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란 그런 것이다. 아직 무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여름의 끝자락, 끈적임도 아랑곳 않고 꼭 붙어 앉은 부녀는 쉴 새 없이 달콤한 이야기를 속삭였고, 또 연신 서로를 바라보며 청량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 스트라이프 티셔츠 세인트 제임스 by 플랫폼플레이스. 데님 팬츠 빈폴맨. 슈즈 벤시몽. (아이) 스트라이프 티셔츠 세인트 제임스 by 플랫폼플레이스. 데님 팬츠·슈즈 ZARA Kids.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이창훈의 변신은 이뿐만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그의 얼굴에는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충만한 에너지와 긍정의 기운이 비친다. 불같은 사랑에 빠져 활활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안정적이고 소박하게, 받은 만큼 사랑을 돌려줄 줄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진심 어린 얼굴이다. 배우생활을 한지 어느새 24년이라고 하니 꽤 오랫동안 그의 얼굴을 봐온 셈인데, 요즘만큼 남달라 보였던 때도 없는 듯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름의 긴 기다림 끝에 이창훈과 딸 효주양의 화보 촬영을 진행하기로 한 날, 모든 준비를 끝내놓고 두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변하게 했는지를. 그것도 놀라울 만큼 자연스럽게, 부러울 만큼 멋지게 말이다. 그리고 몇 시간 뒤, 곧 알게 됐다. 사람은 누군가의 존재로 인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또 자신도 모르게 그런 능력이 생긴다는 것. 아내와 딸에 대한 소중함만큼 자신의 삶에도 더욱 집중하게 된 이창훈이 그것을 직접 증명하고 있었다.
혼자일 때는 상상도 못했던 행복을 알게 해준 가족
“효주 어렸을 때 사진 보여드릴까요? 못난이 표정으로 찍은 아주 귀여운 사진이 있는데. 효주야, 이모한테 효주 ‘감자 얼굴’ 보여줘도 괜찮지?”
“안 돼요. 이모 보기 전에 나한테 먼저 보여줘.”
둥그렇게 둘러선 10여 명의 사람들 사이에 흐르던 어색한 분위기를 유연하게 다독이고 나선 건 의외로 이창훈이었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인사를 건네고 “예쁘다” 칭찬을 하고 “이건 어때, 저건 어때?”라고 물어도 두 눈만 깜빡깜빡거리며 입을 꼭 다물고 있던 효주는 그제야 찡그리고 있던 미간을 폈다. 하긴, 낯선 장소에 덥고 복잡한 공간에다가 온통 처음 보는 사람들까지. 게다가 그 사람들이 만나자마자 전부 자기만 쳐다보고 있으니 얼마나 불편했겠는가. 효주가 배시시 웃는 걸 슬쩍 곁눈질로 확인한 이창훈이 더욱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럼 지난번에 엄마가 보내준 효주 발레 연습실 동영상 기자 이모한테 보여줘야지. 자, 보세요.”
“나부터 보여달라니까, 아빠!”

(아빠) 니트 카디건 슈퍼드라이.티셔츠 플레이 몬스터. (아이) 니트 판쵸·부츠 ZARA Kids.
“평소 딸이랑 친구처럼 지내요. 제가 조금 늦게 결혼해서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나이가 있는 편이긴 하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하는데요(웃음). 그리고 저는 아주 예전부터 아이에게 친구같이 편안하고 재미있는 아빠가 돼주고 싶었거든요. 효주가 딸인데다가 야무진 데가 있어서 말도 아주 또박또박 당차게 잘하는데, 어떤 때는 저한테 ‘이렇게 하면 돼, 안 돼!’ 하고 혼낼 때도 있어요. 저는 가능하면 효주와 눈높이를 맞춰서 지내고 싶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려고 해요.”
여자아이라 확실히 애교도 많고 귀염성이 있어서 예뻐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촬영을 끝내고 피곤에 젖어 집에 돌아온 날도 효주가 달려와 안기면 결리던 어깨 통증이 잊힌다. 처음 효주를 품에 안았을 때는 워낙 예쁘고 작아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조차 조심스러워할 만큼 서툰 아빠였지만, 자주 손잡고 안아주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금방 가까워졌다. 지금은 언제나 아빠 옆에 꼭 붙어 있으려 하고, 늘 아빠한테 먼저 안아달라고 달려오는 효주가 무척이나 사랑스러울 뿐이다.
