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사리 대장님’ 송창식 세시봉 열풍 이후 사는 이야기
미사리 라이브 카페 ‘쏭아’를 찾기 전 조사해본 바로는 분명 ‘송창식 카페’였다. 상호명인 ‘쏭아’도 송창식의 옛 별명이고 말이다. 송창식이 누군가. 시대의 거장이라 불리기 족한 시대의 음악인 아닌가. 그런 그가 미사리의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를 한다면 사실 조금은, 아주 조금은 의아한 느낌이 든다. 그렇다. 그가 오르기엔 무대가 작아서다. 또 그가 노래하기엔 관객이 무척 적어서다. 아니, 손님이라 해야 하나?
세시봉 열풍으로 후끈 달아올랐던 열기가 아직도 여기저기에 남아 있건만, 큰 공연 마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미사리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를 한단 말인가. 그것도 디너쇼 형태로 1주일에 절반 이상을 매일같이 말이다. 그런데 그 카페가 송창식 소유의 카페라면? 내 가게에서 내가 노래한다면? 카페 영업이 걱정되는 사장이라면? 뭐, 그러면 일말 수긍이 된다. 제아무리 기인처럼 사는 자유인 송창식이라도 말이다. 속물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 카페가 송창식 꺼’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 그럼 그렇지’ 했다. 수긍이 될 법한 이유를 찾으니 이 속세의 범인(凡人)은 조금 편안해졌다. 아니, 만나러 가는 길이 한결 편안해졌다. 살짝 고백하자면 천재니, 기인이니, 수도승이니, 자유인이니 하는 수식들에 겁을 좀 먹었었다.
분명 송창식은 어떻게 미사리 카페에서 공연을 하시게 됐냐는 질문에 “이걸 내가 지었단 말이야!”라고 답을 했다. 그래서 “아, 네. 이 카페가 선생님 소유라고 들었어요”라고 알은체를 했고 말이다. 그런데 ‘소유’만이 아니라니! 그러고는 예의 그 해맑은 표정을 지었다. 평범한 소인은 뭐가 문제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는 거인 앞에서 결국 당황하고 만다.
“사장은 따로 있어(웃음). 그런데 여기 땅 사라고 권유한 것도 나고, 설계도 감수도 다 내가 같이했어. 그리고 내가 처음 노래했지. 근데 여기 앞에 지하도가 생기고, 공사판이 되면서 미사리가 예전 같지 않거든. 여기도 파스타 집으로 잠깐 바뀌었었는데…, 카페로 바꿔 다시 공연하자고 사장이랑 의기투합했지.”
그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속마음은, 누구의 것이든 ‘내가 아끼는 내 무대’라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당황스러움이 어떤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조금은 설레기도 하면서!
매일 노래할 수 있다는 것
“난 여기서 노래하는 게 참 좋아. 매일 할 수 있으니까. 콘서트 같은 공연도 좋지만 그건 매일 하는 게 아니잖아. 공연은 어떤 면에서 늘 똑같아. 촘촘하게 짜인 약속으로 이루어졌으니까 말이야. 관객들 반응도 그렇고…. 물론 그건 그것대로 좋지만, 여긴 여기 나름의 매력이 있어. 매일매일이 다르거든.”
매일 노래할 수 있어서 좋다는 송창식의 표정은 무척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정말 그 작은 무대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음이 그의 말 한 마디, 몸짓, 손짓 하나에도 고스란히 담겨져 나왔다. 조영남은 송창식을 가리켜 ‘수도승’ 같다고 종종 말해왔다. 미사리 라이브 카페의 작은 무대가 참 좋다고 말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조영남의 의중을 알 것 같았다. 송창식은 정말 편견이 없는 이였다. 자신의 명성이나 지위, 과거의 영광이나 현재의 위치 따위를 음악과 결부시키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오롯이 세상의 것이었다. 그는 작은 무대라고 소홀히 하거나, 부끄러워하거나,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며 한탄하지 않았다. 천진하다고 할 수도 있고, 모든 것을 깨달아버렸다고 할 수도 있겠다.
송창식보다 한참 어린 후배 가수들조차 자신에게 맞는 ‘급’을 따져가며 무대를 가리고, 자리를 따지고, 활동을 계산한다. 그런 모습은 어느새 꽤 익숙한 것이 되어 더 이상 눈살을 찌푸릴 만한 일도 되지 못한다. 송창식은 음악인다운 말을 하고 있었다. 음악인에 맞는 행보였다. 그런 그를 조금은 ‘이상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때 묻은 세상이 이상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세상은 그런 그를 이해하기 어려우니 그를 털고, 또 털어 ‘세속적인’ 이유 찾기에 바쁘다.
