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의 메시지 “한국에선 살 길이 없다”
지난 1월 6일 조성민이 서울 도곡동 여자친구 P씨의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에 따르면 조성민은 죽기 전날 밤 P씨와 함께 술을 마셨고 이 자리에서 그는 P씨에게 이별을 통보받았다. 그리고 그녀가 외출한 사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성민 세상과 작별하던 날
1월 8일 서울 안암동 고려대학교 병원 장례식장에서 지인들의 애통함 속에 고인의 발인식이 치러졌다. 야구선수 동료들과 고려대학교 동문들이 앞장섰으며 전처 최진실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 최환희·준희 남매, 휠체어를 탄 고인의 아버지를 포함한 30여 명의 지인들이 함께했다. 고인은 화장 절차를 거쳐 경기도 분당의 추모공원에서 영면에 들었다.
“아이고 성민아, 성민아. 이제 가면 언제 오니…. 억울하다, 억울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됐니. 이렇게 떠나면 어떻게 하니.”
고인의 어머니는 화장이 끝날 무렵 끝내 오열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반면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환희·준희 남매는 추운 날씨 속에서도 비교적 담담한 표정으로 의젓하게 상주 노릇을 했는데, 이미 두 번의 이별을 경험한 아이들은 마치 슬픔에 무뎌지기라도 한 듯 잔잔한 미소로 사촌들과 어울리고 어색할 때마다 외할머니 곁으로 다가가 이야기를 하는 등 또래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여 주변의 안타까움을 샀다.
故 최진실 어머니 정옥숙씨 인터뷰 “편하게 뒤돌아보지 말고 가”
자식을 잃은 슬픔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앞서 딸과 아들을 차례로 떠나보낸 고 최진실의 어머니 정옥숙씨도 이날 장례식장을 찾았다. 금이야 옥이야 키웠던 남매가 갑작스럽게 떠난 뒤 지울 수 없는 상처에 고인에 대한 원망을 숨기지 못한 적도 있었지만 최근 정씨는 남겨진 손주들을 생각하며 이해와 용서로 그에게 마음을 열었다. 착잡한 마음을 뒤로한 채 그녀는 “편하게 뒤돌아보지 말고 가”라며 옛 사위에게 눈물로 작별 인사를 했다.

지인들의 애통함 속에 고인의 영정과 운구행렬이 빈소를 떠나고 있다.
네, 죄송합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장례를 지켜보던 그녀는 기자의 질문에 말을 아꼈다. 정씨 일행은 “고인의 집에서 봤을 땐 우리도 손님이 아니겠는가. 그냥 추모할 수 있도록 배려해달라”라고 거듭 부탁했다.
장례 절차가 모두 끝났을 무렵 정씨와 다시 마주하게 됐다. 잠깐이었지만 그녀는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자신의 아픈 속내를 털어놓으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처음 소식 듣고 많이 놀라셨죠.
전화 통화를 하면서 알게 됐는데 기절할 뻔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애들 아빠지 않습니까.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인을 보신 게 언제였나요?
얼굴을 본 건…. 통화를 했었어요. 크리스마스 때 (아이들에게) 뭘 갖고 싶냐고 전화가 왔었거든요. 결국 시간이 없어 못 만나긴 했지만.
준희가 점점 더 아빠를 닮아가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딸이라 그런지 환희보다 준희가 더 아빠랑 자주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았던 것 같아요. 다정다감한 면도 닮았고.
아이들도 많이 힘들어하죠?
이번 일이 너무 갑작스럽게 터져서 어른들이나 애들이나 모두 제정신이 아니에요. 어제도 (장례식장을 다녀온) 환희가 갑자기 막 울더라고요. 아빠한테 그동안 못해줘서 미안하다면서. 아빠가 불쌍하다면서.
건강 꼭 챙기세요.
네, 이젠 우리 늙은 사람만 남았네요.
고인의 마지막 편지
“불쌍한 우리 아기들, 모자란 부모 용서하지 마라”
발인 후 일주일이 지난 1월 14일 고인의 유서가 발견됐다. 조성민의 전 에이전트인 손덕기씨가 고인의 짐을 정리하던 중 배낭 속에서 유서가 적힌 수첩을 찾아냈는데 그동안의 생활이나 자기 처지를 비관하며 죽음을 예고하는 듯한 내용이 쓰여 있던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10월 환희·준희 남매의 운동회에 참석했던 그는 “아이들이 연기자와 가수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가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이 과연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노래나 연기 트레이닝을 받는 등 아이들의 꿈을 실현시켜주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 있어야 할 것 같다”라며 자녀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유서에도 두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이 적혀 있었다. 다음은 고인의 유서 전문.

