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코리아 대모’ 이훈숙의 그때, 그녀들 이야기

‘미스코리아 대모’ 이훈숙의 그때, 그녀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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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령, 오현경, 장은영, 이승연, 장진영, 박시연 등 수많은 미녀 스타를 발굴한 ‘S 미용실’의 그녀, 이훈숙 원장이다. 모두 그녀가 발탁해 미스코리아 왕관을 씌우고 스타로 만들었다. 그녀의 주름진 손끝에는 미녀들과 함께 한 치열하고 빛나는 추억이 담겨 있다. 30여 년 쌓아온 추억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본다. 오랜 인연, 1996년 미스코리아 진 이은희도 함께했다.

‘미스코리아 대모’ 이훈숙의 그때, 그녀들 이야기

‘미스코리아 대모’ 이훈숙의 그때, 그녀들 이야기

처음 가위를 잡던 날
늘 누군가를 빛나게 만들 뿐 스스로 거울 앞에 앉아 주인공이 되기는 거의 처음이 아닌가 싶다. 내 자리가 아닌 것처럼 낯설지만 설레기도 한다. 이훈숙 원장. 1980년대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세리 미용실’의 역사에 비하면 꽤 젊어 보인다. 아마 현역이라는 이름에서 뿜어 나오는 활력 때문일 거라고 생각된다. 미스코리아의 황금기를 보낸, 아니 만들어낸 주인공이다. 이 원장을 통해 미스코리아가 된 사람들의 수는 자그마치 60여 명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미인 발굴에 대한 목마름이 가시지 않는다니 대단한 열정이다. 공무원 아버지를 둔 평범한 중산층에서 태어난 그녀가 비공식적으로(?) 가위를 잡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부터다.

“원래 어릴 때부터 멋 내는 걸 좋아했어요. 중학교 때는 양복 가위를 가방에 넣고 등교해 친구들 머리를 잘라줬어요. 사실 귀밑머리 단발을 자르는 기술이 쉬운 게 아니거든요. 학교 내에서는 잘 자른다고 소문도 났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소질이었나 봐요.”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주간여성」이라는 잡지에 실린 배우 김지미의 단골 헤어디자이너 인터뷰를 보고 헤어디자이너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시작됐다.

“그 디자이너가 말하길 김지미씨는 헤어스타일링 비용이 1만원이라면 2만원의 팁을 준다고 하더라고요. 그 시대에는 김지미씨를 좋아하지 않는 여고생이 없었으니, 동경하던 스타도 보고 머리도 만질 수 있고 게다가 돈도 벌 수 있는 직업이라니! ‘미용도 참 괜찮겠다’ 느끼기 시작했죠.”

더욱이 당대 유명세를 떨쳤던 서울 종로의 ‘세븐 미용실’을 방문하고 나서 그 꿈은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그곳은 별천지나 다름없었다. 1백 평이나 되는 미용실에는 분수대까지 설치돼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디자이너들이 손님들과 ‘교양 있는 서울 말씨’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신비롭게까지 느껴졌다.

“제가 다닌 고등학교 여자 선생님 중 한 분이 그 당시에 해외여행을 다닐 만큼 부잣집 딸이었어요. 그분이 저에게 미용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고 조언해주셨어요. ‘외국 아이들에게 꿈을 물어보면 디자이너 된다고 한다’라며 그것이 이제 곧 우리의 현실이 될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여성으로서 자유롭게 날개를 펼 수 있는 디자이너가 돼라’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생생해요.”

여성의 사회 진출이 쉽지 않았던 당시는 ‘여자는 은행에 취직하면 시집 잘 가는 시절’이었다. 이 원장은 선생님의 말을 듣고 미용전문대학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때까지도 부모님이 반대하셨어요. 제가 워낙 재미있어 하니까 ‘해보다가 관두겠지’ 하는 생각에 보내신 것 같아요. 결혼할 때도 ‘미용을 시키지 않겠다’라는 전제하에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허락하실 정도였죠. 그런데 제가 큰딸을 낳고 백일이 지나자 머리를 하고 싶어 도무지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시작했어요.”