송창식의 노래가 힘이 있는 것은 음악적인 완성도도 있겠지만 그 음악을 만드는 이의 진정성이 담겨 있기 때문은 아닐는지. 매일 노래하는 게 좋다는 그의 말이 이어졌다.
“카페 공연이 재밌는 게 뭐냐면… 어떤 날은 콘서트장 같고, 또 어떤 날은 술집 같아. 그런가 하면 어떤 날은 달그락거리는 찻잔 소리가 나는 카페 같고. 정말 매일매일이 달라. 그러니까 노래가 굉장히 버라이어티해져. 같은 노래라도 말이야. 그날 분위기에 맞춰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노래를 부르지. 그래도 공연과 다르지 않느냐고 하는데, 글쎄? 내겐 큰 공연장이나 카페나 다 똑같아. 장소 다르다고 노래가 달라지나? 음악이 달라져?(웃음)”
단 한 사람의 손님만이 앉아 있는 한산한 카페이건, 전석 매진으로 발 디딜 틈이 없는 공연장이건 다 똑같다고 말하는 송창식. 그의 팬들은 복받았다 싶다. 해가 진 후 미사리로 가면 언제든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으니까. 그것도 송창식이 직접 부르는 노래를 말이다. 세상에나, 팬들 옆에 이렇게 가까이 있는 가수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공연과 연습은 다르지만, 공연도 계속해봐야 느는 거거든. 연습이다 하고 따로 하는 건 거의 없고, 실전처럼 이렇게 공연도 하고, 그러면 연습도 되는 거고 그렇지(웃음). 그런데 뭐라고 딱 규정짓는 건 불편해. 그냥 난 무대에 오르고, 노래해. 음악 안에서 사는 거지. 그거면 됐지. 뭘 더 어떻게 설명해주나…, 거기서 뭐가 궁금할 게 있어… 하하하.”
그는 평생 노래를 멈춘 적이 없다고 했다. 왕성히 활동하던 시기를 지났고,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가수도 아니며, 선배라는 말 대신 선생님이란 호칭으로 더 많이 불릴 만큼 나이를 먹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계속 노래를 부를 것이라 했다. 그게 송창식의 삶이니까.

‘미사리 대장님’ 송창식 세시봉 열풍 이후 사는 이야기
미사리 쏭아 라이브 카페 무대에 오른 송창식은 혼자가 아니었다. 조명을 받는 무대 한가운데 자리를 사이좋게 반으로 나누어 앉아 공연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하는 사람! 바로 우리나라 최고의 기타리스트라 불리는 함춘호였다. 그는 한때 ‘시인과 촌장’의 멤버로 가수로도 활동한 음악인이다. 특히 음악인들에게 더 유명한 음악인이다. 그만큼 실력이 대단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가 왜 송창식과 함께 공연을 하고 있을까. 더욱이 공연 안내 플래카드에도 떡하니 ‘송창식&함춘호 디너쇼’라고 씌어 있다. 플래카드 속 사진 크기도 송창식과 똑같다. 다른 점이라고는 송창식이 옆으로 좀 더 넓고, 함춘호가 위로 좀 길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 공연의 지분을 따지기엔 적합하지 않아 열외로 둔다.
“함춘호는 여기가 좋아서 공연하는 건 아닐 거야(웃음). 근데 이제는 나 혼자 하기 싫어. 같이하는 게 좋아. 함춘호 기타는 최고야. 특히 송창식의 노래를 반주할 수 있는 사람은 단언컨대 함춘호뿐이야. 방송이나 다른 데서 섭외가 와도 난 이제 함춘호랑 한다고 해. 함춘호 아니면 안 되는 걸? 그런 실력이야.”
먼저 입을 연 것은 송창식이었다. 그는 함춘호라는 기타리스트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부러 말을 끊지 않으면 날이 새도록 함춘호가 얼마나 대단한 음악인인지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할 참이었다. 송창식을 매료시킨 음악인이 있다니! 더군다나 그와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면 싫을 정도라니! 문득 세시봉 열풍을 몰고 온 MBC-TV 예능 프로그램 ‘놀러와’ 세시봉 특집에서 함춘호의 반주로 불렀던 ‘한번쯤’이 생각났다. 중장년층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몇 곡 중 하나였는데, 당시 유튜브 조회 수가 20만에 육박할 정도로 큰 감동을 주었다. 작년에 방영됐던 KBS-2TV ‘불후의 명곡’에서도 송창식은 혼자가 아니었다. 함춘호와 함께였다.
