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하다. 콧소리가 매력적이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날씬하고 키가 크다’. 과연 어떤 배우가 실제로 만나봤을 때 이런 모습일까. 여러 후보자를 꼽을 수 있겠지만, 배우 김선아가 딱 들어맞았다. 잘 웃어서 상대를 기분 좋게 만들었고, 비음이 만들어낸 목소리의 고저가 귀를 잡아당겼다. 입고 있는 니트 위로 드러난 쇄골에 자꾸 눈이 갔다. 하지만 김선아는 여러모로 이런 외모를 무기로 사용하지 않고 ‘연기 도구’로 쓰는 배우다.
이제는 지겨우리만큼 자주 언급됐던 이야기이긴 하지만, 김선아(38)는 2005년 방영된 MBC-TV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통통한 노처녀 김삼순을 연기하기 위해 체중을 6kg 이상 불려 화제가 됐었다. 시한부 환자 역할을 맡았던 SBS-TV 드라마 ‘여인의 향기(2011)’에서는 다시 몸무게를 14kg이나 줄였다. 그리고 지난달 개봉된 영화 ‘더 파이브’에서는 가족을 죽인 연쇄살인마에게 복수하는 여주인공 역할을 위해 파마를 다섯 번이나 해서 머릿결을 일부러 상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복구가 안 되면 그냥 가발을 쓰고 다니자는 마음이었다”라는 김선아는 원래 연기할 때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요즘 그녀는 주연을 맡은 영화 ‘더 파이브’가 지난 11월 14일 개봉한 이후, 홍보에 한창이다. 데뷔 후 처음으로 도전한 액션 스릴러 작품이라 더욱 애착이 크다. 여배우로서 심하다 싶을 정도로 외모적인 부분은 거의 내려놓고, 대신 온몸을 바쳤다.
“말조차 하기 싫어서 ‘네, 아니오’로만 대답하는 ‘은아’의 삶은 어떨까요. 영화에서 제가 연기한 은아의 집 화장실에는 아마 빨랫비누 하나 정도 있을 거예요. 세숫비누나 샴푸는 없겠죠. 복수만이 인생의 목표이니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요. 휠체어에 앉아서 생활하고, 즉석 식품을 데워 겨우 끼니나 때우고, 남편의 낡은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인데 외모에 무슨 신경을 쓰겠어요. 아무렇게나 방치한 머리카락은 어쩌다 한번 빨랫비누로 겨우 감을 것 같았어요. 파마를 여러 번 해서 바스러질 것 같은 거친 머릿결을 만든 후에 면도칼로 머리카락을 막 잘라냈죠.”
김선아는 영화에는 표현되지 않은 배역의 상황을 아주 상세하게 묘사했다. 상상 속으로 펼쳐진 그림을 연기에 응축시켜 보여주는 듯싶었다. 영화에서는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는 장면도,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아주 강력하고 자세하게 그려졌다.
김선아가 맡은 ‘더 파이브’의 은아는 연쇄살인마에게 남편과 딸을 잃고 하반신 마비가 된다. 그때부터 오직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여자는 각각 장기 이식 수술을 해야만 하는 가족을 둔 흥신소 직원, 열쇠 수리공, 조직폭력배 출신 대리운전사, 외과 의사를 모은다. 그리고 이들에게 각각 침투, 추적, 체포, 수술을 맡기고 복수를 결행한다. 성공하면 이들에게 자신의 장기를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결국 스스로의 목숨을 걸고 복수를 하는 셈이다. 그만큼 절실하고 처절하다.
워낙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물인데다 평소 그녀의 유쾌한 모습과는 배치되는 역할이라 언뜻 연결되지가 않는다. 아마 김선아도 그랬을지 모른다. 미혼의 여배우가 거리낄 수 있는 딸을 둔 학부형, 게다가 복수의 중심에 선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은아를 선택한 이유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성격 때문이다.