지난 해 10월 환희·준희 남매의 운동회에 참석한 조성민.
못난 자식이 그동안 가슴에 못을 박아드렸는데
이렇게 또다시 지워질 수 없는 상처를 드리고 떠나가게 된 불효자를 용서하세요.
이젠 정말 사람답게 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아쉬움도 가져갑니다.
이 못난 아들, 세상을 더는 살아갈 자신도 용기도 없어 이만 삶을 놓으려고 합니다.
행복한 날들, 가슴 뿌듯했던 날들도 많았지만 더 이상은 버티기가 힘이 드네요.
사랑하는 부모님, 그리고 우리 OO이,
제가 이렇게 가게 된 것에 대한 상처는 지우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우리 아들 딸 환희 준희야,
너희에게 더할 나위 없는 상처를 아빠마저 주고 가는구나. 불쌍한 우리 아기들….
이 모자란 부모를 용서하지 마라.
법적 분쟁을 막기 위해 저의 재산은 누나 조성미에게 전부 남깁니다.
故 조성민 아버지 조주형씨 인터뷰
“참 좋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의 비보가 전해진 날, 고인의 아버지 조주형씨는 허리 디스크로 고려대학교 구로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이후 그는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으로 이동해 장례식내내 아들의 곁을 지켰다.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지만 몸보다 아픈 건 마음인 듯 보였다.

“성민아, 성민아. 이제 가면 언제 오니…. 고인의 어머니는 화장이 끝날 무렵 끝내 오열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유서가 발견된 이튿날, 기자는 조주형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여전히 입원해 있다는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아들은, 참 좋은 아들이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악몽 같은 일.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보다 각별했던 아들이었기에 조씨는 고인을 떠올리는 말 한마디, 단어 하나를 전하면서도 힘들어했다. 그리고 조심스러워 했다.
“미안합니다. 지금은 드릴 말씀이 없네요.”
빈소를 떠나 화장장에서도, 추모공원에서도 내내 “억울하다”라며 울부짖던 고인의 어머니도 마찬가지. 지인들에 따르면 고인의 어머니는 여전히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채 아들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했다.
“이제 와서 뭐, 그런 (억울한) 것은 없습니다. 자식을 잃고 눈물 흘리지 않는, 울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2000년 최고의 톱스타였던 최진실과 결혼식 당시. 한화 이글스 시절 조성민 선수의 밝은 모습.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비운의 스타
새드 엔딩으로 인생 막 내려
1991년 조성민은 황금사자기와 봉황대기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전국구 스타 대열에 합류했다.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에는 박찬호, 임선동과 함께 최고 투수로 꼽히며 ‘황금 92학번’의 주역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일본 명문 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 후 1998년 올스타에 선정되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2000년 그는 당대 최고의 톱스타였던 최진실과 동화 같은 러브 스토리를 보여주며 결혼에 골인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4년 8월 가정 불화가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급기야 두 사람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게 됐다. 슬하에 환희와 준희 남매를 둔 상황이었다. 이혼 후 조성민은 한화 이글스로 복귀했다. 그러나 이미 부상으로 인해 선수생활을 접었던 그는 성적이 부진했고 2007년을 마지막으로 선수 유니폼을 벗었다.
이후 프로야구 해설가로 데뷔해 빼어난 말솜씨와 해박한 야구 지식을 겸비한 해설가로 야구 마니아의 사랑을 받는가 싶었는데, 드라마 ‘장밋빛 인생’과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을 통해 재기에 성공했던 고 최진실이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2008년 세상을 떠났고 누나가 떠난 지 1년 5개월 만에 동생 최진영까지 유명을 달리하면서 또 한 번의 시련을 겪게 됐다.
사업가로 변신해 제2의 인생을 살던 그는 2011년 두산의 2군 재활코치를 맡으며 컴백했지만 지난해 말 재계약에는 사인을 하지 않았다.
한편 2005년 조성민은 심 모씨와 비밀리에 재혼했다. 따로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으나 혼인신고를 통해 법적 부부가 됐다. 하지만 2010년부터 별거에 들어갔다고 알려졌던 두 사람은 지난해 조성민이 심씨가 대표이사로 있는 회사의 사내이사로 등재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다시금 화제가 되기도 했다.
■글 / 김지윤 기자 ■사진 / 안진형(프리랜서),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