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온 오태호의 화려하지 않은 고백
길게 뻗은 가로수를 누비며
잊을 수 없는 우리의 이 길을
파트라슈와 함께 걸었네
하늘과 맞닿은 이 길을….
-이오공감의 ‘플란더스의 개’ 중
맨 처음 오태호의 음악을 접한 건 중학교 시절 이승환을 통해서였다. 그는 ‘기다린 날도 지워진 날도’,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화려하지 않은 고백’ 등 이승환의 초기 발라드 히트곡들을 만든 작곡가였다. 두 사람이 프로젝트 그룹으로 나선 ‘이오공감’은 그야말로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었다. “언제 오더라도 너만을 기다리고 싶어~.” 연애 한 번 못해본 중학생이 뭘 안다고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의 후렴구를 따라 부를 때면 꼭 소주 한 잔을 원샷으로 들이켠 표정을 짓곤 했다.
이범학의 ‘이별 아닌 이별’, 피노키오의 ‘사랑과 우정 사이’, 고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 등 숱한 명곡을 만들고 불렀던 오태호가 「비 갠 아침 바람의 향기」라는 제목의 에세이집을 들고 오랜만에 대중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이승환과 부른 ‘추억 속에서 만나요’라는 신곡도 함께다. 1992년 「이오공감」 이후 무려 22년, 1996년에 발표된 그의 세 번째 솔로 앨범 「On and On」 이후로는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 그동안 어디서 무얼 하고 지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인터뷰가 진행된 경기도 일산의 카페 ‘내 사랑 내 곁에’에서는 주옥같은 그의 노래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태어나며 두 아이의 아빠로 또 남편으로 평범한 행복을 맛보며 살았어요. 특별히 음악 활동을 하지 말아야지 한 건 아니에요. 이따금 곡도 쓰고요.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 아니라 주변에서도 모르고 지내다 이번에 책이 나와 아이들 선생님께 드렸더니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돌아온 오태호의 화려하지 않은 고백
사실 맨 처음 출판사에서 그에게 의뢰한 책은 기타 교재였단다. 기타를 독학한 사람으로서 이론서를 쓰는 것이 부담스러워 거절했는데 그간 써놓은 글들이 책으로 엮이게 된 것이라고.
“제 3집 앨범에 ‘비 개인 아침에 부는 바람의 향기’라는 기타 연주곡이 있어요. 그 느낌을 참 좋아하는데 책 제목으로 쓰게 됐죠. 가사를 많이 쓰긴 했지만 책을 쓰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오 작가라고 부르시는 분들도 계신데 얼떨떨해요(웃음).”
알고 있나요 변한 마음 앞에선
사랑하는 그 진심 따윈 소용이 없음을…
세상이 넓어서, 내가 모자라서
그대 손을 놓아주니 편히 떠나요.
-메이플라워의 ‘추억 속에서 만나요’ 중
한동안 1990년대 열풍이 거세게 불었다. ‘응답하라 1994’에는 그의 작품이 무려 10여 곡이나 삽입되며 1990년대 향수를 자극하는 기폭제가 됐고, 2012년에는 오태호의 작품들로 구성된 뮤지컬 ‘내 사랑 내 곁에’가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를 다시 대중 앞으로 불러온 큰 힘이 됐음은 말할 나위 없다.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뮤지컬 제작 발표회에서 홍지민씨가 ‘이렇게 좋은 노래와 글을 쓰는 사람이 22년 동안 은둔생활을 했다니, 참 나쁜 사람이다’라고 한 말씀 하셨는데, 뜨끔하더라고요. 아직 내 음악을 기다리는 분들이 계시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응답하라 1994’를 보면서도 기분이 참 좋았죠. 마음먹고 글도 쓰고 곡 작업도 하는 계기가 됐어요.”
에세이와 함께 공개된 신곡 중 이승환과 함께 부른 ‘추억 속에서 만나요’는 ‘이오공감의 두 사람이 22년 만에 만나 부른 노래’로 발표 전부터 화제를 불러모았다. 잔잔한 멜로디로 담담하게 이별과 추억을 이야기하는 이승환과 오태호의 목소리는 어딘가 잠들어 있던 그 시절의 감성을 소환하면서도 각자의 삶을 살아온 세월의 변화가 느껴진다. ‘이오공감’의 노래를 들으며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어우러지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 ‘찌르르’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0년 만이라 해도 참 다를 텐데 22년 만이라니, 소감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곡을 완성하고 노래를 불러보는데 아무래도 혼자 한 곡을 완창한다는 게 벅차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오공감’ 시절이 생각나더라고요. ‘승환이 형이랑 반반 하면 딱 좋겠는데’ 싶어 조심스럽게 형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봤는데 흔쾌히 허락해주셨어요. 데모 테이프를 들어보니 승환이 형 목소리는 정말 원숙 그 자체더라고요. 완성도 면에서는 정말 완벽에 가깝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전 예전처럼 부담 없이 불렀어요(웃음). 발전된 모습과 머물러 있는 모습이 어우러진 신구의 조화랄까, 아마 듣는 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실 것 같아요.”