“배우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는 거잖아요. 당연히 ‘내가 만약 저런 상황에 맞닥뜨린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겠죠. 그런데 전 솔직히 그런 생각까지 할 틈이 없어요. 이제까지 제가 시나리오를 읽다가 좋아서 출연을 결정한 작품은 읽는 동시에 그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경우였어요. ‘더 파이브’ 시나리오를 보면서 이미 저는 휠체어를 타고 은아가 돼 있었고, 범인을 쫓는 장면에선 숨을 헉헉거렸죠. 이렇게 읽는 시나리오는 연기할 때도 행복했고 결과도 좋았어요.”
비슷한 예로 드라마 ‘여인의 향기’를 꼽았다. ‘여인의 향기’는 시놉시스(줄거리나 개요를 적은 것)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작가를 만났다고 했다.
“시놉시스도 없었지만 ‘김선아씨를 보고 썼다’라는 작가 분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어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결행한다는 내용은 어떻게 보면 무척 어두운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미 제 머릿속으로는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을 적은 목록)’를 쓰고 있었고, 작가에게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런 노래를 부르는 건 어떠냐’라는 의견도 내고 말이죠.”
시나리오의 힘을 믿는 김선아는 아직 ‘더 파이브’의 원작 웹툰을 보지 않았다고 했다.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볼 생각이 없어졌다고. 인터뷰 자리에서 원작과 비교하는 질문을 많이 받지만 원작과 다른 점을 감독에게 물어본 게 전부다.
몸을 사리지 않는 액션 열정
일단 믿음으로 결정을 내린 후에는 앞만 보고 달리는 김선아는 이번에도 몸을 혹사시켰다. 이전에도 역할에 푹 빠져 힘들고 고통스러운 연기를 자처했던 그녀다. 온갖 부상에도 끝까지 맨몸으로 흙바닥과 계단을 구르며 촬영을 마쳤다.
범인과의 격투신 등 액션이 많아 촬영 중 오른팔이 골절되는 부상을 당했을 때도 촬영을 계속 진행한 그녀다. 결국 제대로 완쾌되지 않아 오른팔을 굽히거나 숟가락을 드는 일조차 버거울 정도다. 부상에 대해 묻자 부러 특유의 유쾌함을 섞어 대답했다.
“들여다보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 이슈가 될까봐 말을 못하고 있어요(웃음). 지금도 부어서 팔을 잘 못 굽혀요. 영화를 자세히 보면 팔에 깁스를 하고 찍은 장면도 있다니까요. 세트 촬영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깁스를 하고 찍을 수밖에 없었어요. 감정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그냥 찍는 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옷 밖으로 자꾸 깁스한 부분이 보여서 그걸 절반 정도 잘라내고 찍었죠. 지금도 팔이 좀 어긋나 있는데, 기자 분들이 이거 보시면 기사를 아주 잘 써줄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웃음).”
기자의 걱정과 칭찬 섞인 말이 계속되자 쑥스러움을 농담으로 무마하려는 듯 웃더니 “오른손을 다쳐 생활하는 데 많이 불편했다”라고 덧붙인다. 한쪽 팔만 쓰다 보니 왼팔에도 무리가 갔는데, 또 몸이 아프니까 예민해져서 짜증도 늘었다고 말한다. 그러다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것 같으면 “여름엔 간지러운데 긁지 못하니까 미치겠더라”라면서 경쾌하게 웃었다.
그녀가 맡은 역할인 은아는 하반신 마비 후 휠체어에서 생활하는 인물. 수동과 자동 휠체어를 따로 나누어 연습을 했다. 휠체어의 등받이가 많이 올라오면 인물이 나약하게 보일까봐 영화에 나오는 휠체어의 등받이를 낮춰 특별 제작했다고 한다. 그녀는 “기댈 데는 없는데 상반신을 꼿꼿하게 힘줘 세워야 하니까 엉덩이까지 아팠다”라면서 또 크게 웃었다. 역시 김선아다웠다.
