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당신을 위한 세기의 러브 스토리

겨울밤, 당신을 위한 세기의 러브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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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영원한 인류의 화두다. 하물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연인들의 이야기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눈부신 해피엔딩, 때로는 비극이 된 영화 같은 러브 스토리. 애정과 증오 사이를 오갔던 세계적 연인들의 매혹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 미국 최고 지식인과 금발 미녀의 만남
아서 밀러와 마릴린 먼로
1950년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와 극작가 아서 밀러가 뉴욕에서 만났던 일은 두 세계의 충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먼로보다 아홉 살 많은 밀러는 이미 10여 년 전에 결혼해 두 자녀를 둔 가장이었으며 미국을 대표하는 지식인이었다. 당시는 그가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대중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면서 정치 활동도 열심히 하는 좌파 엘리트에 속했다.

1950년대에 젯셋족의 삶을 살았던 밀러와 먼로 부부(에버렛 콜렉션).

1950년대에 젯셋족의 삶을 살았던 밀러와 먼로 부부(에버렛 콜렉션).

반면, 이제 겨우 20대 초반이던 먼로는 예쁘고 금발인데다 매우 섹시한 여성이었지만, 인지도가 별로 없는 할리우드 여배우에 ‘불과’ 했다.그래서 밀러를 처음 보았을 때 먼로는 열등감에 휩싸였다. 그녀는 생각했다. ‘저 사람도 다른 남자들처럼 날 보고 예쁘다고는 하겠지. 하지만 평생 가도 나 같은 여자와는 어울리려고는 않을 거야.’ 하지만 밀러의 생각은 이와 달랐다. ‘저렇게 매력적인 여자는 나처럼 나이 들고, 비쩍 마르고, 지루하기 그지없는 남자와는 절대 사귀려 들지 않을 거야.’

부모 없이 여러 고아원과 입양 가정을 오가며 자랐던 먼로는 무의식적으로 아버지 같은 남자, 자기를 보호해줄 남자를 찾고 있었고, 아서 밀러는 그 조건에 부합한 적임자였다. 밀러로서는 먼로의 연약함과 슬픔 그리고 자신감이 결여된 모습이 그의 심금을 울리는 듯했다. 일 때문에 뉴욕에 머물던 밀러와 먼로는 이 몇 주 동안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먼로는 그 유명한 남자가 그녀를 단순한 잠자리 상대로만 생각하지 않고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을 진심으로 즐긴다는 데 대해 다소 놀랐다. 지금까지 그 어떤 남자도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밀러는 먼로의 보호자가 돼주었고 공식석상에도 아무 거리낌 없이 그녀를 데리고 다녔지만, 그 어떤 성적인 접촉도 시도하지 않았다. 유부남으로서 아내에 대한 신의를 지키려고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먼로가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둘 다였을 것이다. 어쨌든 밀러는 뉴욕 체류 기간이 끝난 뒤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갔고, 먼로와의 사이에는 그 어떤 극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머릿속에는 서로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밀러 부부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고, 그 사이 디마지오와 결혼한 먼로도 그 결혼이 크나큰 실수였음을 깨닫고는 9개월 만에 갈라서게 됐다. 이로써 둘 다 싱글이 된 밀러와 먼로는 1955년에 뉴욕에서 재회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진짜 사랑을 시작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순수하고 깊은 사랑은 아니었다. 자신감이 부족했던 밀러는 굉장한 성적 매력을 발산하며 그에게 보호받고, 의지하고자 했던 먼로를 사랑한다고 믿었다. 반대로 능동적이고 진정한 사랑을 할 줄 몰랐던 먼로는 밀러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존경스럽고 든든한 남자로부터 얻을 수 있는 확신감을 사랑했다. 두 사람은 곧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됐지만 이미 둘의 관계는 멈출 수 없는 상황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1956년 6월 29일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아마도 이들은 이때 이미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을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밀러와 먼로는 과감하게 앞길을 헤쳐 나갔다. 그녀는 아이를 간절히 원했으며 아이가 생기면 배우를 그만둘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도, 부부생활도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좋지 않은 부부관계와 두 번의 유산으로 인한 끔찍한 고통, 직업적인 자기 회의는 먼로를 병들게 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녀는 밀러와의 결혼생활 중 거의 내내 심리 치료를 받았으며, 점점 더 약과 술에 의지하게 됐다. 1961년 11월 밀러와 먼로는 결국 합의하에 이혼했다. 유대교 풍습대로 서로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채, 이로써 두뇌와 육체의 결합은 깨져버렸다. 불과 몇 주 후 아서 밀러는 오스트리아의 사진작가인 잉게 모라스와 결혼했고, 이들은 2002년 잉게 모라스가 숨을 거둘 때까지 40년 동안 함께했다. 마릴린 먼로는 아서 밀러와 이혼한 지 6개월 만인 1962년 8월 5일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녀의 나이 겨우 서른여섯에 불과했다. 조촐하게 열린 그녀의 장례식에는 밀러도 초대됐지만, 그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 그녀는 정말 ‘마녀’였을까?
존 레논과 오노 요코
요즘으로 치면 스토킹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1966년 서른세 살의 일본 출신 전위예술가 오노 요코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자신의 전시회에서 당시 세계 최정상의 록 밴드 비틀스의 ‘창조적 두뇌’라 불리던 스물다섯의 슈퍼스타 존 레논을 만난 이래로 계속 뒤를 쫓아다녔다. 끊임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고 장문의 편지를 썼으며, 궂은 날씨에도 다른 팬들과 함께 그가 사는 빌라 앞에서 죽치고 기다리기도 했다. 그녀는 자기가 가진 모든 집요함을 동원해 그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암스테르담에서 베드인 시위를 하고 있는 존 레논과 오노 요코(1969, Wikimedia Commons).

