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무대로 돌아온 명배우, 명계남 ‘배우는 배우다’

연극무대로 돌아온 명배우, 명계남 ‘배우는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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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중한 연기력으로 그리고 마침 성이 명씨여서, 언제나 ‘명배우’로 불리는 명계남이 데뷔 40주년을 맞아 연극 인생 2막을 예고하며 무대로 돌아왔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자 단골 복귀작인 모노드라마 ‘콘트라베이스’를 통해서다. 언제나 연기와 함께 살아왔고 또 자신을 이루는 본질이 배우라 믿어왔던 그가 꽤 오랜 시간 이곳을 떠나 있으면서 쌓였던 목마름을 시원하게 해갈할 수 있는 무대인 셈이다. 이제 우리는 또 한 명의 진짜 배우가 들려주는 진정성 넘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연극무대로 돌아온 명배우, 명계남 ‘배우는 배우다’

연극무대로 돌아온 명배우, 명계남 ‘배우는 배우다’

명계남을 지우고 무대 위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로
막이 오르면 무대 위 한 남자가 자신의 몸집만 한 악기를 연주한다. 오케스트라 가장 구석에 자리한 거대한 악기, 그렇지만 그 위용에 비해 스포트라이트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는 소외된 악기인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남자다. 음악이 끝날 때까지 두 손의 굳은살이 찢겨 피가 흐를 만큼 현을 뜯어보지만, 자신만을 위한 뜨거운 박수갈채 한 번 쏟아지는 일이 없다. 그래도 남자는 줄기차게 말한다. 콘트라베이스가 얼마나 중요한 악기인지, 그 악기가 내는 소리가 얼마나 세상의 근원에 가까운지를. 그렇게 자긍심에 가득 차 있던 주인공은 언젠가부터 감정에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다. 바그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부터 그리고 온 마음과 열정을 다해 사랑하는 메조소프라노 가수 ‘사라’를 깊이 생각하면서부터다. 철저한 계급 조직으로 이뤄진 오케스트라 구조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릴 방법조차 찾지 못하던 남자는 이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을 생각해내고, 마침내 걸음을 내딛는다. 가장 크지만 가장 낮은 소리를 내는, 큰 울림을 간직하고 있지만 줄곧 소외돼온, 누군가의 인생을 닮은 콘트라베이스와 그 연주자의 모습이 관객들의 마음속 감정의 현을 떨리게 한다.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주인공과 관객 사이에는 점차 묘한 공감대가 형성된다. 관객들은 주인공의 처지에 자신의 현실을 조금씩 투영해보게 되고, 어느새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고 만다. 이 절묘한 겹침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배우 명계남(62)의 힘이다. 오랜만에 연기활동을 재개한 명계남을 보기 위해 찾아온 관객들은 실상 명계남이 아닌 한 연주자와 나눈 대화를 간직한 채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무대 위에 서 있는 저는 명계남이 아닌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예요. 관객들이 제가 아닌 연주자와 만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연기하고 있어요. 배우가 인물 속으로 온전히 걸어들어가 관객과 만나는 것이 연극인데, 그런 점에서 ‘콘트라베이스’는 제가 진정성 있게 연극을 구현하는 데 매우 적합한 작품이라 생각해요.”

그와 ‘콘트라베이스’의 만남은 이번이 세 번째다. 1995년 한국 초연과 2006년 재공연을 했고, 이후 7년 만에 올리는 이번 무대는 연극명 앞에 ‘마지막’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자신에게는 배우로서 평생을 비춰 손꼽아볼 만큼 소중한 작품이지만, 앞으로는 다른 훌륭한 배우들도 이 좋은 작품과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먼저 다음 ‘콘트라베이스’와의 이별을 선언했다.

