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와 개인 사이, 간극을 지우고 김혜은의 이중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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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우리는 극중 인물과 그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를 동일시할 때가 있다. 외모의 어떤 특성만으로,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몇 가지 단서만으로 우리는 쉽게 그 배우를 규정하고 믿어버린다. 그 무모한 확신은 그만큼 배우가 맡은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는 말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저 그렇게 스타를 소비해버리고픈 대중의 욕구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배우들은 그 게으른 믿음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며 한발 더 성큼 나아가는 대범함과 진정성을 드러나기도 한다. 배우와 개인 사이, 그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솔직하고 멋진 연기자가 되고 싶은 김혜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본다.

배우와 개인 사이, 간극을 지우고 김혜은의 이중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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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캐릭터가 살아 있는 드라마, ‘오로라 공주’의 김혜은
요즘 저는 MBC-TV 일일드라마 ‘오로라 공주’에서 남자 주인공 황마마의 셋째 누나 황자몽 역을 맡아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내놓는 작품마다 화제를 모으며 시청자들을 사로잡는 임성한 작가님이 2년 만에 선보이는 드라마예요. 이번 작품 또한 첫 방송부터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며 꾸준히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지요. 임 작가님의 작품은 ‘임성한표 드라마’라는 하나의 장르로 인식될 정도로 독특하고 특별하잖아요. 방송 전부터 여러모로 크게 주목받았던 만큼, 출연 배우들도 많이 긴장하고 기대했던 작품이에요.

사실, 이 드라마가 방영되기까지 굴곡이 많았던 터라 저도 제작발표회나 다른 인터뷰 때는 말을 아꼈어요. 당초 임 작가님이 남편인 고 손문권 PD님과 함께 준비하던 작품이었고, 언니들(김보연·박해미 분)과 저는 그때 이미 캐스팅이 됐었거든요. 그렇게 촬영을 기다리고 있던 차에 갑작스럽게 감독님께서 유명을 달리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무척이나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죠. 그리고 이 작품도 그냥 묻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다시 방영 논의가 된다고 하고, 또 작가님께서 처음 이야기가 오갔던 배우들이 같이해주면 큰 위로가 될 거라고 하셨단 말씀을 전해 듣고는 ‘무조건 해야겠다. 그것도 최선을 다해서!’ 라고 생각했어요. 큰 아픔 끝에 선보이게 된 만큼 더욱 훌륭한 작품이 될 거라는 기대와 확신이 들더군요.

배우와 개인 사이, 간극을 지우고 김혜은의 이중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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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라 공주’를 비롯한 임 작가님 드라마의 가장 큰 장점은 모든 캐릭터가 살아 있다는 거예요. 세대를 뛰어넘어 사랑받는 고전 명작을 떠올려보면 좋은 이야기가 갖춰야 할 덕목이 뭔지 알 수 있어요. 바로 주인공뿐 아니라 등장하는 인물 한 명 한 명이 살아 숨 쉬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우리 드라마 속 인물들은 명작에 버금갈 만큼 각자 매력적인 스토리를 품고 있어요. 제가 연기하는 ‘황자몽’ 또한 주인공을 보조하기보다는 독자적으로 생명력을 가진 인물이에요. 조연이지만 그 나름의 삶에서는 주인공인 셈이죠. 단역 하나에도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작가님의 필력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에요.

임성한 작가님은 제 인생에 커다란 터닝 포인트를 갖게 해준 분이예요. 제가 배우로 정식 데뷔한 작품이 바로 임 작가님의 ‘아현동 마님’이거든요. 기상캐스터 활동 중에 잠깐 드라마에 출연한 적은 있지만, 새롭게 연기자의 길을 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오디션을 본 후 처음으로 작가님께 가능성을 인정받은 셈이죠. 그때는 그저 감사하기만 했고, 매번 대본을 외워서 분량을 소개하는 데만 급급했어요. 작품 속에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죠.

