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삼킨 소년, 훌쩍 자라 배우가 되다! 여진구

시간을 삼킨 소년, 훌쩍 자라 배우가 되다! 여진구

댓글 공유하기
단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아역 배우’라 부르기가 왠지 좀 멋쩍다는 느낌이 든다. 화면 가득 채워진 그의 흔들리는 눈빛이,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순수한 미소가 웬만한 성인 연기자들보다 훨씬 더 강렬했기 때문이다. 최근 데뷔 후 첫 주연을 맡은 영화에서 ‘괴물’ 같은 존재감을 드러낸 그는 더 이상 누군가의 어린 시절이 아닌 온전한 한 사람의 인생을 책임지고 연기할 수 있게 됐다. 다행이다. 그동안 ‘여진구의 시간’을 앞으로 ‘빨리 감기’ 하고 싶어 안달하던 우리는 이제 조금은 느긋해진 마음으로 이 무시무시한 소년의 행보를 지켜보면 되겠다.

열여섯, 괴물 신인의 탄생
시간을 삼킨 소년, 훌쩍 자라 배우가 되다! 여진구

시간을 삼킨 소년, 훌쩍 자라 배우가 되다! 여진구

올해 열여섯 살인 배우 여진구는 나이답지 않게 작품을 장악하는 막강한 힘이 있다. 지난해 MBC-TV 드라마 ‘해를 품은 달’과 ‘보고 싶다’에서 각각 남자 주인공 김수현과 박유천의 어린 시절을 연기했을 때가 그랬다. 그의 연기는 여성 시청자들의 마음을 뒤흔들었고, 김수현과 박유천까지 긴장하게 만들었다.

지난달 개봉된 영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이하 ‘화이’)’에서도 그렇다. 처음 이 영화는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감독이 10년 만에 내놓은 작품이란 점에서 기대를 모았다. 그리고 점차 주인공 역에 배우 김윤석이 캐스팅된 것과 조진웅, 장현성, 김성균의 합류 사실이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정작 영화가 개봉한 뒤에는 여진구가 단연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관객들은 ‘김윤석의 연기에 눌리지 않는 여진구의 괴력’, ‘이 영화의 최대 수확은 여진구’ 등의 상찬을 쏟아내며 그에게 열광하고 있다.

이번 영화로 더 이상 성인 배우의 아역이 아니라 당당한 주연배우로서의 역량을 인정받게 된 여진구는 함께 출연한 쟁쟁한 배우들 중 누구에게도 눌리지 않는 연기력으로 스크린을 압도한다. 이런 여진구를 두고 김윤석은 “작은 거인”이라며 칭찬했다. 충무로에 여진구라는 또 하나의 괴물 신인이 탄생한 것이다.

주인공이라도 청소년이라 영화를 못 봐요
인터뷰를 위해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여진구에게서 영화를 통해 갖고 있던 ‘연기 괴물’의 느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뭐가 마시고 싶냐” 묻자, 그가 주문한 음료는 바로 ‘딸기 요거트 스무디’. 그동안 늘 담배를 피우며 연기와 인생에 대해 논하는 중년 배우나 끊임없이 커피를 리필해 마시며 준비한 대답을 척척 내놓는 성년 배우들과 만나온 터라 마주 앉은 이의 ‘딸기 요거트 스무디’라는 선택 자체가 신선했다. 정작 자신은 나이 때문에 청소년 관람 불가인 ‘화이’를 보지 못했다며 웃을 때는 딱 그 또래 소년의 모습이었다. 인터뷰 때문에 학교를 못 갔다고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죄책감까지 들 정도였다. 해맑은 얼굴의 이 소년을 보고 있자니 도대체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와 안방극장과 스크린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인지 잘 믿어지지가 않았다.

시간을 삼킨 소년, 훌쩍 자라 배우가 되다! 여진구

시간을 삼킨 소년, 훌쩍 자라 배우가 되다! 여진구

여진구는 영화 ‘화이’에서 김윤석이 이끄는 범죄 조직에 납치돼 그들을 아버지로 여기며 자라는 소년 화이 역을 맡았다. 화이는 ‘5명의 아버지들’에게 이끌려 살인 임무에 나섰다가 성장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되고, 아버지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겨눈다. 풋풋한 사랑을 꿈꾸는 순수한 소년에서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를 향해 총구를 들이대야만 하는, 놀라움과 배신감 등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는 복잡한 연기를 해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잘해내긴 했지만, 처음엔 여진구도 이런 복잡함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사실 처음에는 제가 맡은 화이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대본을 읽을 때마다 매번 다르게 느껴졌거든요. 감독님과의 거듭된 대화를 통해서 무엇보다 화이가 참 안타까운 아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악의 무리에서 충분히 악의 지배를 받을 수도 있었는데, 아주 얇지만 올곧은 가지를 지켜낸 아이라 이해하고 연기했어요.”

