힐리족은 사람이 죽어도 누군가 기억하는 한 ‘사사(Sasa)’라 하고,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으면 비로소 진짜 죽었다는 뜻에서 ‘자마니(Zamani)’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변해버리는 거라고 했다. 너무 오래 병상에서 낙엽처럼 살다가 낙엽처럼 떠난 그녀에게 가슴속 오래 삭인 말을 해야겠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대는 사사다.”

옳은 말만 하는 엄마
김성녀


우리 부부는 참 가진 게 없는 가난한 연극쟁이였다. 남편(손진책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꿈을 먹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편에게 삶을 위해 꿈을 접으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일상생활을 책임지는 건 언제나 내 몫이었다.

<STRONG>배우
</STRONG>창극, TV 드라마, 마당놀이, 연극, 뮤지컬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김성녀라는 이름 그 자체를 하나의 장르로 구축했다. 요즘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으로 창극을 더 많은 대중에게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배우 창극, TV 드라마, 마당놀이, 연극, 뮤지컬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김성녀라는 이름 그 자체를 하나의 장르로 구축했다. 요즘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으로 창극을 더 많은 대중에게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나는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했다. 연극을 하면서 틈만 나면 드라마에도 출연하고 라디오 진행도 하면서 남들의 두 배 세 배 몫을 해냈다. 남편은 남편대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펼쳐나가고 나도 주어진 삶에서 도망치지 않고 한 발 한 발 열심히 노력하면 우리 가족 모두 행복할 거라고 믿었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내가 살아온 것처럼 ‘무엇이 돼야 한다, 무엇을 이루어내야 한다’라는 목표를 정하고 매진하기를 요구했다. 칭찬보다는 아쉽고 고쳐야 할 점을 일러주는 것이 올바른 사랑이며 강하게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잘 크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언제나 밝은 모습만 보여주던 딸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대한 기대치를 채우지 못하는 자괴감으로 홍역을 앓고 있었다. 또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공부해 외국어에 능통하고 뭘 하든 잘할 수 있는 아이라고 믿었던 아들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부모와 떨어져 살면서 건강이 상한 것뿐 아니라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긴 방황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뒤늦게 안 아이들의 아픔과 외로움을 지켜보며 엄마로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당혹감에 기가 막혔다. 돌이켜보니 잘했다고 칭찬하는 법이 없었던 엄마, 언제나 옳은 말만 하는 엄마, 좌절을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 힘들다고 말할 때 극복하고 이겨내라고 다그치기만 한 엄마…. 나는 엄마가 아닌 선생님이었다.

우리 아이들은 자기들이 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던 것을 부모인 우리에게 베풀며 살았던 것 같다. 공연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가면 “엄마, 많이 힘들지. 물 갖다줄까? 이불 덮어줄게. 엄마, 푹 자” 하며 그 조그마한 손으로 이불을 꼭꼭 덮어주며 엄마처럼 나를 다독거려주던 아이들이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주지 못했던 보살핌과 따뜻한 위로를 아이들에게 받으며 살아왔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그리고 그 칭찬과 위로를 아이들이 엄마인 나에게 얼마나 간절히 듣고 싶어 했는지도 나는 몰랐다. 아파하고 고민하는 일에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줬어야 했다는 것도 나는 몰랐다. 그저 엄마로서 아주 열심히 살았고 내가 자라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물질적으로 넉넉해서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뭐든 도와줄 수 있다는 것으로 엄마 역할을 다했다고 큰소리치던 못난 엄마였다.

아이들이 아프면서 난 참 많은 것을 깨달았고 선생님이 아닌 엄마가 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동안 서툰 부모 밑에서 우리 아이들이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제라도 꼭 필요한 부모 노릇이 무엇인지 더 늦지 않게 깨닫게 돼 고마울 뿐이다.

*「내 인생 후회되는 한 가지」(김정운 외, 위즈덤경향)에서 발췌·정리했습니다.

■기획 / 장회정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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