타인의 인생을 살아내는 고통 또한 배우의 숙명
외형의 연기만 추구한다면 그 또한 이상적인 배우는 아닐 것이다. 김선아는 외모의 변화와 내면의 감정을 일치시켜가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연기가 무척 힘든 작업이지만 그는 이런 고통을 다른 인생을 보여줘야 하는 배우의 숙명처럼 여겼다.
지난 10년 동안 김선아가 출연한 작품과 배역만 살펴봐도 그녀의 연기관이 금방 드러난다. 김선아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는 촌스러운 이름에 뚱뚱한 외모 때문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지만 전문 직업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노처녀 ‘김삼순’으로 신데렐라 스토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김삼순으로 신드롬을 일으킨 후 그녀의 드라마 복귀작은 문화재사범 단속반과 도굴꾼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다룬 ‘밤이면 밤마다’였다.
이후 ‘시티홀’에서는 고졸 출신의 10급 공무원이 시장이 되는 기적을 보여주었으며, ‘여인의 향기’에서는 시한부 판정을 받고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이뤄가다 사랑을 찾기도 했다. 2012년에는 구두 디자이너로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 미혼모의 삶을 선택하는 ‘아이두 아이두’로 도전을 이어갔다.
드라마에서 다양한 배역을 맡으며 변신을 해왔지만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편이었다면, 대신 영화에서는 장르의 진폭이 컸다. 남자친구들과의 은밀한 이야기를 기록한 섹시 코미디물 ‘S 다이어리’, 고등학생으로 위장한 여형사의 이야기를 담은 코믹 액션물 ‘잠복근무’ 그리고 사고뭉치 야구선수 남편을 둔 아내로 분한 드라마 ‘투혼’으로 필모그래피를 채워갔다.
김선아는 매번 다른 사람으로, 또 새로운 내용으로 무장한 다른 장르에 도전하면서 자기만의 색깔을 찾아왔다. 때로는 몸이 부서지고 여배우에겐 더없이 소중한 머릿결이 상해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린다. 그러한 연기 도전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가장 큰 변신을 한 건 같은 해에 액션 영화 ‘예스터데이’에서 여전사를 하고 ‘몽정기’로 성에 눈뜬 남자 중학생들의 교생 역을 맡았을 때였어요. 전 사실 몽정기가 뭔지도 몰랐거든요. 이미지가 크게 변하니까 주변에서 다들 걱정했는데, 전 하나도 걱정되지 않았어요. 그것과 비교하면 요즘 변신은 변신도 아니죠. 도전과 모험이 아니라 그냥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예요. 연기는 변신이나 모험이라기보다 배워가는 과정이죠. 그래서 배우는 끊임없이 배우는 거고요.”
배우(俳優)에 쓰는 광대 배(俳)는 사람 인(人)과 아닐 비(非)가 결합돼 있다. 아마도 자신이라는 인간을 덜어내고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배우의 숙명을 담고 있는 듯하다. 배우 김선아는 숙명에 순응하면서 때로는 외모를 포기한 채 작품 속 인물이 된다.
다른 사람으로 살다가 현실로 돌아오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김선아는 이번 촬영을 끝내고 한동안 쉽게 잠들지 못했다고 한다. 복수를 위해 장기를 내놓는 여자를 쉽게 떠나보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작년 초에 시나리오를 받았으니 거의 2년간 복수에 빠져 있었다”라는 그녀는 “촬영을 하면서 느낀 긴장과 감정이 개봉 즈음 홍보 활동을 하며 고스란히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촬영이 끝나고 바로 개봉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라고 고통스러운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토록 매번 반복되는 고통에도 김선아는 지금 새로운 시나리오들을 읽고 있다. 아마 그중에서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장면이 그려지는 작품을 만난다면 주저 없이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선택한 후에는 몸을 던져 그 배역에게 주어진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계속해서 그녀의 선택을 기다리고, 기대하고,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 관객과 시청자에게는 큰 선물이다.
■기획 / 이연우 기자 ■글 / 박은경(경향신문 대중문화부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