감정 연기 중 그에게 가장 어려웠던 것은 의외로 엄마와 대면하는 장면이었다.
“병원에 누워 있는 친엄마에게 손수건을 쥐어주면서 ‘엄마’라고 부르는 장면이거든요. 유괴된 후 5명의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으니 화이는 엄마라는 느낌을 잘 모르잖아요. 매우 어색하게 불러야 했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제가 엄마랑 촬영 현장에 다녔거든요. 서툴게 대사를 해야 하는데 우리 엄마 부르듯이 익숙하게 ‘엄마’라고 하는 바람에 여러 번 NG가 났죠.”
반면, 액션 연기는 아주 재밌었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많은 분들이 사격이나 격투 같은 것은 여러 기술을 익혀야 해서 어렵지 않았냐고 물으시는데, 사실 액션은 정말 재밌었어요. 제가 워낙 운동을 좋아하고 움직이는 걸 즐기거든요. 액션은 남자들의 로망이잖아요. 그런 로망을 이루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오히려 힘이 났어요.”

아쉬운 점도 있다. 극 안에서 총을 다루거나 운전도 섭렵해야 했는데, 아직 경험으로 체득할 수 없는 연기가 많아서 간접 경험에 의존해야만 했다. 장준환 감독이 참고가 될 만한 작품을 소개해주었지만, 대부분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이라 볼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감독이 중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보여주었고, ‘대부 시리즈’의 오열 연기 등을 통해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꽃미남? 꽃보다, 바위 같은 남자
여진구는 영화 속 자신의 두 모습을 정확하게 구분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열일곱 살 학생처럼 보이려고 노력했다”라는 그는 “교복을 입었을 때는 실제 제 모습이 많이 배어 나왔을 것이고, 아버지들에 대한 분노에 휩싸였을 때는 숨겨뒀던 에너지를 폭발시키려고 했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그는 평소 모습과 연기할 때의 구분도 명확하다. 일부러 남녀공학이 아닌 남자고등학교를 선택했다는 그는 남자들만의 세계가 주는 특유의 분위기와 친구들 간의 끈끈한 우정을 느끼고 있다고 자랑했다. 자신들만의 세상에 푹 빠져 있는, 딱 열여섯 살 중학생 같아 보였다.

“중학교는 남녀공학을 다녔거든요. 그래서 고등학교는 꼭 남학교였으면 했어요. 끈끈한 우정과 의리로 똘똘 뭉친 남자들만의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었어요. 실제 남고(남강고)에 다녀보니 그런 게 넘치더라고요. 남자들끼리는 서로 툴툴거리면서도 챙겨주는데, 그런 모습이 감동이에요. 영화 촬영을 하는 동안 친구들이 응원을 많이 해줘서 시사회에 초청하고 싶었는데, 나이 때문에 그러질 못해 무척 미안하고 아쉬워요.”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어서인지 ‘누나 팬, 이모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꽃미남’이란 말이 나오자 유독 목소리가 커지고 말이 빨라졌다. 이유는 ‘꽃’이라는 여성적인 단어 때문이었다.

“아휴, 전 꽃미남은 정말 아니에요. 물론 꽃미남이 좋은 말인 건 알지만 제가 그런 스타일은 아니잖아요. 얼굴도 까무잡잡하고요. 꽃보다는 오히려 돌이나 바위 같은 단단한 느낌이 나지 않나요? 굳이 표현하자면 바위 같은 남자에 가까운 것 같아요.”

영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에서 여진구는 선과 악의 경계에 서 있는 소년의 모습을 표현해냈다.

영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에서 여진구는 선과 악의 경계에 서 있는 소년의 모습을 표현해냈다.

뭇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이나 ‘보고 싶다’에서 아름다운 사랑의 감정을 연기할 때도 정작 본인은 어색하고 곤혹스러웠다고 한다. 특히 온 국민의 가슴을 울린 ‘해를 품은 달’의 명대사는 연기하기 무척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잊어달라 하였느냐, 잊어주길 바라느냐, 미안하다. 잊으려 하였으나 너를 잊지 못하였다’라는 대사를 할 땐 정말이지 무척이나 민망했어요. 상대역인 (김)유정이가 저를 바라보고 있어서 더 힘들었어요. 유정이는 눈이 굉장히 크잖아요. 그런 큰 눈으로 보고 있으니 연기하기가 무척 어려운 거예요. 차라리 날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연기를 마치고 모니터링할 때도 얼마나 오글거리는지…. 제가 저한테 ‘어우 쟤 왜 저래’, ‘말도 안 돼’라고 말하면서 봤다니까요(웃음).”

