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어도 없는 사람’ 고 과장, 내 인생과 많이 닮았어요
4월 30일 방영된 드라마 ‘직장의 신’ 10회의 부제는 ‘고 과장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였다. 김기천이 맡은 고정도 과장의 사연이 주축이 돼 이야기가 전개된 것. 전날 방송에서 각 부서별 인원 감축이 예고된 가운데 마케팅영업지원부의 ‘만년 과장’ 고정도 과장이 권고사직자 명단에 올랐다. 황갑득(김응수 분) 부장의 입사 동기로, 28년 동안 근무했지만 아직도 여전히 과장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 과장은 시대에 뒤떨어진 무능력한 인물이다. 최첨단으로 디지털화된 현대의 조직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고 과장은 매일 사무실 한쪽에서 잠을 자거나 신문을 읽고, 주전부리나 즐기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 심지어는 근무시간 중에 밖에 나가 낮술까지 마신다. 근무시간 중 단 1분도 허투루 쓰지 않고 수많은 업무를 척척 해치우는 미스 김(김혜수 분)에게는 아무리 봐도 ‘능력 없는 짐짝’이며 ‘고장 난 시계’ 같은 존재인 셈이다.
하지만 ‘고장 난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 회사의 사활이 걸린 중대한 프로젝트 성사를 앞두고 갑작스레 일어난 정전 상황에서 아무도 해내지 못한 수기 계약서를 고 과장이 능숙하게 작성해낸 것. 연륜에서 발휘된 고 과장의 활약 덕분에 회사는 큰 성과를 거뒀고, 고 과장은 후배와 동료들의 지지에 힘입어 계속해서 일할 수 있게 됐다.
승진은 계속해서 남의 일이고, 승승장구하는 입사 동기에게 늘 허리를 굽혀야 하며,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는 젊은 후배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지만, 자식 등록금 때문에 어떻게든 회사에 남아 있고자 애를 쓰는 고정도 과장의 모습은 마치 우리네 아버지를 보는 것만 같아 시청자들을 울컥하게 했다.
“대본을 처음 읽었을 때부터 남다른 느낌이 들었어요. 제가 실제로 직장생활을 해본 적은 없지만 읽는 내내 ‘이건 딱 내 이야기다’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회사라는 조직에 속해 있지 않다뿐이지 이 시대 가장들의 처지는 대부분 비슷하잖아요. 제 친구들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그래서인지 훨씬 쉽게 감정이입이 됐어요. 눈물 흘리는 장면이 아닌데도 리허설 때부터 감독님이 ‘컷’ 하고 돌아서면 저 혼자 서서 눈물을 쏟았으니까요. 촬영 준비 중에도 괜히 울컥해져서 몰래 먼 데 바라보는 척하며 수습하고 그랬어요.”
주인공의 기분이란 게 바로 이런 거로군요
정작 본인은 감정에 젖어 스스로를 추스르느라 힘들었다고 고백하지만, 이날 김기천은 과장됨 없이 담담하면서도 섬세한 연기로 고 과장의 심정을 절절하게 그려내 보는 이들의 가슴을 더욱 먹먹하게 만들었다. 아끼는 후배 무정한(이희준 분) 팀장의 권고사직 통보에 고개를 떨구며 마시던 소주잔을 내려놓을 때나 늘 식사를 하던 백반집에서 친구 같은 주인과 퇴직 ‘축하’ 인사를 나누던 장면은 아마도 많은 이들의 심장을 울렸을 것. 특히 자신을 도와준 ‘첨단 시계’ 미스 김에게 “시계는 작은 바늘도, 큰 바늘도 다 같이 가야 제대로 갈 수 있는 거지. 다 같이 가니까 나 같은 고물도 돌아가는 거야”라는 조언과 함께 “그런데 혼자서 그 바늘을 다 돌리려고 하니 힘들고 외롭지”라고 보듬는 모습에서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전하는 위로를 느낄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방송 날이 노동절 전날이라 더욱 반향이 컸나 봐요. 요즘 직장인들이 정리해고나 구조조정 칼바람 속에서 위태롭게 살아가고 있잖아요.