“이렇게 행동은 아기처럼 굴지만 말하는 걸 들어보면 굉장히 똑 부러져요. 절 닮아서 그런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니까요(웃음). 그럴 때 보면 ‘아, 역시 내 딸이구나’ 싶어요. 그래서 저는 효주가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아기라고 생각하지 않고 저와 동등한 인격체라고 생각하고 존중하며 솔직하게 대하려고 애써요. 약속을 하면 꼭 지키고,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의견도 묻고요. 효주는 표현도 확실히 잘하거든요. 말도 잘하지만 그림이나 몸으로 하는 표현력도 좋은 편이에요. 요즘은 발레를 배우고 있는데,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효주가 나중에 무용이나 음악이나 미술 같은 걸 전공했으면 좋겠어요. 배우요? 아, 본인이 정 하고 싶다면 모르지만 전 별로 추천하고 싶진 않은데요(웃음).”
2008년, 열여섯 살 어린 미모의 아내 김미정씨와 결혼하며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샀던 그는 가정을 꾸린 이후 매 순간 일상의 소박한 기쁨들을 발견하며 살아가고 있다. 예전에는 결코 상상도 못했던 결과 무늬의 행복들이다. 한때는 평생 혼자 살게 될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적도 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아내를 만난 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외모가 예쁜 만큼, 마음이나 생각이 더 예쁘고 바른 사람이에요. 저보다 나이가 한참 어리지만 굉장히 어른스럽고 속이 깊고요. 보시다시피 엄마로서 효주를 대하는 걸 보면 참 현명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요. 아내는 이해심이랄까 배려심이 남다른 편이에요. 그런 점이 참 좋고 또 무척 고마워요. 저 정말 결혼 잘 한 것 같아요.”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나가는 새로운 인생에 소중한 아이 효주가 찾아오면서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졌다. 어릴 적 부모님이 늘 바쁘셨기 때문에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낸 기억이 거의 없다는 그는 무엇보다 딸 효주에게 ‘함께하는 기억’을 선물해주고 싶다고 한다. 커다란 아빠 손의 감촉, 속삭이는 아빠 목소리, 언제나 웃어주는 아빠의 얼굴 등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결코 살 수 없는 것이고, 평생을 살면서 지워지지 않을 영원한 보물이자 살아가면서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든든한 버팀목이 돼줄 것이기 때문이다.

셔츠·팬츠 ZARA Kids. 레인부츠 헌터.
두려움 없이 변화를 즐기는 배우
흔히 배우를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곤 한다. 화려한 외모로 미니시리즈의 주인공을 도맡으며 CF를 통해 인기를 이어나가거나, 연극 무대에서 오랜 시간 쌓아온 내공을 대중적인 하나의 작품을 만나 분출하며 알려지거나, 브라운관 혹은 영화계에서 계속해서 활동해오다가 강한 캐릭터로 이미지 변신을 하면서 배우 인생 2막을 시작하거나 등등. 하지만 특정한 유형에 속하게 될 만큼 자신의 실력과 운과 기회와 노력이 모두 맞아떨어지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그런 점에서 아슬아슬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야만 하는 연예계에서 수십 년이란 세월을 꾸준히 발붙이고 서서 자신을 지켜온 사람이라면,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대단한 성과를 일궈낸 셈이다.
1989년 M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해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넘나들며 다양한 작품활동을 펼쳤던 이창훈도 자신만의 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언제나 뭔가 주어지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라 뭐든 맡은 이상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항상 최선을 다했다. 생애 처음으로 머리 탈색까지 해가며 변신을 시도했던 드라마 ‘남자가 사랑할 때’의 ‘구용갑’ 역도 그랬다. 야비하고 더러운 인간의 끝을 보여준 구용갑은 돈 앞에서는 친구도 인정도 없는 인물로, 친구가 죽어가는 데도 ‘제발 죽어라’ 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만 있는 잔인무도한 냉혈한이었다.