사실 명계남에게 연극 ‘콘트라베이스’는 무척 특별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내면에서 꿈틀대는 엄청난 에너지 때문에 연기생활을 하면서도 자주 ‘외도’를 하곤 했는데, 언제나 그 ‘외도’ 끝에는 꼭 연극 무대를, 그것도 이 작품을 선택해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오곤 했다. 1980년대까지 연극배우 겸 제작자로 활발히 활동하다가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이벤트 기획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전업했던 그가 1995년 10여 년 만에 대학로에 올린 무대가 ‘콘트라베이스’였고, 한창 사회활동을 하다가 본업으로 복귀를 꾀했던 2006년에도 그랬다. 완전한 귀환을 선언한 이번에도 그의 첫 선택은 역시 ‘콘트라베이스’다.

“작품 자체가 갖고 있는 메시지가 워낙 뛰어나고 훌륭해요. 매번 연기할 때마다 느끼는 건데 작가의 세계가 참 오묘하고 깊다는 생각을 해요. 만날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좋은 작품이에요. 다만, 혼자서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극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려움이 크죠. 제겐 하나의 도전이자 의미 있는 시도예요. 두렵지만 한편으로는 성취해냈을 때 그만큼 쾌감이 크기 때문에 새롭게 출발할 때마다 첫 선택이 됐던 것 같아요.”

「향수」, 「좀머씨 이야기」 등으로 잘 알려진 독일 소설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1983년 작품 「콘트라베이스」는 발표 당시 ‘희곡이자 문학 작품으로서 우리 시대 최고’라는 극찬을 이끌어내며 널리 알려졌다. 한 예술가의 고뇌와 함께 평범한 소시민이 펼치는 존재를 위한 투쟁, 그리고 철저하게 계급화된 사회 속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된 채 살아가는 한 사람의 모습을 날카롭게 그려내며 현실을 대변한다. 사회 구성원 중 막중한 비중을 차지하면서도 목소리 한 번 크게 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우리의 삶을 콘트라베이스의 낮은 울림에 빗대 풍자하는 것이다.

“오케스트라에서 콘트라베이스와 연주자는 크게 주목받는 위치가 아니죠. 음악 전문가든 아니든 곡을 들을 때는 지휘자나 독주자에 집중하거나 곡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제1 바이올린 연주자를 눈여겨보잖아요. 하지만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는 오케스트라 안에서 묻혀 있는 듯해도 꼭 필요한 존재이고 소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우리가 사는 세상 그리고 우리 모두의 삶도 이와 같아요. 9시 뉴스 혹은 신문에 나오거나 늘 세간에 회자되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이끌어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주목받지 못하는 평범한 개인들이 이 사회를 받치고 있죠. 그런 사람들의 항변과 낮지만 깊은 울림이 담겨 있는 연극이에요.”

1995년, 2006년 공연 당시의 포스터. 그리고 2013년 다시 무대에 오르는 ‘콘트라베이스’.

1995년, 2006년 공연 당시의 포스터. 그리고 2013년 다시 무대에 오르는 ‘콘트라베이스’.

간절히 그리워했던 연극 무대
지난 6월 14일 처음 막을 올린 이후 공연이 없는 월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무대에 서고 있는 명계남은 개인적인 모든 일상을 접어두고 오로지 작품에 집중하고 있다. 상대 배우도, 조력자도 없이 혼자서 오롯이 무대를 책임져야 하는 만큼 연습 과정에서부터 외롭고 치열한 분투를 이어나가는 중이다.

“연습실에서도 무대에서도 굉장한 고립감을 느껴요. 하나의 작품에 빠져서 그 인물과 일치할 때까지 맞붙어 도전하고, 그 인물이 돼 다시 관객과 만난다는 과정이 어렵기도 하고요. 물론 그만큼 즐거움도 커요. 아직은 공연 초반이라 크게 문제가 되진 않지만 후반부로 가면 체력이 받쳐줄지가 관건이죠. 주변 사람들은 걱정을 많이 하던데, 그래도 제가 골골대는 편은 아니라 스스로를 믿고 해보려고요.”