배우와 개인 사이, 간극을 지우고 김혜은의 이중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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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사람들이 ‘막장’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도 우리 드라마를 왜 좋아하는지를 생각해보곤 해요. 솔직히 저는 ‘막장 드라마’라는 단어 자체가 이제는 너무나 진부하고 촌스럽다고 생각해요. 사실 우리네 삶에는 막장의 요소가 다 있잖아요. 임성한 작가님은 용기 있게 그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고요. 대본을 찬찬히 읽어보면 ‘오로라 공주’는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파격적인 소재를 사용하는 비겁한 드라마가 아니라는 걸 알게 돼요. 현실 속 더럽고 추한 모습들, 누구도 선뜻 먼저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가감 없이 꺼내놓았을 뿐이죠. 감성적이고 따뜻하고 도덕적인 교훈이 있는 드라마가 있다면, 다른 종류의 작품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꾸준히 이야기를 따라가본 분들은 알 거예요. 파격적인 소재나 설정들이 저마다 외따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부딪히면서 점점 아파하고 극복하고 치유해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요. 지금 극중 오로라네 집처럼 폭삭 망하고 주저앉았지만,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보려는 사람들이 사랑을 통해 힘을 얻고 극복해나가는 이야기가 그려져요. 그렇기 때문에 혹시 아직도 편견을 갖고 있는 시청자들이 있다면 극이 전개될수록 차차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게 될 거라 믿어요.

아직은 위태로운 작품과 실제 넘나들기
배우로서 최대한 다양한 성격과 배경의 인물을 많이 만나보고 싶어요. 기상캐스터에서 배우로 전업한 뒤, 쉬지 않고 꾸준히 활동해왔는데 특히 지난해부터는 화제의 드라마와 영화에 잇달아 출연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어요.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나 주목을 받기도 했고요. 그중에서도 제게 가장 의미가 컸던, 아마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마음속에 있을 작품이 바로 영화 ‘범죄와의 전쟁’이에요. 단언하건대, ‘범죄와의 전쟁’ 이전의 김혜은과 이후의 김혜은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할 거예요. 그만큼 제 인생에 폭풍 같은 작품이었어요.

배우와 개인 사이, 간극을 지우고 김혜은의 이중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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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촬영하는 동안 무척이나 힘들었어요. 제가 아닌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사람이 돼야 했으니까요. 영화 속 ‘여사장’으로 변해가면서 제가 깨뜨려야 할 것이 많은, 내 안에 무너뜨려야 할 것이 가득한 배우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렇게 깨고 부수고 싸우다 보니 힘들고 혼란스러웠고,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감정에 휩싸이곤 했어요. 김혜은과 ‘여사장’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메워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입맛도 떨어지고 예민해져서 따로 체중 조절을 하지 않았는데도 몸무게가 4kg이나 줄었어요. 미치겠는 건, 촬영이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계속 나아지질 않는다는 거였죠. 제가 힘들어하는 걸 보고 최민식 선배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앓듯이 연기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몰입했기 때문이라고, 배우로서 겪어야 하는 경험이라고요. 오히려 그런 감정이 찾아온 걸 반갑게 여기라는 충고도 해주셨어요. 아마 앞으로 계속 연기를 해나가다보면 그런 자신을 마치 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떨어져서 볼 수 있게 된다고요. 그 말씀들이 제게 참 많은 위로가 됐어요. 진정한 배우로서 통과해내야 할 관문들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바라보고 준비하게 됐고요.

어쨌든 ‘범죄와의 전쟁’은 배우 김혜은에게 커다란 산이었고 바다 같은 작품이었어요. 그 지점을 통과하고 나니 많은 것들이 달라지더라고요. 다만 한동안은 지나치게 센 이미지로만 굳어지는 건 아닌지 걱정도 했어요. 감정의 진폭도 크고, 행동이나 말투도 강한 역할은 일단 에너지 소모부터 크거든요. 하지만 연기자로서는 센 역, 때로는 악한 역도 어울린다는 점 자체가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소화할 수 있는 연기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뜻이니까요. 앞으로 무식하고 천박한 역할도, 카리스마 넘치는 역할도, 우아하고 세련된 역할도, 지금 맡고 있는 황자몽처럼 귀여우면서도 도도한 역할 모두 자연스럽게 그려낼 수 있는 좋은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배우와 개인 사이, 간극을 지우고 김혜은의 이중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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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새 영화 촬영에 들어갔어요. 황정민·한혜진씨가 주연을 맡은 ‘남자가 사랑할 때’인데, 저는 이발소 여주인으로 나와요. 지금까지 주로 맡았던 역할과는 정반대인 지극히 평범하고 서민적인 아줌마예요. 딸과 남편을 끔찍하게 사랑하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매일 삶과 전쟁을 벌이면서도 행복해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여자요. 영화 내내 화장도 거의 안 한 얼굴로 나와요.