“처음 선생님하고 함께한 게 2000년 초였어요. 세종문화회관에서 선생님하고 윤형주, 김세환, 양희은씨가 공연을 하셨거든요. 거기서 만났어요. 선생님 노래는 제가 다 알고 있었고, 주법도 익숙해서 낯설지가 않았어요. 호흡이 잘 맞았죠. 그때부터 세시봉 열풍을 지나 지금까지 죽 이어져오고 있어요.”
무대에서 함춘호는 말이 없었다. 사진을 찍을 때도 부끄러워하는 낯이 역력했다.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거의 말씀이 없으신가 봐요”라고 가볍게 건넨 말에도 그는 그저 “네” 하고 짧게 답하고 웃을 뿐이었다. 그런데 무대 아래로 내려온 후, 기타를 케이스에 안전하게 넣어둔 다음은 달랐다. 큰 고저 없이 조용한 음색이었지만 미소를 잃지 않으며 부드럽게 말을 잇는 매력적인 목소리의 그는 달변가였다. 함춘호는 송창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물론 그 이야기라는 것은 음악이다.
“잘 모르는 이들은 그런 말도 해요. ‘넌 송창식 형 카페 가서 왜 그렇게 열심히 하냐?’라고요(웃음). 하지만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죠. 제가 기타를 배우게 된 계기가 바로 송창식이란 음악인 때문이었어요. 중학교 때 처음 알게 됐고, 그저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라는 생각에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죠.”
우상과 함께 연주하고, 우상과 함께 무대에 오르는 것이 어떻게 ‘뭐 그렇고 그런’ 일일 수 있겠느냐고 함춘호는 되물었다.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된다. 옆에서 까마득한 후배의 말을 듣고 있는 송창식은 그저 지그시 웃는다.
혼자 노래하긴 싫어!
‘송창식 with 함춘호’의 음악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함춘호의 기타 반주와 어우러질 때 송창식의 목소리가 가장 아름답게 빛을 발한다고. 그리고 잊지 않고 덧붙이는 말이 있다. 기타소리가 이렇게 예쁠 수 있구나, 좋을 수 있구나, 사람의 목소리만큼 아름다울 수 있구나. 마저 끝말까지 채우지 못하고 ‘아!’ 하고 감탄사로 흐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송창식이 반주 이야기를 다시 꺼낸다.
“내가 왜 단독 공연을 못했는데. 반주자들이 없어서야. 우리 세대 음악은 조금 왜곡된 형태였어. 음악인 줄 알고 열심히 했지만 오해가 있었달까. 나의 음악과는 조금 달랐지. 내가 제일 잘한다거나, 나만 맞다거나 하는 소리가 아니야. 나는 이게 맞는 것 같은데, 아니라고 하거나 그렇게 안 하니까. 그러니 할 수가 없었지. 그런데 얼마 전에서야 함춘호를 만난 거야.”
송창식 음악 인생에서 그의 음악을 받쳐줄 반주자를 만났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임이 분명했다. 물론 잘 모르는 입장에서야 천하의 송창식이 제대로 된 반주자가 없었겠느냐 하며 갸우뚱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음악 이야기를 하는 송창식은 달랐다. 다른 가수들 반주는 많이 해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반주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럴 만한 기타리스트가 없었던 것이다. 송창식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집에 틀어박혀 있을 때’ 미처 몰랐던(?) 함춘호가 어느새 우리나라 최고의 기타리스트가 되어 있더란다. 나이도 한참 어린 후배라 함께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함춘호가 제일 잘 친다고 소문이 나 있더라고. 그래서 우리 집으로 와봐라 했어. 내심 속으로 ‘일단 나랑 해봐야 알지’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웃음). 내가 최고란 말이 아니야. 내 음악이나 잘하는 거지. 다른 사람과는 음악과 이야기가 잘 안 돼. 그런데 함춘호하곤 되더라고. 땅 하면 땡 하고 받는 말 말이야.”
송창식은 땅 하면 땡 하고 받는다는 표현 이후로 “난 주식 얘기를 하는데 걔는 축구 얘기를 해봐”, “난 발로 찼는데, 걘 손으로 쳐봐”, “언어를 이해해야 쉽게 풀리는데 말이야”라며 그간 느껴왔던 답답함을 쏟아냈다. 그의 말 속에는 멜로디나 음표, 박자나 리듬 같은 단어는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당최 무슨 얘기인지 이해를 못하는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본 함춘호가 나선다.
“음악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우리는 음을 통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거든요. 멜로디를 통해 감정을 전하는 거고요. 그 안에서 다양하게 표현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음악은 언제부턴가 약속한 대로만 해요. 똑같은 것 같아도 다 달라요. 선생님과 저는 음악의 언어가 같아요. 말이 통하는 거죠.”