한때는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던 곳이지만, 한동안 무대에 서지 못했기에 이렇게 매일 대학로를 걷는 것도 실로 오랜만의 일이다. 작년 봄, 경상남도 김해 봉하마을로 거처를 옮긴 그는 요즘 잠시 ‘가출’ 상태로 서울에서 지내고 있다. 예전에 비해 여러모로 크게 달라진 대학로 풍경에 세월을 실감하기도 한다.

“김해로 이사 가기 전까지는 강원도 홍천에 살았으니, 서울을 떠난 지 꽤 오래된 편이에요. 며칠 지내다 보니 엄청나게 복잡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대학로는 확실히 젊음이 느껴지네요. 활기차고 생동감도 넘치고요. 제가 한창 활동하던 때에 비해 극장도 늘어났고, 무대에 오르는 작품도 다양하면서도 많아졌어요. 그런데 후배들을 만나보면 배우들의 생활은 크게 좋아지진 않았더라고요. 1980, 90년대와 비교해보면 분명 외적인 팽창은 이루어졌는데 그 안의 사람들은 여전히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어요. 안타까운 부분이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연극을 접하고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 데 대한 반가움과 안도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특정한 장르로의 쏠림 현상이나 지나치게 가벼운 것만 좇는 분위기가 걱정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전체적으로 공연예술을 향유하는 관객이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볼거리 위주의 통통 튀는 작품들에나 해당하는 이야기고, 좀 더 본질적이고 현실적인 연극 무대에는 아직도 관객들의 발길이 뜸한 편이다.

“어느 쪽이 더 잘돼야 한다는 정답은 없어요. 개인의 관심사와 취향이 모두 다르듯, 다양한 메시지와 성격의 무대가 많아질수록 좋은 거죠. 하지만 너무 쉽고 재미있는 것에만 치중돼 있다는 점이 아쉬워요. 저는 관객들이 맨 처음에 어떤 공연예술을 접하느냐에 따라 향후 그 사람이 즐기는 문화의 수용 태도가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따라서 특히 젊은 분들이 저희 ‘콘트라베이스’ 같은 작품을 많이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처음에는 어렵게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막상 접해보면 결국 자신의 이야기, 우리가 사는 모습을 그린 이야기가 주는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명계남은 앞으로 좀 더 많은 이들이 진정한 연극의 묘미를 느끼고 빠져들 수 있도록 좋은 작품을 만들고 알리는 데 온 힘을 쏟아 부을 예정이다. ‘콘트라베이스’를 시작으로, 그동안 계속 그리워했던 연극 무대로 성공적인 복귀를 단행한 이상 앞으로는 지긋하게 이 자리를 지켜나갈 생각이다.

“사실 저는 늘 배우였고, 배우이고 싶었고, 이곳이 터전이었어요. 마땅한 기회를 얻지 못해 오래 쉬어서 그렇지 딱히 다를 건 없었거든요. 배우는 택시 운전사 같은 거예요. 누가 불러줘야 일할 수 있고, 태울 손님을 스스로 정하지 못하는 택시 운전사처럼 누군가 제게 어떤 역할을 맡겨줘야 하죠. 한동안은 제 의사와 관계없이 배우로서의 삶을 살 수가 없었어요. 아무도 써주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좀 더 적극적으로, 진지하게 제 자리를 찾아 나가보려 해요. 무대를 지키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각오도 단단히 다졌어요. 마치 새롭게 출발선에 선 듯한 기분이에요.”