열여섯 소년은 아직 연애 경험이 없다. 경험이 없어서 멜로 연기는 어렵다며 한동안 열심히 항변을 했다. TV에 나오는 걸 그룹들에도 특별히 관심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멜로 연기 또한 어색함 없이 잘해낸다.
요즘 여진구는 김병욱 감독의 tvN 시트콤 ‘감자별 2013QR3’에서 일곱 살 누나인 하연수와 호흡을 맞추고 있다. 최근에는 능숙한 키스신으로 크게 화제가 됐다. 다행히 연기는 잘해냈지만,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 하연수와의 첫 만남이 그리 매끄럽지는 않았다고 했다.

“저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잘 다가가지 못하는 편인데, (하)연수 누나는 아예 그런 게 없더라고요. 만나자마자 ‘우리 편하게 반말하자’라고 하는 거예요. 반말 못하면 바보라고…. 친해지고 나서 말을 놓으라고 해도 아마 1주일은 고민했을 텐데 첫날부터 그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어색하게 반말하느라 마치 영화 ‘건축학 개론’의 한 장면 같았어요. 그래도 곧바로 말을 놓은 덕분인지 요새는 많이 편해졌어요.”

사이코패스 끔찍한 악역, 만나고 싶다
시간을 삼킨 소년, 훌쩍 자라 배우가 되다! 여진구

시간을 삼킨 소년, 훌쩍 자라 배우가 되다! 여진구

올해 고등학생이 된 여진구의 최대 고민은 단연 성적이다. 얼마 전 중간고사를 치른 그는 “고등학교에 간 후 (성적이) 망했다”라며 진심으로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중학교 때는 당당하게 중상위권이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고등학교 올라와서는 나락까지 떨어졌어요. 하위권이라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예요. 성적을 보고 심하게 충격받아서 등수는 보지도 못했어요. 아직 학생이니까 촬영장에서 많은 분들이 제가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시는데, 그 시간에 아무리 열심히 해도 친구들을 쉽게 따라갈 수가 없어요. 학생은 공부가 본업인데 성적이 잘 안 나와서 정말 속상해요.”

투덜거리는 와중에도 호소력 띤 중저음 목소리가 귀에 쏙쏙 들어온다고 칭찬을 하자 “목소리는 그만 굵어졌으면 좋겠다”라면서 웃었다. 변성기를 거치며 지금의 중저음 목소리가 됐는데 한때는 콤플렉스로 생각하기도 했단다. 주변에서 좋은 목소리라거나 연기할 때 장점이 될 거라고 얘기해줘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는데, 그래도 평상시 상대방이 자신의 목소리를 잘 못 알아들어서 소통이 안 될 정도는 아니었으면 한단다. 대신, 키는 좀 ‘막판 스퍼트’를 내서 쑥쑥 커줬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고.

무엇보다 배우로서의 욕심은 명확하다. 그가 가장 하고 싶은 연기는 의외로 악역이다. 여진구는 “병적인 악함을 가지고 있는 사이코패스를 꼭 해보고 싶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살인을 한다거나 남을 해치는 건 실생활에서는 불가능한 거잖아요. 제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연기로 보여드리고 싶어요. 얼마나 악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에도 도전하고픈 욕심이 있죠.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꼭 해보려고 해요.”

실생활에서의 꿈은 뭘까. 가까운 미래, 성인이 되면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대답은 여러 가지가 나왔다. 자신이 출연한 영화 ‘화이’도 보고 싶고, 운전면허도 따고 싶고, 행선지 없이 여행도 떠나보고 싶다며 줄줄 말을 이었다. 그러나 가장 하고 싶은 건 따로 있단다.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사면서 당당하게 주민등록증을 내밀고 싶어요. 굳이 보여달라고 하지 않아도 제가 자랑스럽게 먼저 보여주고 말없이 사라지는 거요. 그런 게 해보고 싶은데요?”

이렇게 말한 여진구는 현실에 순응하듯 다시 딸기 요거트 스무디를 마셨다.

배우 김윤석이 함께 연기한 여진구를 ‘작은 거인’이라 표현한 것은, 아마도 예상 밖의 에너지를 뿜어내며 괴물 같은 연기력을 보여줬기 때문일 듯싶다. 예상 밖이라는 의미는 말갛고 순수한 고등학생의 느낌과 바위같이 단단한 남성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는 것, 또 순수한 사랑도 잘 표현하면서 복수심에 휩싸인 괴물 같은 소년도 보여줄 수 있는 그의 무궁무진함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게다가 여진구는 이제 겨우 만 열여섯이다. 그의 미래가 궁금해지는 이유다. 같은 이유로 여진구가 언젠가는 꼭 도전하고 싶다는 악역 연기도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기획 / 이연우 기자 ■글 / 박은경(경향신문 대중문화부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사진 제공 / 쇼박스

화제의 추천 정보

    Ladies' Exclusive

    Ladies' Exclusive
    TOP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