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떴다! 임승대, 방송3사 안방극장 접수하다
조연들이 무색, 무취, 무향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시절은 끝났다.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그래서 때때로 주연보다 더 빛이 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름은 낯설지만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사람들. 달리 말하면 그만큼 연기를 잘한다는 뜻일 것이다. 임승대(43)도 그중 한 명이다. 최근 SBS-TV 드라마 ‘너희들은 포위됐다’와 ‘엔젤 아이즈’에서 주인공을 들었다 놨다 하는 악역으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그를 가리켜 혹자는 “목소리까지 얄밉다”라고 평가했다.
“얼떨떨하긴 한데, 기분은 좋아요. 다양한 작품을 동시에 해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신나는 일인 줄 아세요? 가끔씩 대본이 처음 받았던 것과 달리 현장에서 수정될 때가 있어 헷갈리긴 하지만(웃음), 캐릭터에 대한 기본적인 느낌을 잡아둔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별 무리 없이 잘 촬영하고 있어요. 가끔씩 ‘왜 우리 오빠 괴롭히나’라는 따가운 댓글을 보면서 드라마의 인기를 실감해요. 댓글이 독할수록 ‘내가 잘하고 있구나’ 하고 내심 기분 좋죠.”
1991년 서울예술대학을 졸업한 그는 연극 무대에 오르며 내공을 키웠다. 작은 단역에도 최선을 다하며 서서히 연기의 맛을 음미했다. 꼬박 10년. 안 해본 역할을 꼽는 것이 더 빠를 정도로 필모그래피가 촘촘하게 채워졌을 무렵, 그는 대학 동기였던 장진 감독의 영화 ‘킬러들의 수다’로 충무로에 첫발을 내딛었다.
“졸업하면서 딱 10년간 공연만 하자고 다짐했어요. 2001년에 데뷔했으니까 목표를 달성한 셈이죠. 장진 감독 덕분에 다른 감독들도 만나 작품을 이어가게 됐는데, 그러면서 영화도 재미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어요. 그동안 ‘연극 골수분자’였는데(웃음)…. 그러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생기면서 경제적인 부분도 무시할 순 없겠더라고요. 내 고집만 피웠나 싶기도 하고. 그 뒤로는 결대로 물 흐르듯 흘러왔죠.”
영화 ‘공공의 적’, ‘아는 여자’ 등 매년 한 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하며 묵묵히 제 길을 걸어온 그가 자신의 얼굴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건 영화 ‘박수 칠 때 떠나라’였다. 범인을 잡기 위해 무속 신앙의 힘을 빌려 굿을 하는 대목에서 빙의가 되는 PD가 그의 역할. 무속인을 찾아 다니며 끊임없이 관찰하고 연구한 노력의 결과는 뜨거운 반응으로 돌아왔다. 반전에 가까웠던 빙의 신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로 꼽힌 것이다.
“저 크리스천이거든요. 그런데도 무당들을 찾아다니며 그분들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봤어요(웃음). 왜 저런 표정을 지을까, 유심히 관찰했죠. 연기는 고민을 많이 하면 할수록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자신을 믿어야 해요. 이렇게 열심히 준비했으니 잘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요.”
서태지보다 유명했던 선배
학창 시절, 그는 학업보다는 바깥 세상에 호기심이 많았다. 그러나 이모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DJ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자신에게 잠재돼 있던 끼를 인지하지 못했다. 내성적이고 소심했던 성격 탓이 컸다.
“조용한 학생이었어요. 생활기록부에는 늘 ‘착하다’, ‘반듯하다’와 같은 칭찬들이 적혀 있었죠. 물론 아주 가끔씩 뜬금이 없긴 했어요. 혼자 얌전히 있다가 불의를 봤을 때 혹은 이건 못 참겠다, 싶을 때 압력밥솥처럼 펑펑 터졌거든요(웃음).”
용기를 내기 시작한 건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윤복희, 유인촌 등이 출연한 뮤지컬 ‘뿌리’를 관람하면서부터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그를 흔들었다고 했다.

떴다! 임승대, 방송3사 안방극장 접수하다
예고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완고한 반대에 부딪혔다. 방황하던 그는 집 근처에 있던 서울북공고 연극반이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는, ‘이번에는 물러설 수 없다’라는 마음으로 서울사대부고에 입학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북공고 전자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을 알게 된 아버지께서 그를 호되게 질책했고 결국엔 집에서 쫓겨나 쪽방에서 생활하게 됐다. 돌이켜보니 그 시간들이 꿈을 단단하게 키운 원동력이 됐다.
“졸업을 위해서는 필수로 따야 하는 자격증들이 있었어요. 그걸 준비하면서, 대학에 가기 위해 인문계 친구들이 하는 공부를 병행했죠. 연기 연습도 게을리할 수 없었어요. 수천 번도 넘게 ‘연기만 하면 좋겠다’라고 외쳤어요. 게다가 지금처럼 연기학원이란 게 있기나 했나요? 막막했을 수밖에요. 그러다 졸업 전 취업 기간에 극단에 들어가게 됐어요. 그곳에서 많이 배웠죠. 무대 위의 압박감을 즐기는 법까지도요.”
예년에 비해 높은 경쟁률이었지만 마침내 그는 서울예술대학 연극과에 당당히 입학했다. 서울북공고 정문 앞에는 그의 합격을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이래 봬도 저, 후배인 서태지와 함께 학교 유명 인사예요(웃음). 연극과에 들어가면서 많이 변했어요.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겠더라고요. 그러면서 낯선 사람들의 모르는 면들을 알아가는 재미를 배우게 됐어요. 성격이 자연스럽게 밝아지더라고요. 그때 몸에 밴 습관들은 현장에서 일할 때도 도움이 돼요. 스태프들 이름을 한 명 한 명 다 외우고 있거든요. 그럼 뭐가 좋으냐. 조명을 하나라도 더 받을 수 있고, 제 얼굴만 타이트하게 잡아주는 특권도 누릴 수 있죠. 배우에겐 참 중요한 부분이거든요.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면 행복은 덤으로 오는 것 같아요.”