돌아온 오태호의 화려하지 않은 고백
오태호의 음악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곡, 고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에도 이야기가 얽혀 있다. 오태호가 ‘신촌블루스’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던 시절, 공연 대기실에서 흥얼거리던 ‘내 사랑 내 곁에’를 김현식이 우연히 듣고 수록하게 된 곡이다.
“그 당시에도 김현식 선배님은 굉장한 뮤지션이셨거든요. 곡을 드리고 선배님의 새 앨범에 실리지 않아 적잖이 실망을 했어요. 그 후로 까맣게 잊고 지내다 선배님이 돌아가신 뒤 유작 앨범의 타이틀로 실리게 됐다는 소식을 듣게 됐어요. 그때는 가수가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곡이 홍보가 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주변에서 모두 ‘그 곡은 묻히겠다’라며 위로해줬던 기억이 나요. 그랬던 곡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곡이 됐죠. 어떻게 보면 ‘내 사랑 내 곁에’는 그즈음 작곡한 다른 곡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몰라요. 김현식씨가 불렀기 때문에 그 명성에 묻어 제 이름을 알리게 된 거죠. 작곡가로서 저에게 무척이나 큰 선물이 된 곡이에요. 아직도 가끔 제 실력이나 노력에 비해 과분한 운이 찾아올 때면 문득 선배님이 하늘에서 도와주고 계신다는 생각을 해요.”
내 사랑 그대 내 곁에 있어줘
이 세상 하나뿐인 오직 그대만이
힘겨운 날에 너마저 떠나면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고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 중
김현식의 목소리 때문일까? 지금 들으면 조금 투박하게 들릴지도 모를 ‘내 사랑 내 곁에’의 가사가 당시에는 신선한 표현이었단다.
“‘비틀거릴’이라는 가사에서 술이 연상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걱정을 많이 했어요. 당시에는 그런 가사가 거의 없었거든요. 그랬던 것이 오히려 신선하다는 반응이었죠.”
1992년에 발표된 피노키오가 부른 ‘사랑과 우정 사이’도 처음에는 말이 많았던 제목이란다. 사랑이면 사랑이고, 우정이면 우정이지 애매하게 사이는 뭐냐는 거였다. 피노키오 멤버들이 반대하는 걸 보컬 김성면이 설득해 앨범에 넣었는데, 한동안 묻혀 있다가 뒤늦게 사랑을 받았다. 그 이후로 그 묘한 감정이 방송가에서 회자되기 시작했다. 요즘 유행하는 ‘썸’의 원조 격이 되는 노래다. 사람들이 지나치는 작은 부분을 민감하게 캐치해 가사로 옮기는 섬세함, 오태호가 작곡뿐 아니라 작사가로서도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순간순간 느끼는 감정들을 놓치지 않고 적어놓은 낙서와 메모들이 큰 재산이 됐다.
그는 3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한 가수이기도 하다. 다른 가수들에게 준 곡이 크게 히트를 칠 때 아깝다, 하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지 묻자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턱도 없는 소리”라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단 1%도 없어요(웃음). 3장의 앨범을 냈는데 저에겐 그 정도가 딱 좋아요. 예를 들어 ‘내 사랑 내 곁에’를 제가 불렀으면 절대 이 정도로 사랑받지 못했을 거예요. 승환이 형 노래도 마찬가지고요. 가수보다 뒤에서 노래를 만드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좋아요. 사람들이 저를 잘 모르고 아이들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소박하고 조용한 삶이요.”
얼마 전 책을 낸 소식이 알려지며 동창회에서도 책 가지고 한 번 나오라고 하는데 부끄럽기도 해서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조용히 선물을 하고 말았단다. 그동안 한 여자의 남편이자 초등학교 6학년과 4학년 두 아이의 아빠로 충실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면, 앞으로는 음악인 오태호로서 좀 더 적극적인 활동을 해볼 생각이다. 원래 본업이 기타리스트였던 만큼 기타리스트로서의 면모도 보여주고 싶다.
“앞으로 「메이플라워」라는 프로젝트 앨범을 통해 30, 40대가 공감하고 위로받을 만한 음악들을 꾸준히 발표할 생각이에요. 이번에 발표된 노래들이 그 시작이고요. 음악인으로서 무척 오랜 시간 동안 무책임하게 활동이 없었던 스스로를 추스르는 의미로 내딛는 첫걸음이라고 봐주시면 좋겠어요.”
메이플라워, ‘5월, 아름다운 계절을 빛내주는 꽃’이라는 이름에는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화려하진 않지만 오랫동안 남는 향기를 품은, 그의 노래처럼 말이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김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