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소’ 뽀병이 김병조에게 ‘뽀뽀뽀’를 묻다
이 프로그램을 대표하는 사람은 누굴까. 원년 멤버이자 최장기 출연자인 ‘뽀병이’ 김병조가 떠올랐다. 김병조는 이용식과 함께 7년간 ‘뽀병이’, ‘뽀식이’ 캐릭터를 이어 나갔다. 뽀식이가 떠난 뒤에도 뽀병이는 손 인형과 그림으로 엮어가는 ‘동물 소식’을 전하는 사이 무명의 개그맨에서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했다.
‘뽀뽀뽀’의 추억과 그의 근황을 듣기 위해 서울 노원구 자택을 찾았다. 그는 ‘배추머리’라는 별명을 꺼내기에는 다소 어색해진 점잖은 한학자 겸 교수로 변해 있었다. 올해로 63세. 그럼 당시 장난기 많던 뽀병이가 30대 초반이었단 말인가. 혼란스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안부를 물었다.
“개그맨에서 학자가 된 지 꽤 됐습니다. 고향인 광주의 조선대학교 교육대학원 초대교수이자 평생교육원 명예원장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대학원과 학부에서 교단에 서기도 하고 정부청사나 지방을 돌아다니며 공무원이나 일반인을 상대로 강의도 하지요.”
그는 거실 가운데 자리한 기다란 금강송 탁자 옆에 자리를 잡는다. 물건은 주인을 닮아간다고 했던가. 문득 탁자에서 세월의 더께를 간직하고 있는 정갈하고 은은한 멋이 우러나오는 듯하다. 섭씨 30도가 넘는 더위가 무색할 만큼 집 안은 아늑하고 평온하다.
아침에는 뽀병이, 저녁에는 시사평론 개그맨
추억의 ‘뽀뽀뽀’에 대해 물었다. 그는 1981년 5월 23일 첫 방송부터 프로그램을 함께했다. 무명생활을 접고 ‘일요일 밤의 대행진’의 앵커로 막 주가를 올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뽀뽀뽀’라는 프로그램명을 직접 지은 이재휘 프로듀서가 제게 함께해보자고 하더라고요. 새로운 형식의 유아 프로그램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캐릭터도 재미있었고요. 처음부터 뽀병이, 뽀식이 캐릭터가 확고하게 잡힌 건 아니었는데요. 하다 보니 후배 이용식은 착한 사람으로, 저는 악한 사람으로 자연스럽게 캐릭터가 형성되더라고요.”
두 사람은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주인과 머슴, 형사와 범인으로 역할을 나누어 맡았고, 소위 말하는 ‘대박’을 쳤다. 하지만 기자 앞에 앉아 있는 한학자의 모습에 까불이 뽀병이의 기억은 어색하게 느껴진다.
“안 어울린다고요? 하하하. 아닙니다. 지금 제 모습을 보셔서 그런 겁니다. 제겐 두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는 점잖은 학자의 모습이고 나머지 하나는 개그맨으로서의 모습이죠. 까불면서 웃기는 거요. 뽀병이는 후자의 캐릭터를 살린 셈이지요. 재미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버지로서 자녀들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는 게 기뻤고요.”

김병조는 「레이디경향」 독자들에게 ‘지족상족 종신불욕 지지상지 종신무취’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넉넉한 줄을 알고 항상 만족하면 종신토록 욕되지 아니하고 그칠 줄을 알고 항상 그치면 종신토록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이다.
“완전히 아이들로 변신해야 했습니다(웃음). 다행히 출연진과 제작진의 궁합이 척척 잘 맞았습니다. 출연진끼리 애정 어린 충고도 해줬고요. 왕영은씨는 우리가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조언을 하거나 아이디어를 줬습니다. 고마웠죠. 이재휘 프로듀서와도 사이가 좋았고 이용식과도 성격이 잘 맞았습니다. 이용식씨와는 지금도 형제처럼 친하게 지냅니다.”
‘뽀뽀뽀’의 인기가 올라가며 뽀병이도 전국 어린이의 사랑과 미움을 한 몸에 받았다. 악인 캐릭터 뽀병이를 맡으며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생겼다. ‘뽀뽀뽀’에 출연한 지 1년 즈음 되던 때였다. 스케줄을 위해 수원행 전철을 타고 있을 때 갑자기 한 꼬마가 나타나더니 “뽀병이는 나쁜 사람”이라며 손으로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뽀식이를 못살게 구는 뽀병이”라고 고함을 치기도 했다. 어이없는 상황에 전철 안은 온통 웃음바다가 됐다. 그는 “아이들은 현실과 TV를 구분 못합니다. 약간 당황스러운 사건들도 많았죠”라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인기는 CF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당시 찍은 CF만 40, 50편에 달한다. 냉장고, 세탁기 등 톱스타의 전담 CF뿐 아니라 빙그레 마이컵, 레이다, 기린 짜라빠빠 등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과 과자 CF까지 섭렵했다.