연극무대로 돌아온 명배우, 명계남 ‘배우는 배우다’

연극무대로 돌아온 명배우, 명계남 ‘배우는 배우다’

열린 마음으로, 가슴이 시키는 대로
대학 재학 중이던 1973년, 연극 ‘동물원 이야기’로 연기를 시작했으니 어느덧 올해가 데뷔 40주년이 된다. 연희극예술연구회에서 활동할 때부터 일찌감치 ‘명배우’로 소문났던 그는 신촌무대, 극단76, 완자무니 등에서 활약하며 인정받았고 이후 제작과 기획자로도 이름을 날렸다. 40대에 접어들고 나서야 발을 들인 영화계에서는 짧은 시간 동안 수십 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맞춤 연기’를 선보였다. 당시 ‘한국 영화는 명계남이 나오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로 나뉜다’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쉬지 않고 내달렸던 그다. 또한 그의 활약은 작품 안에서만 머물지 않았다. 영화 제작과 배우 양성, 투자 사업 등에도 몰두했고 이후 연단의 사회자가 됐다가 ‘노사모’를 이끌었으며 왕성하게 정치활동에 전념하기도 했다.

“숫자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았는데, 주변의 이야기에 돌이켜보니 어느새 시간이 그렇게 흘렀더라고요. 이번 작품 연출을 맡은 김태수란 친구와 제가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데 생각해보면 40년이 넘는 세월을 연극계에서 함께 지내며 매 시기 나눈 이야기들이 별반 다르지 않더군요. 시간은 그렇게 흘러 있더라고요. 특별할 것 없이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 기뻤던 시간들, 겪었던 아픔들이 모두 녹아들어서요. 어차피 배우의 삶은 연기를 통해 어떤 식으로든 들키게 마련이니까 제 40년의 시간도 앞으로 연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표현되지 않을까 싶어요. 저도 제가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지 그리고 또 앞으로 살아가게 될지 무척 궁금해요.”

타고나기도, 그동안 살아오기도, 그리고 앞으로의 겪어낼 날들도, 자신은 언제나 ‘배우’임을 강조하지만 언젠가부터 뉴스 문화면보다는 정치·사회면에서 더 자주 만날 수 있었던 그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들도 많았고, 삐딱한 시선과 뒷말들로 인해 연기와 작품에 왜곡된 이미지가 덧씌워진 적도 있었다.

“1990년대 무대에 서던 자연인 명계남과 지금의 정치적 이미지를 갖고 있는 명계남은, 무대 위에 섰을 때만큼은 결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어떤 이들에게는 간극이 크고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지만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를 연기하는 제 모습을 보면서 뭔가 불편함을 느끼는 관객이 있다면 그건 제가 연기를 잘 못하는 탓이겠죠. 그런 결과를 얻지 않기 위해 더욱 진심을 담고 진정성 있게 도전하려 해요. 연극이라는 엄중함에 나를 던지는 거죠. 그렇다면 분명 관객을 끌어안고 인물에 빠져들 수 있게 될 거예요.”

어느덧 환갑을 넘긴 나이로 이제 막 연극 인생 2막을 올린 명계남은 앞으로 ‘사는 데 전념할’ 계획이라고 했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열린 마음으로 연기에 집중하면서, 하지만 세상과 사람에 대한 관심만큼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고서 말이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 나와 이웃이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의 시스템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하고 묻고 또 표현할 것이다.

“누구나 다 세상에 대해 표현하며 살고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만 제가 얼굴이 잘 알려진 사람이라 훨씬 크게 주목받았을 뿐이지요. 앞으로도 일부러 생각과 의견을 숨기거나 위축되진 않을 겁니다. 다만 이제 좀 다르게 살아볼 생각은 있어요. 좀 더 신중하게요. 그리고 제 직업이자 전부인 배우라는 입장을 기반으로 이야기하고 활동할 거예요. 제 신조인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자’를 계속해서 지켜나가면서요.”

올해 그는 두세 편의 연극을 더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9월에는 오태영 작가의 신작과 극단 차이무와의 ‘늘근도둑 이야기’로, 겨울에는 이윤택 연출가와 호흡을 맞추는 ‘파우스트’로 말이다. 평생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배우로 살아온 명계남이 그의 삶으로 선보이는 새로운 명작이 이제 막, 시작된 셈이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김영길 ■사진 제공 / 문화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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