이 원장은 1983년 미스코리아의 산실 ‘세리 미용실’을 열었다. 솜씨를 인정받아 1988년에는 한국에서 개최한 미스유니버시티의 전속 헤어디자이너로 일하며 각국 미녀들의 머리를 만졌다. 화장품 광고 촬영을 위해 내한한 소피 마르소와 브룩 쉴즈의 스타일링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세리’라는 이름은 점점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당대 최고의 미녀를 만들다
이 원장은 반복되는 펌이나 커트보다 좀 더 창의적인 일을 찾기 시작했다. 가끔 신부 화장을 하면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여성이 자신의 손을 거쳐 그날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 큰 흥미를 느꼈다. 그러다 그녀의 눈에 든 것이 미스코리아였다.

“미스코리아를 준비하면서 수영복에서 드레스까지 내 스타일대로 멋 내는 것이 정말 재밌더라고요. 신이 나서 그들에게 제 옷이나 신발도 아낌없이 벗어주며 일했어요. 그렇다 보니 정작 제가 어디 입고 나갈 옷이 없더라고요(웃음).”

‘미스코리아 대모’ 이훈숙의 그때, 그녀들 이야기

‘미스코리아 대모’ 이훈숙의 그때, 그녀들 이야기

이 원장은 지금도 전문 스타일리스트에게 의상을 의뢰하지 않는다. 하나에서 열까지 그녀의 감각으로 꾸민다. 김성령, 오현경, 장은영, 이승연, 장진영, 한성주, 이소라, 이은희, 설수진, 김사랑 등 미스코리아대회를 통해 스타가 된 사람들도 많다. 모두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아내는 원장의 눈썰미를 통해 발굴된 인재들이다.

“이승연씨는 대한항공 스튜어디스 시절 스마일 퀸으로 뽑혔다는 기사를 읽고 참 예뻐서 찾아갔어요. ‘미스코리아 한번 해보자’ 했더니 처음에는 ‘제가 어떻게요’ 하더라고요. 고 장진영씨는 동국대 의상학과 졸업 무대에서 모델로 나온 걸 봤어요. 정말 예쁘더라고요. 키가 작아서 본선에서는 아쉽게 탈락했지만 좋은 배우가 된 케이스죠.”

모 호텔에 식사하러 갔다가 안내 데스크에 있는 여직원이 눈에 띈 적도 있다. 그녀는 ‘미스 엘칸토’에 입상해 ‘좋은 곳’으로 시집갔다고. 이쯤 되면 그녀는 한 번에 미스코리아 재목을 알아내는 탁월한 재능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가능성이 있는 친구들은 저절로 눈에 들어와요. 한성주씨는 과거에 아역 연기자 생활을 했어요. 드라마에서 이휘향씨 딸로 출연했던 당시에 봤죠. 제가 ‘너 참 이쁘다. 나중에 미스코리아 되야겠네’ 했더니 성주씨가 대학교 입학한 후에 절 찾아왔더라고요. 이은희씨는 우연히 승마장에서 봤고요. 그때는 이병헌씨 동생인 줄도 모르고 미스코리아에 나가보자고 했어요.”

그녀의 안테나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미용실 손님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장은영씨는 미용실 고객으로 파마를 하고 있었어요.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자태가 예쁘더라고요. ‘끝나고 저 좀 보세요’ 해서 출전한 경우예요.”

이 원장에게 잊을 수 없는 기쁨을 안겨준 사람은 1988년 미스코리아 진 김성령이다. 처음으로 ‘미스코리아 진을 배출한 미용실’이라는 영광을 안겨줬기 때문.

“김성령씨는 어린 시절부터 묘하게 섹시한 마스크로 참 매력적이었어요. 당연히 잘될 줄 알았죠. 여전히 예쁘잖아요. TV에 나와 멋진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보면 늘 뿌듯함을 느껴요.”

일반인이었던 이들이 스타가, 셀러브리티가 될 때 가장 즐겁다. 이 원장의 ‘프린세스메이커’는 미스코리아가 됐다고 끝나지 않는다. 잡지와 방송국 인맥을 총동원해 섭외를 성사시키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가 발굴한 미스코리아들이 유독 연예인으로 성공한 이유 중 하나다.

“아무리 미스코리아가 됐다고 해도 명성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애프터서비스’가 중요해요. 그들을 방송국에 자리 잡을 때까지 밀어줘야지요. 어떻게 보면 제가 하는 일이 지금의 매니지먼트랑 비슷했던 거죠.”