“경이적인 프로그램이었어요. 어린이뿐 아니라 주부, 직장인들까지도 봤으니까요. 시대가 변했지만 흐름에 관계없이 오래갔으면 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아쉽습니다. 방송국의 입장을 이해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프로그램의 오랜 출연자로서, ‘뽀뽀뽀’를 사랑했던 사람으로서 (프로그램 폐지에) 서운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김병조가 뽀병이에만 머물러 있었던 건 아니다. 아이들에게 그는 뽀병이지만 어른들에겐 시사평론 개그맨으로 기억된다. 그는 콩트 코미디 쇼로 첫 발걸음을 내딛은 ‘일요일 밤의 대행진’에서 인기를 얻으며 앵커로 선발됐다. 명실상부 프로그램의 원톱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지구를 떠나거라’, ‘나가 놀아라’, ‘먼저 인간이 되어라’ 등 수많은 유행어를 제조했다. 대중은 삶의 철학이 담긴 그의 유머에 열광했다. ‘먼저 인간이 되어라’는 장사를 하거나 정치를 하더라도 그 이전에 먼저 인간이 돼야 한다는 메시지를, ‘넌 누구냐’는 옛날 시골에서 잘못하면 어른들이 어느 집안 아이냐고 물어보던 것에서 착안해 부모님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뜻을 담았다.

‘완소’ 뽀병이 김병조에게 ‘뽀뽀뽀’를 묻다
시련의 시간도 있었다. 1987년 당시 여당이었던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주최 측이 준 연설문의 편향성이 문제가 됐다. 주어진 원고를 읽은 것뿐이었지만 시사 개그를 하던 그였기에 사람들의 기대치는 더욱 엄격했다. 시청률 평균 60%에 달했던 ‘일요일 밤의 대행진’이 직격탄을 맞았다. 시청률은 날이 갈수록 떨어졌고, 1988년 ‘일요일 일요일 밤에’로 프로그램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김병조는 MBC에서 SBS으로 이적해 활동했지만 예전의 인기를 되찾을 수는 없었다. 유학자의 집안에서 엄격하게 자란 탓에 야간업소 한 번 나간 적이 없고, CF 제의가 들어와도 꼼꼼하게 따지고 골라서 출연했던 그였기에 세상 사람들의 질타가 더 치명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고향 광주로 내려가 광주방송에 몸을 담았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안온한 삶이었다.
불행처럼 행운도 갑작스레 다가왔다. 어느 날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조선대학교 사회교육원 원장이 김병조에게 강의를 요청한 것이다. 당시에는 한학이 아닌 연극영화 관련 강의였다. 한학을 공부하던 김병조는 연극영화 강의를 하면서 「명심보감」 강의도 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필요로 하는 곳에 간다는 게 저의 신념입니다. 가르치는 건 오랜 꿈이고, 방송 활동 중에도 한학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어느 정도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제겐 공부한 걸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하는 능력도 있었고요. 첫 학기엔 1백 명 정도였던 수강생이 입소문이 나면서 다음 학기엔 6백 명이 됐어요. 아무래도 한학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줘서 인기가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수업 횟수도 많아졌고요. 처음에는 사회교육원에서 평균 60세 이상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이후에는 학부, 대학원 수업도 맡게 됐습니다. 지금은 교육대학원 초대교수로 ‘고전부터 배우는 인생교육’이라는 강의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래봬도 교육 실무에 들어가는 중요 강의지요.”
학교뿐이니라 기업이나 정부에서도 강의 요청이 쉴 새 없이 들어온다. 학교 강의와 함께 중앙공무원교육원 고위관리자 과정에서도 6년째 강의를 하고 있다. 강연자에겐 굉장히 까다로운 곳으로 정평이 나 있는 곳에서 인정을 받은 셈이다. 이젠 17년 차 강의자로 교육에 대한 철학도 확고해졌다.
“저는 일반인 교육에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젊은 세대를 교육하기 위해선 윗세대가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윗세대가 교육을 받지 않으면 젊은 세대 역시 바뀌지 않아요. 더구나 강의에서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방송을 할 때는, 뭐랄까요, 아이디어를 많이 내긴 하지만 제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대본이 있고, 제작자의 입장이 있고, 매체별로 생각이 다르죠. 가끔은 앵무새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강의를 통해 제가 생각하는 부분을 말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싶습니다.”