암스테르담에서 베드인 시위를 하고 있는 존 레논과 오노 요코(1969, Wikimedia Commons).

반면에 존에게 오노는 이름 모를 팬들 중 한 명에 불과했다. 다만 존이 파괴적인 유머 감각을 지닌 오노와 그녀의 아방가르드하고 규모가 큰 플럭서스 예술 작품들에 매혹됐던 건 사실이다. 만일 그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매일같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여성들에게 구애를 받는 입장이 아니었다면 좀 더 빨리 오노의 집요함에 굴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당시 오노 역시 결혼한 상태였다.

그러던 1968년 5월 존 레논의 아내 신시아가 인도로 여행을 떠났을 때 결국 존은 그녀를 집 안으로 들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첫날밤을 보냈고, 바로 다음날 아침 존은 친구에게 오노 요코와 함께 살 집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제 두 사람의 운명의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로부터 몇 달 지나지 않아 존과 오노 모두 이혼했고, 1969년 3월 20일 지브롤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오노를 영혼의 동반자라 여겼던 존은 그 이후 그녀와 함께 난해한 플럭서스 프로젝트와 실험적인 음악 등의 예술 활동을 펼쳤고, 다양한 정치적 운동에 동참했다. 그러는 와중에 이들은 점차 자신들이 사랑에 빠졌을 뿐 아니라 인생은 물론 예술적, 정치적 관점까지 함께 나눌 만큼 서로 잘 맞는, 서로에게 속할 수밖에 없는 사이임을 깨닫게 됐다. 그리고 이내 이들은 혼자서는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을 정도로 모든 걸 함께하는 사이가 돼 지극한 행복을 누린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행복했을지 몰라도 비틀스의 다른 멤버들과 그들의 수많은 팬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이 볼 때 오노는 존과 다른 멤버들의 사이를 갈라놓은 장본인이었다. 이러한 비난 앞에 존이 오노를 만나기 전에 이미 밴드에서 탈퇴하려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 1970년 4월 10일 비틀스의 해체를 기정사실화한 것은 존이 아니라 폴 매카트니였다는 사실은 가볍게 묵살돼버렸다. 존을 제외한 비틀스 멤버들과 팬들에게 오노는 비틀스의 해체를 야기한 ‘마녀’나 다름없었다. 존과 오노는 쏟아지는 비난 속에서 지옥과 같은 경험을 해야만 했다. 결국 1971년 이들은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그 이후에도 술과 마약 그리고 존의 외도와 같은 문제로 역시 힘든 시기를 겪었다. 1973년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오노는 그들이 함께 살던 다코타빌딩의 호화로운 집에서 존을 쫓아내버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상대 없이는 못 산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1975년 1월 재회하게 됐다. 훗날 존은 오노와 떨어져 지낸 15개월이라는 기간을 ‘잃어버린 주말’이라고 표현했다.

얼마 후 오노는 아이를 가졌고, 존의 서른다섯 번째 생일인 1975년 10월 9일에 두 사람의 아들 션 오노 레논이 태어났다. 아들의 탄생은 존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그는 5년 가까이 음악을 비롯해 공식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가장이자 아버지로서의 역할에 충실했고 심지어 그것을 즐겼다.

1980년 드디어 컴백을 결심한 존과 오노는 공동 앨범을 제작하기로 한다. 그러나 그러한 계획들은 한 정신이상자의 출현으로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해 12월 8일 마크 채프먼이라는 남자가 다코타빌딩을 나오는 존에게 LP판을 내밀며 사인을 요청했다. 그리고 얼마 후 마크 채프먼은 귀가하던 존에게 이유 없이 총을 쐈고, 존은 마흔 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의 죽음은 음악사적으로 위대한 삶, 위대한 사랑의 운명적인 최후로 기록됐다.