고 과장이 회사에 젊음과 평생을 바치며 겪었을 고난과 비애를, 실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거죠. 제 주변 분들도 폭발적인 반응을 보내주더라고요. 방송하던 날, 저는 촬영 시작을 기다리며 여의도 근처에 차를 세워놓고 혼자 DMB로 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날 제 휴대전화가 그야말로 불이 났어요. 잘 봤다고, 공감한다고, 좋은 연기였다고…. (김)혜수가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제 이름이 오른 걸 갈무리해서 보내주기도 했고요. 그런 반응을 받아본 게 처음이라 솔직히 많이 놀랍기도 했고 무척 기쁘기도 했어요. 고 과장뿐만 아니라 배우 김기천에게도 정말로 특별한 하루였지요.”
처음으로 브라운관의 주인공이 되었던, 또 수많은 이들의 관심과 지지를 받았던 그 순간은 아마 김기천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소중하게 남을 것이다. 단순히 화제의 인물이 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확신도 없이 스스로를 다잡으며 한길을 걸어온 지난날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어렴풋이나마 확인할 수 있어서였다. 마치 평생을 근무해온 직장에서 ‘당신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은 듯한 느낌이 아닐지.
“사실 제 스토리로 극을 끌어가는 내용이라서 촬영 내내 부담감이 컸어요. 괜히 연기 못한다고 욕먹으면 어쩌나, 시청률이 떨어져서 동료들 보기 민망해지면 어쩌나, 온갖 걱정을 다 했죠. 그런데 참 많은 분들이 같이 울어주셔서 감사했어요. 촬영 끝나고 축하 전화와 문자 메시지가 온 걸 보면서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생각하고 아껴주는 사람들이 아직도 이렇게나 많다는 데 큰 위안을 받았고요. 뿌듯한 마음만큼, 앞으로 더 바르게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했어요.”
고정도 과장을 만난 건 제 인생 커다란 행운이었어요
본인 스스로 ‘나는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밖에서나 있어도 없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듯 큰 존재감이 없던 인물인 고 과장이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게 된 이후로 배우 김기천의 생활 또한 조금은 달라졌다. 20년이 훌쩍 넘는 배우 생활을 이어오면서 수십 차례 무대에 섰고 수십 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크게 이름을 알리지는 못했다. 쉼 없이 꾸준히 활동을 했어도 주로 나왔다 금방 사라지는 조역을 맡았던 터라 연기 자체에 대한 목마름도 여전하다. 하지만 올해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7번방의 선물’과 드라마 ‘직장의 신’을 통해 드디어 ‘김기천’이라는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요즘은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먼저 알아보고 다가와 사인을 부탁하거나 사진을 찍자고 요청할 정도다.
“그동안은 드라마 때문에 집과 촬영장만 왔다 갔다 하느라 몰랐지만, 요 며칠 몇 번 실감할 기회가 있었어요. 얼마 전엔 오랜만에 아내와 근처 마트에 갔더니 몇몇 분들이 알아보시고 말을 걸더라고요. 그동안 숱하게 다니던 마트였는데,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거든요. 괜히 좀 으쓱해져서 아내한테 ‘다른 연예인들처럼 모자도 쓰고 좀 가리고 다닐까봐. 모자 사러 가자’라고 농담을 건넸죠. 그리고 진짜 모자 파는 데 가서 상표가 그대로 붙은 모자를 쓰고 근처를 막 다녔어요. 이때 아니면 제가 언제 한번 그래보겠나 싶어서 ‘연예인 놀이’도 하고 장난을 좀 쳐봤죠(웃음).”
오랜만에 받아본 관심과 유명세가 신기하고 즐겁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색하고 쑥스럽기도 하다. 좋은데도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뭔가 얼떨떨하고 복잡 미묘한 마음이랄까. 다만, 지금의 부푼 관심들 또한 곧 사그라질 것을 알기에 지나치게 들뜨거나 취해 있지 않으려 한다. 그저 지금의 행운이 이어져 쭉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길 바라는 정도다.
“확실히 TV의 힘이 크네요. 단막극을 제외하고 드라마 출연은 ‘직장의 신’이 처음이었는데, 연극이나 영화에 비해 대중적인 파급력이 큰 것 같아요. 사실 ‘직장의 신’의 고 과장 역할은 어느 누가 맡았어도 관심과 사랑을 받았을 인물이에요. 제가 그 기회를 누린 걸 감사하게 생각해요.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금방 또 잊히겠지만 그걸로 실망하거나 좌절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원래 인생이란 게 밝고 어두움이 공존하는 것이고, 잘 풀리는 날이 있으면 또 우울한 날이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지금 좋다고 해서 크게 기뻐하지도 않고, 힘들다고 해서 속상해하지도 않으려 해요.”