음악이라고 해도 되고, 리듬이나 박자, 멜로디라고 표현해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굳이 말이나 언어, 이야기라고 설명하는 것은 음악인들만의 그 무엇이 거기에 더해지기 때문이란다. 그들은 노래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음악을 한다고 하지도 않았다. 꼭 이야기를 한다고 표현했다. 모르고 듣다간 “음악 얘긴 전혀 안 하던데?”라며 딴소리 내뱉기 십상이었다.

‘미사리 대장님’ 송창식 세시봉 열풍 이후 사는 이야기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유효한 그 이름 세시봉. 오늘도 방송국 홈페이지의 다시 보기를 클릭하는 사람이 있고, 유튜브의 조회 수도 계속 올라가고 있다. 다시금 우리 곁에 찾아온 세시봉 4인방을 통해 추억의 포크 음악 광풍이 불어닥쳤다. 특집 방송은 특집의 특집으로 이어졌고, 다른 방송사들도 세시봉 4인방을 초대해 쇼를 열고, 토크쇼를 마련했다. 그리고 급기야 전국 순회 콘서트까지 열렸다. 해외 공연까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들조차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으로 이런 반응을 몰고 올지 예상이나 했을까 싶다. 그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으면 퇴출 위기에 몰렸던 기타 공장이 살아나고, 지금도 세운상가 매출 1위 품목이 기타일까. 상인들조차 세시봉, 세시봉 할 정도이니 말이다.
“반응이 정말 굉장했지. 그 방송분이 외국에서는 해적판이 돌기도 했다고 해(웃음). 한 한인교회에서는 예배 마치고 나서 신도들에게 ‘놀러와 세시봉 특집 방송’이라고 쓰여 있는 CD를 나눠주기도 했다더라고(웃음). 바쁘게 보낸 시간이었어. 세시봉 콘서트만도 50회 정도를 했으니까.”
그 뜨거운 반응은 옛날을 추억하는 중장년층만의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들만의 호응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파급력이 크지도, 영향력이 길지도 않았을 것이다. 얼마 전에는 특이한 사연이나 고민이 있는 일반 시청자들이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KBS-2TV ‘안녕하세요’에 “장동건, 조인성보다 송창식 선생님이 더 잘생겼다!”라며 송창식 광팬을 자처하는 초등학생이 나와 화제를 모으기도 했을 정도다. 그렇다면 세월을 무색하게 하고, 연령을 초월하는 그 세시봉 음악의 힘은 무엇일까. 음악도 음악이지만 변치 않는 자세로 한결같이 자신들의 음악을 지켜온 그 모습이 주는 감동이 아닐까.
“옛날 음식이라고 곰탕 안 먹나? 맛있으면 먹는 거지(웃음). 그런 거 아니겠어? 그리고 예를 들어 함춘호랑 해서 반응이 좋았던 ‘한번쯤’이란 노래 다시 들어봐요. 원래 폼대로 하지 않았어. 그대로 했다면 아마 별로였을 거야. 같은 노래도 그렇게 달라지는 거지. 내 음악이 가지는 자유로움이 전달돼 젊은 친구들도 새로운 음악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곰탕을 빗대어 설명하는 송창식의 말은 재미도 있으면서 쉽게 다가왔다. 그래, 맛있으면 먹는 거지! 그런데 문제는 ‘맛’을 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가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다. 누군가는 평생을 가수로, 작곡가로, 연주자로 살아가면서 단 한번 가지기는커녕 흉내조차 내보지 못하고 끝난다는 데 있다.
“자유로움, 폭발력 혹은 사람 애간장을 태우는 것… 이런 것들은 방송 이전부터 만들어져 있었어요. 같은 노래도 달라지는 거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패턴이 쉽게 변하는 것은 가치가 없어요. 하지만 절대적인 가치가 있으면 이전 것도 살아남죠. 선생님 음악이 그렇죠.”
함춘호가 송창식의 말을 이어 음악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나저나 세시봉 이후의 근황을 물었는데 어쩌다 보니 또 음악 이야기다. 용기를 내어 준비했던 질문을 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물소리 좋아하시는 사모님 위해 지으셨다는 수상가옥은 공개할 생각이 없으세요?”, “기상 시간이 오후 3시라던데요. 선생님의 하루 일과가 궁금해요!”, “세시봉 멤버들 중에서 누가 가장 자주 전화하나요?” 등등 말이다. 긴 답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솔직히 혼나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송창식의 답은 역시나 예상 밖이었다.