“영화 ‘4발가락’이나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악역을 한 적이 있어요. 드라마 ‘당신이 잠든 사이’에서 나쁜 남편 역도 해봤고요. 그런데 이 남자는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악한 사람이었어요. 처음에 각오 없이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4회쯤 넘어갈 때 작가께 솔직히 더 못하겠다고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정말 제가 봐도 이 인물이 너무 싫었고, 일부러 만든 건 아니지만 그동안 제가 가져왔던 ‘순정남’이나 ‘키다리 아저씨’ 이미지가 완전히 훼손되겠다 싶더라고요. 잘못하면 다음 작품을 하는 데 나쁜 영향을 주면 어쩌나 걱정도 됐고요.”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는 배우니까 끝까지 싸워 부딪쳐봐야 하지 않겠나’란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대본 안에서 그것을 충실히 표현하는 것이 배우”라는 선배 연기자들의 조언도 있었다. 더 사악하고, 더 못되게 만들어보기로 했다. 그때부터는 오히려 대본을 받아들기 전, 마치 데이트를 기다리는 것처럼 설레고 촬영장에 가는 일이 즐거워졌다. 연기가 재미있고 인물에도 애착이 생겼다.
“오랜만에 제가 연기를 하면서 즐기고 있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시청자들이 ‘재수 없다, 나쁜 놈, 보기 싫다’라고 욕을 해주시니 더 신이 났어요. 특히 제가 그래도 잘하고 있구나 하고 느낀 게, 저희 둘째 누나가 어느 날 전화를 해서는 ‘네가 이런 역할을 할 줄도 몰랐고, 게다가 이렇게 잘 표현할 줄도 몰랐다. 정말 너는 배우구나’라고 하는데, 굉장히 뿌듯하면서 뭔가 큰 산을 하나 넘은 듯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는 구용갑을 계기로 또 한 꺼풀을 벗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배우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면서 갖고 있는 수많은 껍데기 중에서 커다란 하나를 비로소 내려놓았다고. 이 역할이 자신의 이미지를 망쳐놓기는커녕, 오히려 운신의 폭이 더 넓어졌다고 생각한단다.

(아빠) 야구점퍼·티셔츠 플레이 몬스터. 팬츠 코르스코. 슈즈 헌터. (아이) 야구점퍼·슈즈 ZARA Kids. 샤 스커트 컬리수.
이창훈의 다음 목표는 아직도 가슴속에 있는 수많은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꿔줄 싹을 찾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 될지는 아직 모른다. 조금 욕심을 내본다면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살인마 역할이나 몸과 마음의 상처와 장애를 표현해내야 하는 역할을 맡아보고 싶기는 하다. 무엇을 하든, 다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그는 변화하고 또 변화하고, 또 그 변화를 즐길 것이다.
인터뷰 내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고르던 이창훈은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를 외치며 달려오는 효주를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마치 다른 인물이 된 듯했다. 아마도 그의 진지함을 한 번에 무장해제시킬 수 있는 뜨거운 이름은 효주가 아닐는지.
“제가 결혼 전까지 혼자 살았던 기간이 10년 정도 돼요. 그때는 잠도 침대에서 안 자고 항상 ‘춥다’고 느끼면서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렇게 가족이 생기니 따뜻하고 소중하고 참 행복해요.”

배우 이창훈과 딸 효주의 Sweet Whisper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원상희 ■의상 협찬 / 벤시몽·헌터(02-515-9895), 빈폴맨·세인트 제임스 by 플랫폼플레이스(02-3446-7725), 슈퍼드라이·컬리수·코르스코·플레이 몬스터(02- 517-0071), ZARA Kids(02-3413-9820) ■소품 협찬 / 한사토이(02-790-1381, www.hansatoy.kr) ■장소 협찬 / 베이비훈 스튜디오(02-573-3777) ■헤어&메이크업 / 인건, 세영, 경은(니케인뷰티, 02-514-4425) ■스타일리스트 / 김명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