드라마 방영 초반만 해도 주변 친구들은 물론 가족까지도 방송을 보면서 “매일 촬영한다고 나가서는 대체 어디서 뭐 하고 오는 거야?”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어오기도 했다. 한 회가 끝날 때까지 대사는커녕 얼굴 한번 제대로 잡히지 않고 사무실 배경처럼 나올 때도 많았기 때문. 하지만 카메라의 중심에서 비껴나 있는 사람들도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각각의 고유한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고 있다는 걸 아는 그는 맡은 인물 하나하나, 애정과 진심을 가득 담아 성실하게 표현해내고자 한다.
“배우로서 좋은 역할, 비중 있는 역할을 맡고 싶은 마음은 분명히 있죠. 어느 배우든 다 똑같지 않을까요. 저도 특히 연극할 때는 다른 친구나 후배들은 폼도 나고, 분량도 많은 역할을 맡는 데 비해 저는 매번 대사 한 줄 변변치 않은 역할 제안만 들어와서 힘들었던 적이 많아요. 자존심도 상하고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런 마음을 계속 갖고 있으면 배우생활을 오래 할 수 없겠더라고요. 저는 오래오래 연기하고 싶거든요. 그리고 실제 우리의 인생에서 주인공이란 결국 드라마 속 행인이나 뒷모습만 나오는 사람들이 아니겠어요? 그 모두에게 초점이 맞지 않았을 뿐, 저마다의 삶 자체는 무척이나 드라마틱하고 다양한 결들로 채워져 있을 거예요. 저는 그런 마음으로 늘 그때그때 주어진 인물, 맡은 작품이 제 배우 인생 최고의 인물이자 작품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드라마를 보는 동안만큼은 세상 사람들이
편안하고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워낙 큰 생각 없이, 아무런 준비 없이 뛰어들었던 터라 부족한 점이 참 많았어요. 제가 저를 받아들이기 힘들 만큼요. 제 스스로 배우라는 단어를 쓰게 된 것도 한 10여 년 전 부터예요. 결국 연기는 누가 먼저 그리고 많이 깨닫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에서 비롯돼요. 타고난 재능이나 특별한 학습만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거죠. 감독님이나 선배들이 아무리 말해줘도 안 되다가 어느 순간 ‘확’ 올 때가 있거든요. 그 깨달음의 순간을 믿고 꾸준히 버텨야 하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젊은 시절에 좀 더 열심히 했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잘 걸어왔고 또 앞으로 나아갈 거라는 데 의미를 두려고 해요.”
작은 체구와 평범한 외모 탓인지 김기천은 그동안 대부분 수다스럽고 코믹하거나 능력 없고 지질한 인물들을 연기해왔다. 그 또한 무척 즐거운 일이었으나 이제 다음번에는 좀 더 자신과 닮은 인물을 만나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진지하고 심오하고, 점잖은 그런 중년 말이다.
“고뇌에 가득 찬 우수 어린 남자는 어떤지요?(웃음). 반은 농담이고요. 당분간은 여러 작품을 만나 좀 더 활발하게 활동하고 싶어요. 저는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연기 욕심이 생기는 것 같아요. 지금부터라도 분발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뭔가 와 닿는 멋진 연기를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현재 논의가 오가는 작품이 몇 개 있고, 단역으로 짧게 출연할 영화 몇 편도 작업을 기다리고 있다. 배우 하정우가 감독으로 나선 영화 ‘롤러코스터’는 촬영을 모두 끝마친 상태. 여비서까지 대동한 ‘폼 나는’ 회장님 역할로 배역 자체만으로도 나름의 연기 변신을 시도한 셈이다.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때, 제 몸짓 하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반응한다는 사실에 매혹됐어요. 그리고 점차 이왕이면 세상이 좀 더 예쁘고 착해졌으면 좋겠는데, 연기로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어봐야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죠. 연극이나 영화, 드라마를 통해서 사람들이 좀 더 편안한 마음을 갖고 아름다운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작품을 보는 동안만큼이라도 기쁘고 행복할 수 있도록, 그런 여유로움을 선물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배우 김기천이 전하는 ‘직장의 신’ 촬영 현장 뒷모습& 후배들에게 전하는 애정 어린 메시지 |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김영길 ■사진 제공 / 김기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