강의를 하면서 아쉬운 점도 있다. 처음 강의했을 때보다 요즘 사람들은 ‘지족(知足)’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지족은 행복하기 위해서는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옆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제정신’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옆집과 비교하지 마세요. 옆집 아이는 항상 공부를 잘하고, 남의 동네는 다 멋있잖아요. 강북 사람들은 강남과 비교하죠. 그럼 부유한 강남 사람들은 행복할까요? 아니요. 강남 사람들은 뉴욕 사람들과 스스로의 삶을 비교하더라고요.”

1 매일 아침 8시 무렵이면 온 동네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TV 앞에 앉아 ‘뽀뽀뽀’ 주제곡을 따라 부르며 하루를 시작했다. 2 7080 세대의 기억 속 최초이자 최고의 콤비로 남아 있는 뽀병이와 뽀식이. 3 1983년 4월 ‘뽀뽀뽀’ 6백 회를 맞아 출연진과 제작진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 김병조는 아버지에게선 한학을 배웠고, 어머니에게선 유머 감각을 이어받았다. 덕분에 1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교내 행사의 MC로 맹활약하는 ‘엄친아’였다. 그의 끼를 이어받아 딸은 교육자의 길을, 아들은 뮤지컬 배우의 길을 가고 있다.
김병조는 학교에선 교수님이고, 후배들에겐 멘토다. 방송계를 떠난 지는 오래됐지만 그는 개그맨 후배를 챙기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개그맨 김종석, 이원승과 함께 대학로에 개그맨 후배들의 공연을 보러 가곤 한다. 개그맨 지망생들의 극을 보고, 연기를 잘하는 이가 있으면 따로 칭찬해주기도 한다.
“공연을 보러 갔다가 김준현이 연기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연기의 결도 고르고 에너지가 넘치더라고요. 공연을 마친 김준현에게 열심히 하라고, 잘될 거라고 말해줬어요. 힘이 됐을 거라고요? 허허허. 글쎄요. 기억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요즘 인기를 얻은 걸 보니까 마음이 흐뭇하더라고요.”
그를 멘토로 모시는 개그맨들도 많다. 그와 한 번이라도 일을 해본 개그맨들은 그를 선배가 아닌 선생님으로 모시기 일쑤다. 개그맨 김준호도 마찬가지다. 그가 잠시 SBS에 몸담았을 때 아빠와 아들 컨셉트로 김준호과 잠깐 코너를 함께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김준호는 막내였고, 그는 하늘같이 높은 선배였다.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는데도 김준호가 그에게 “나중에 선생님께서 제 결혼식 주례를 서주십시오”라는 부탁을 했다. 이후 김병조는 방송계를 떠났고, 약속도 잊고 있었는데 10년이 지난 후에 김준호는 그를 찾아와 주례를 청했다. 김병조는 “그때까지도 저를 기억하다니 상당히 기뻤습니다”라고 겸손하게 이야기했지만 그가 행동하는 것들이 후배들에게 모범이 된다는 걸 느낄 수 있는 단적인 사례다. 그는 김준호 이외에 염경환, 황기순, 이재포, 현병수 등의 결혼식 주례를 맡으며 이경규와 함께 개그맨 주례계의 양대 산맥으로 자리 잡았다.
“말을 편하게 하라고 했는데도 선생님으로 모시고 싶다면서 항상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후배들이 있습니다. 머쓱하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죠. 함께 방송을 하지 않았는데도 저를 멘토라고 부르는 후배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날 인터뷰 내내 그의 아내와 아들이 김병조의 곁을 지켰다. 아내는 인터뷰를 하는 동안 다기를 꺼내 정성스럽게 차를 냈고, 아들은 조용히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다. 한학자 집안의 풍경이란 이런 거로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김병조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세대 간의 교육은 정말 중요합니다. 제가 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웠듯 저는 아들에게 제가 알고 있는 걸 말해주고 싶어요. 저희 아들은 뮤지컬 배우지만 한학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학문이니까요. 요즘은 아들에게 제가 오랫동안 연구한 「명심보감」의 가르침을 알려주기 위해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대중에게 방송을 하는 사람이니 생활 용어에 저만의 언어로 의역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컴퓨터 작업에 익숙하지 못해 아들이 도와주고 있지요.”
그의 서재 책상 한편에는 「명심보감」을 해석한 노트 여덟 권이 놓여 있었고 노트 위에는 인쇄된 논문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가 종이에 쓰고, 아들이 컴퓨터로 옮겨 담은 문서다. 그가 꿈꾸고 생각하는 교육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뽀병이는 ‘뽀뽀뽀’를 떠났지만 그 사이 김병조는 아들과 함께 우리 사회를 다시 유쾌하고 풍요롭게 할 또 다른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다.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박은혜(프리랜서) ■사진 / 조민정, 경향신문 포토뱅크 ■사진 제공 / 김병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