“아니, 그런 게 왜 궁금해요? 응? 내가 궁금해서 그래.”
진짜 가수, 미사리 대장님!
인터뷰를 처음 시작할 때 송창식은 되레 자신을 찾아온 기자를 걱정했다. 인터뷰하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불편해서란다. 자신의 말이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면서 말이다. 한번은 한 기자가 찾아와 심층 인터뷰를 하자고 했단다. 기사 분량도 많았다고 한다. 그때도 송창식은 그 기자를 말렸다고 했다. 음악 이야기야 유창하게 할 수 있지만 너무 전문적인 내용들이라 기사로 쓰기에는 적당치 않을 것이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기자는 반드시 할 수 있다고 자신하며 송창식과 꼬박 두 달을 만났다고 한다. 이후 기사는 송창식의 예언(?)대로 결국 나가지 못했다. 아니, 아예 쓰지 못했다고.
“내가 경고했거든. 인터뷰해봤자 기사로 못 쓴다고(웃음). 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생각을 안 하고 살아. 내 얘기 있는 그대로 하면 거짓말 같을 걸. 하지만 기사나 방송은 일반적인 말을 해줘야 하잖아. 난 할 말이 없어. 근데 또 결혼해 애 낳고 사는 건 또 사니까. 뭐 말하려면 쑥스럽고 그래. 아까 수상가옥 물었어? 아니, 한국에 수상가옥이 어딨어? 하하하.”
그래도 팬들은 언제나 송창식의 모든 것을 늘 알고 싶어 한다고 답했다. 음악 이야기도 좋지만 살아가는 이야기도 궁금해한다고. 좋아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 싶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닌가. 하지만 송창식은 “수십 년간 해왔잖아!” 하고 다시 한번 크게 웃어 보인다. 역대 최고라고 할 만큼 많이, 자주 웃은 인터뷰이다. 그는 사람 좋게 웃고, 또 웃었다. 해맑다 못해 천진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송창식은 화를 내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가까운 세시봉 친구들조차 그가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이니, 어쩌면 그의 웃는 낯에서 득도한 경지를 찾아볼 수 있겠단 기대감마저 들었다.
“또 뭘 물었더라? 세시봉 친구들 중에 누가 전화 제일 많이 하냐고? 다 많이 하고, 자주 해. 그런데 대개는 바로 못 받지. 부재중 전화가 온 것을 보고야 ‘아! 누가 전화했었구나’ 알고 내가 걸지. 그래도 윤형주와 김세환이 조금이라도 더 하는 것 같네(웃음).”
오후 3시에 기상해 하루를 시작한다는 그의 하루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밤은 깊어갔고, 그의 눈은 점점 빛이 났다. 신기하기만 하다. 함춘호는 이런 밤낮 바뀐 파트너의 생활 패턴을 맞추기가 힘들지 않을까 싶었지만, 음악인들 스케줄이 다 비슷해서 전혀 이상하지 않단다. 음악적인 천생연분이 따로 없다.
“이젠 여기서만 노래를 부를 거야. 서울이나 서울 근교에서 공연이 있다면 그건 좀 하겠지만… 이젠 지방까진 못 가겠어. 이 작은 무대서 매일매일 노래 부르는 것으로 난 만족해. 60년을 음악 해왔어. 이게 제일 좋아. 이 안에서 가장 자유롭고. 그거면 된 거지.”
함춘호가 슬쩍 송창식을 보다가 한 마디 거든다. 돈 생각하면 할 수 없는 생활이라고 말이다. 세시봉 4인방 중에 가장 돈이 없지만(?), 그중에서 돈이 유일하게 부족하지 않은 분이라는 말도 하면서.
조영남은 송창식을 일컬어 ‘진짜 가수’라고 했다. 노래밖에 모르고, 음악에 목숨을 건 사람이라고. 어떻게 하면 당대 최고의 가수들에게 ‘진짜 가수’라는 찬사를 들을 수 있는 걸까. 어떻게 하면 최고의 실력을 가진 후배들에게 ‘우상’이라고 불릴 수 있는 걸까. 그런데 우상이라 불리는 그 진짜 가수는 미사리에서 매일 노래를 부른다. 그곳 사람들에게 대장님이라 불리면서 말이다. 진짜 가수, 우상, 대장님이라는 단어를 모두 합치면 어떤 말이 될까? 아마도 ‘송.창.식’이리라. 그가 노래하고 있을 시간이 되면 미사리 쪽을 바라보게 된다. 한 번 더 가볼까… 하는 마음에.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강은진(객원기자) ■사진 / 김영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