소속사 개념이 희박했던 당시에는 방송국 대기실보다 그녀의 미용실에 연예인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스타를 섭외하기 위해 작가와 PD들이 들러야 하는 필수 코스였던 것. 그녀는 앞으로도 미스코리아 발굴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세월이 준 노하우와 연륜은 그대로 묵히기에는 아깝다.

“지금도 여전히 한 해에 10여 명은 출전시켜요. 미스코리아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저로서는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갖고 있는 재능을 이용해 만인에게 사랑받는 스타로 만드는 것, 무엇보다 보람된 일이지요.”

‘미스코리아 대모’ 이훈숙의 그때, 그녀들 이야기

‘미스코리아 대모’ 이훈숙의 그때, 그녀들 이야기

아직, 아직도 목마르다
헤어디자이너라면 누구나 꿈꾸는 ‘기념비’적인 인물이 됐지만 이 원장은 여전히 아쉬운 것들이 많다. 후배들을 위해 헤어디자이너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더 높이고 싶다.

“후배들이 힘들지 않게 일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주고 싶어요. 미용은 무엇보다 일상생활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디자인 분야잖아요. 그런데 다른 분야에 비해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아요. 물론 과거에 비해 인식은 많이 나아졌지만 건축디자이너, 의상디자이너만큼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요.”

좋은 기회를 만들어 해외시장으로 진출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사람의 손기술이 가장 중요한 미용은 다른 나라로의 진출이 용이하다.

“현재 미용실 시설이 굉장히 과열화돼 있다고 생각해요. 너무 호사스러울 필요가 없거든요. 마치 교회가 크고 성대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죠. 동남아에 자동차 몇 대 파는 것보다 더 큰 부가가치를 얻을 수 있으니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해요. 저희도 철저하게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데 힘써야 하고요.”

그녀는 1세대 헤어디자이너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남들이 인정하는 성공 뒤에 여생을 즐길 수도 있는 나이. 그러나 “일 안 하면 뭐 하나요?”라는 한마디로 기꺼이 빗과 가위를 드는 그녀는 그야말로 미용계를 지키는 대모의 모습이다.

1996년 미스코리아 진 이은희가 말하는 이훈숙 원장

승마클럽에서 이훈숙 원장님께 발탁됐다고 들었어요.
선생님의 아드님이 다니던 승마클럽에 저도 다니고 있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간 어느 날 갑자기 원장님께서 “내일 엄마 모시고 미용실로 와”라고 하시더라고요. 처음에는 미스코리아대회에 나가는 게 정말 싫었어요. 안 나간다고 버텼는데 저희 아빠, 엄마의 소원이 ‘딸이 미스코리아가 되는 것’이었죠. 오죽하면 아빠가 퇴근 후 하시는 일이 늘 제 다리를 곧게 하는 마사지였겠어요. 굳은살 생긴다고 팔꿈치를 책상에 대지도 못하게 하셨고요(웃음). 그러니 안 나갈 수 없었죠.

부모님 소원도 풀어드릴 겸 출전했군요? 보통 준비는 어떤 식으로 하나요?
그때는 지금과 달리 훈련 공간이 별도로 있던 것도 아니어서 손님들 머리 하고 있는 곳 뒤에서 수영복을 입고 워킹을 했어요. 정말 창피했죠. 그때까지 힐을 신어본 적이 없어서 잘 걷지도 못했어요. 근데 연습한 지 2주 만에 서울 지역 예선에서 1등을 한 거예요. 같이 대회 준비하던 언니들한테 눈총 많이 받았죠.

이 원장님의 강점은 뭐라고 생각해요?
철저함이죠. 미용실에서 교육을 받고 출전한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준비해 나온 사람들은 정말 달라요. 미용실에서는 워킹은 물론, 포즈, 말투, 인터뷰 내용 등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가르쳐주니까요. 인사말을 준비해오면 다 첨삭해주시고요.

이 원장님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의리와 카리스마. 저랑 성향이 비슷하세요. 친해지면 끝까지 가는 스타일이시죠. 원래 화를 잘 내는 성격은 아니지만 해야 할 말은 하시고요. 정말 무서울 때도 있어요.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원상희 ■헤어&메이크업 / THE SERI (02-514-0721) ■장소 협찬 /르미엘스튜디오(www.lemiel-studi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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