그는 지금까지도 서울예술대학의 ‘전설’로 남아 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수업에서 최초로 99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 기록을 깬 후배들이 없다고 한다.
“장현성, 김진수, 장항준, 정웅인, 김나운씨가 제 동기예요. 한때는 경쟁자였지만 지금은 모두 함께 늙어가는 처지라(웃음). 나이가 들어도 입만 움직일 수 있다면 연기를 계속하고 싶어요. 그만큼 연기가 좋아요”
배우들의 연기 선생님
그에게는 배우 외에도 또 다른 타이틀이 있다. 바로 연기 선생님. 최강희, 김정은, 강혜정, 서지석 등 지난 20년간 그를 거쳐간 제자들만 해도 수백 명이다.
“들어가기로 한 영화가 제작 단계에서 중단되고, 캐스팅이 불발돼 부득이하게 공백이 생기는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그럴 때마다 저를 다잡은 건 바로 제자들이에요. 꿈을 꾸는 친구들과 함께하면서 저도 많은 걸 배웠어요. 요즘엔 어린 제자들 덕분에 유행어와 최신 곡을 다 알아요(웃음). 항상 눈과 귀를 열어둬야 하는 배우란 직업에 정말 큰 도움이 되죠.”
아역 시절부터 지도해온 제자들이 유명해질 때마다 그는 보람을 느낀다. 저마다의 색을 키워 대체할 수 없는 개성을 강조하는 연기, 즐겁게 하는 연기가 그의 수업 철학이다.
“저는 주입식으로 배운 세대인데, 그게 참 싫더라고요. 후배들이나 제자들은 자신만의 색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소리의 크기보다는 느낌의 크기를 조절할 수 있게 가르쳤어요. 나를 사랑해야 남들도 사랑할 수 있다고 늘 강조했죠. 진심이 있으니 결과도 좋아요. 처음에는 연기 교육의 이단아였는데(웃음), 지금은 나름 인정받고 있어요.”

떴다! 임승대, 방송3사 안방극장 접수하다
“칭찬에 인색하지 않으려고 해요. 강압적인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결국 그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거든요. 친구처럼, 삼촌처럼, 아빠처럼 그렇게 지내면서 연기도 생활의 일부가 되도록, 힘들어 할 땐 ‘아무리 안 돼도 나 정도는 되니까 걱정하지 마’라고 위로도 해주면서(웃음).”
불확실한 내일과 불규칙적인 생활. 불안함으로 가득했던 시간을 인내하게 한 또 다른 힘은 가족이다. 아빠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초등학생인 두 아들의 어깨에도 힘이 들어갔다.
“처음에는 ‘우리 아빠도 평범한 아빠였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면서 쑥스러워했는데, 지금은 친구들에게 ‘우리 아빠는 못된 사람이 아니야. 저런 걸 연기라고 하는 거야’라며 자랑스럽게 말하더라고요. 고맙고 또 대견해요. 모니터링도 얼마나 깐깐하게 하는데요. 며칠 전엔 눈썹을 너무 올리면 어색하다고 지적도 해줬어요(웃음).”
그러나 두 아들보다 더 무서운 평론가는 아내다. 그녀와는 1995년 스승과 제자로 만났다.
“집사람이 배우 지망 삼수생이었는데, 제가 꼬임을 당했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랑 결혼을 할 것 같았대요. 프러포즈도 아내가 했죠(웃음). 한창 공연을 다닐 때라 데이트도 제대로 못했는데, 7년간 연애하면서 만난 시간은 고작 60여 일밖에 되지 않더라고요. 그런데도 불만 없이 곁에서 잘 지켜봐줘서 무척 고마워요. 아! 아쉽게도 아내는 끝끝내 오디션에 합격하지 못해 두 아들의 엄마로만 지내고 있어요. 키가 작은 편인데, 그 당시에는 키 큰 여자들이 대세였던 시절이라(웃음)…. 그럼에도 아내는 저의 스승이자 최고의 평론가예요. 얼마나 예리한데요.”
급하게 뜬 한 술보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는 밥 한 그릇이 더 이롭다는 걸 그는 알고 있다. 인터뷰 말미, 그는 자신의 강점으로 절실함을 꼽았다. 일직선이 아닌 곡선의 인생을 살아왔기에 연기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 일인지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역할에 대한 절실함이 클수록 더 깊게 몰입하게 돼요. 그러다 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마치 내가 처한 상황인 듯 느껴지고, 나만의 색이 나오고…. 저는 천천히 준비하면서 기다리는 편이에요. 그래서 세월은 흘렀지만 제 안의 세월은 그대로예요. 늘 신인의 마음이죠. 서두른다고 능사는 아니더라고요. 겸허하게 내 것을 양보하고 남을 배려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저도 모르는 사이에 채워져 있는 게 인생인 것 같아요. 여전히 저는 꿈을 꿔요. 50대가 되기 전에 브로드웨이에 가서 1인극을 해보고 싶어요. 말이 통하지 않아도 감동을 주고, 그렇게 이슈가 돼 브로드웨이 무대에 서보고 싶어요. 그 다음의 꿈은, 아직 영화 부문에서 수상을 못했거든요. 남우조연상 7번 정도 받고, 그다음엔 남우주연상을 받고 싶어요. 그 후에는 또 다른 꿈이 생기겠죠?”
■글 / 김지윤 기자 ■사진 / 김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