이런 모습을 연기하는 건 처음이라 색다르고 재미있고 그래요. 어설프게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실감 있게 표현해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어느 위치에 가져다놓아도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배우, 그게 제가 추구하는 목표예요.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 김혜은의 진심
드라마와 영화 촬영 때문에 1주일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쁘게 지내요. 가족과 느긋하게 시간을 보낸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요즘 개인적으로 새롭게 큰일을 하나 벌이면서 훨씬 더 바빠졌어요. 제 이름을 내걸고 가방 브랜드 ‘아트백(Arrt Bag)’을 론칭했거든요. 이제 판매를 위한 막바지 작업 중인데, 아마 7월 정도부터 만나보실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직접 디자인을 맡았고, 저와 가치관이나 사업관이 잘 맞는 분들을 만나 제작과 판매 일을 분담하게 됐어요. 내로라하는 명품백 못지않은 소재와 원단, 부자재 등을 사용했고 국내 최고의 기술을 보유한 명인들이 정성을 들여 만들었어요. 정말 세상 어떤 제품과 견주어봐도 품질이나 디자인 면에서 부족함이 없다고 자부해요. 처음 구상을 하고 준비를 시작한 게 2년 전이에요. 서둘러서 뚝딱 시스템을 만들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대충 내놓고 싶지는 않았어요. 제 자신부터 충분히 만족하면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고급스럽게 예쁘고, 실용적이면서도 우아한 제품이길 바랐거든요. 다행히 스스로도 만족스럽고, 주변 반응도 좋아 뿌듯해요. 고가의 명품백만 쓰던 동료 연기자들도 마음에 든다며 사용하고 있어요.

배우로서의 일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가방을 만들게 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어요. 솔직히 돈이 목적이었다면 아마 시작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사실 이 가방은 수익금의 일정 금액을 한국 청소년 쉼터협의회의 청소년 지원 사업에 사용하게 돼요. 제가 몇 년 전부터 그 단체의 홍보대사로 활동 중인데, 어른들의 잘못과 무관심으로 인해 상처받고 좌절하는 청소년들이 무척이나 많다는 데 대해 깊은 미안함과 죄책감을 갖고 있어요. 우리의 미래인 이 아이들을 격려하고 응원해주고 북돋워줘야 하잖아요.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제가 조금이나마 보태고 싶어 시작한 일이에요. 그러니 여러분께서 많이 관심 갖고 도와주셨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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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브랜드 론칭을 준비하면서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할까’ 하는 후회도 종종 했어요. 개인적으로 딱히 얻는 것도 없는데 말이죠. 그런데 제가 늘 머릿속에,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질문이 있어요. ‘나는 왜 사람들 앞에 서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까’ 하는 거요. 항상 그 질문을 떠올리고 스스로에게 물어요. 그런 과정이 없다면 이 직업만큼 허무하고 힘든 일도 없을 거예요. 카메라 불이 꺼지고 난 뒤, 무대 뒤에서 겪는 감정. 그 헛헛하고 고독한 감정을 달래고, 다시 일상과 세상에 대한 감사함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생각해야만 해요. 한편으로는 세상에서 저의 역할, 사람들 사이에서 저의 역할을 확인해가면서요.

저는 제 이름 석 자를 더 유명하게 알리고 싶다거나 A급 대우를 받는 배우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다만, 사람들 앞에 서게 된 이상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의 어떤 행동으로 인해 그리고 저의 존재로 인해 누군가는 받게 될 에너지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었으면 좋겠고, 그로 인해 한 사람의 인생이, 또 이 세상이 좋은 쪽으로 변화하고 행복해졌으면 해요. 그렇게만 된다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즐겁고 뿌듯하겠지요. 가방을 만드는 것도 그런 의도에서 시작한 일이에요. 제가 존경하는 박영규 선배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네가 어떻게 사느냐가 너의 연기고, 무대다”라고요. 그만큼 억지로 꾸며내고 거짓을 입힌 연기가 아닌 스스로의 올바른 삶을 통해 진실하게 다가가야 한다는 뜻이겠죠. 제 연기가, 제 무대가 거짓으로 표현되지 않기 위해 성실하고 선하게 삶을 꾸려가야 하고요. 쉽진 않겠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진심으로 살아가고 싶어요.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원상희 ■의상 협찬 / 드비숑(www.debichon.co.kr) ■소품 협찬 / 아트백 ■헤어&메이크업 / 스타일플로어(02-518-9270) ■스타일리스트 / 김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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