# 눈부신 대통령 부부
존 F. 케네디와 재클린 케네디

1952년 5월 서른네 살의 미국 국회의원 존 F. 케네디와 스물두 살의 사진기자 재클린 부비에는 한 디너파티에서 처음 만났다. 이 두 사람이 첫눈에 사랑에 빠지지 않았던 건 분명하다. 사실 이들이 진심으로 서로를 깊이 사랑했는가 하는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존 F. 케네디는 부유하고 잘생긴 데다 야심 있는 남자였다. 재클린과 만났을 당시 그는 미국 대선 출마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먼저 매사추세츠 주의 상원의원직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고서는 절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그에게는 영부인이 되기에 적합한 여자가 필요했다. 그보다 어리고, 좋은 집안 출신에,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교양 있는 여자 말이다. 그런데 이런 조건에 딱 맞는 여자가 나타났으니, 바로 재클린이었다. 그녀는 귀족의 피가 흐르는 교양 있는 상류층 출신으로 예의범절을 몸소 실천하며 자랐다. 최고의 사립학교에 다녔고,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으며, 몇 학기는 소르본대학교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사실 사진기자라는 직업은 보여주기 용도일 뿐 재클린은 자신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다른 20대 초반의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남자를 찾고 있었다.

결혼식 날 부케를 들고 있는 재클린 케네디(1953ⓒToni Frissell, Wikimedia Commons).

결혼식 날 부케를 들고 있는 재클린 케네디(1953ⓒToni Frissell, Wikimedia Commons).

두 사람은 만난 지 1년 정도 지난 1953년 6월 약혼했고 그로부터 3개월 후 결혼식을 올렸다. 지금 보면 이는 사랑으로 맺어진 결혼이라기보다 다분히 타산적인 결혼임이 분명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 점을 보지 못했고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존과 재클린이 워낙 연기에 능했던 데다 누가 봐도 아름다운 커플이었기 때문이다. 젊은 상원의원과 그의 아름다운 아내는 곧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됐다.

존은 결혼 후에도 다른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그중에는 지금까지도 확실치는 않으나 마릴린 먼로와 만났다는 설도 있다. 그럼에도 재클린은 태연하게 반응했다. 아마 전부터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 예상했을 것이다. 존이 1960년 대통령 선거 유세 때 그의 매력적인 아내와 완벽한 가정을 충분히 이용했다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바로 이것 때문에 그가 대선에서 승리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1961년 이들은 마침내 목표를 이뤘다. 존은 미국의 대통령이 되고 재클린은 영부인이 된 것이다. 재클린은 곧 두 가지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그중 하나는 백악관을 싹 청소한 뒤 품위 있으면서도 화려한 모습으로 새롭게 꾸민 것이다. 백악관의 약 1백50개나 되는 방을 꾸미는 데 돈을 물 쓰듯 썼던 그녀의 행동을, 남편의 바람기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 하나는 그 시대 여성들의 스타일 아이콘이 되고자 노력한 것이다. 그녀는 1960년 이미 ‘세계에서 가장 옷을 잘 입는 여성’으로 꼽혔으며 완벽하게 재단된 의상과 필박스 모자를 조합한 영부인 패션으로 유행을 주도했다.

1963년 11월 22일 그녀가 남편과 함께 댈러스에서 오픈 리무진 뒷좌석에 앉아 선거 유세 퍼레이드를 하는 중이었다. 사람들에게 친절한 미소로 인사하던 중 갑자기 여러 번의 총성이 울려 퍼졌고 총알은 대통령의 머리에 박혔다. 재클린은 극도의 패닉 상태에 빠졌지만 죽어가는 남편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병원으로 가는 내내 피와 떨어져 나온 살점들로 범벅이 된 그의 머리를 받치고 있었다. 이렇게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살해당했고, 이와 동시에 꿈의 커플로 불렸던 대통령 부부의 눈부신 결혼생활도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이했다.

재클린은 총격이 있은 지 5년 뒤 그리스의 해운업자인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와 재혼했다. 이들의 결혼은 죽은 존 F. 케네디와의 관계를 ‘모독하는’ 것으로 간주됐고 미국인들은 재클린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비록 재클린은 1975년 오나시스가 세상을 떠난 뒤 미국으로 돌아와 죽기 전까지 20년 동안 미국인들의 호감을 되찾긴 했지만, 좋지 않은 이미지를 완전히 씻어낼 수는 없었다. 존 F. 케네디와 재클린 케네디는 미국인들이 동경하는 대통령 부부의 전형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던, 실로 눈부신 커플이었다. 그랬던 케네디 부부에게서 느낀 신뢰와 순정이 깨져버린 일을, 미국인들은 완전히 극복해내지 못한 것이다.
* 이 기사는 「이 죽일 놈의 사랑」(크리스토프 네터스하임 저, 재승출판)에서 발췌·정리했습니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제공 / 재승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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