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十靑年 이홍렬과 나눈 수다
여하튼 참 부지런한 사람이다. 2년 전 쉰 여덟의 나이로 부산에서 서울까지 610km 국토 종단에 나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 이홍렬이 「60초」라는 에세이를 펴냈다. 환갑. 인생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지나온 36년 차 개그맨의 유쾌하지만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홍보대사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과연 소문대로였다. 그가 살아온 세월의 반을 산 기자는 행여나 놓칠세라 쏟아지는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를 꾹꾹 눌러 담느라 바빴다.
처음 ‘60초’라는 제목을 보고 무슨 뜻일까 싶었어요. 시간? 60 초반? 책을 써놓고 제목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60이라는 나이를 넣기 싫더라고요. 거부하고 싶지. 어차피 한 번은 드러내야 하는 숫자이니 넣긴 넣어야 할 텐데, 대신 사람들이 즐겁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러다 떠올린 게 시작 초(初) 자예요. ‘60, 시작이다’라는 뜻이죠. 60초 짧은 시간이라는 뜻도 있고 시곗바늘이 60초를 돌면 다시 시작하듯 인생도 끝인 줄 알았는데 다시 시작이라는 의미도 있고요. 보는 사람마다 의미가 달라요. 출판사에서는 60초마다 한 권씩 팔리는 책이라고 해요(웃음).
제목부터 정면 돌파하는 방법을 택하셨군요. 50대 끝자락으로 오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내가 이제까지 뭘 이뤘지?’, ‘무엇을 하면서 왔나’ 하는 생각이요. 주변 사람들에게 60 넘으면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보면 한결같이 나 그런 거 신경 안 써,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하는 거예요. 그렇게 60을 외면하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아, 내가 정말 나이가 들었구나 하게 되는 게 예순다섯, 일흔이에요. 그때 가서 그럴게 아니라 60을 바라보는 지금 뒤돌아보고 다시 시작하자 마음을 먹었죠. 내 인생의 60이란 숫자를 크게 써보기로 한 거예요.
빈말이 아니라 겉모습만 보면 그다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아요. 언제 그렇게 나이가 다가오던가요? 요즘 슬슬 주례가 들어와요. 몇 해 전 친한 후배 녀석이 주례 부탁을 하기에 펄쩍 뛰며 아직은 아니라고 거절을 했거든요. 그 후배가 “선배, 60 되기 전까지는 절대 주례 보시면 안 돼요”라고 했는데 몇 달 전부터 허락하고 있는 중이에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후배에게 미안해요. 내가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대신 주례를 보는 조건이 아프리카 어린이를 후원하는 거예요. 이제까지 여섯 쌍의 부부가 후원을 시작했어요. 어디 1백 명 합동 주례 봐달라는 곳 없을까 기다리고 있어요.
요즘 나이 60은 노년이 아닌 것 같아요. 워낙 관리들도 잘하시고요. 100세 시대에 나이 60은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밀어요. 그런데 사회는 이제 그만 정리하라고 해요. 얼마 전에 동창회에 갔다가 충격을 받았어요. 돌아가면서 뭐 하고 지내나 인사를 하는데 다들 “회사 은퇴하고 집에서 손주 보고 있어” 하는 거예요. 한두 명이 아니라 여럿이. 쇼킹하더라고요. 100세 시대에 이제 절반을 넘어섰는데 말이죠.
그 나이대가 되면 사회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가 지나고 내리막길에 접어들며 느끼는 불안이 큰 것 같아요. 연예인들은 더 심하지 않나요? 인기가 있건 없건 연예인들이 언젠가 필연적으로 듣게 되는 말이 “요즘 뭐 하세요?”예요. 전성기가 지나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며 많이들 우울해하죠. 저도 전성기 때는 제 인기가 영원할 줄 알았어요. 근데 아니더라고요.
이홍렬씨, 요즘 뭐 하세요?
1979년 TBC 라디오 ‘가요대행진’으로 첫 방송을 시작한 그는 1993년 ‘오늘은 좋은 날-귀곡산장’, 1994년 ‘일요일 일요일 밤에-한다면 한다’, 1995년 ‘이홍렬쇼’ 등 1990년대 방송계를 휘어잡았다. MC와 개그 프로그램, 시트콤까지 종횡무진한 멀티 엔터테이너. 하지만 그에게도 내리막임을 인정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런 그에게 봉사는 다시 일어서도록 안내한 길이었다.
이홍렬씨의 전성기는 언제였다고 생각하세요? 1990년대 방송계를 휘어잡으셨죠? 제가 데뷔하자마자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사람은 아니에요. 1979년에 데뷔를 해서 다른 친구들보다 늦게 떴어요. 누군가 그러더라고요. 이홍렬은 다른 사람들 출세하는 거 다 보고 기다렸다가 마흔 넘어서 빛을 봤다고. 그 말이 딱 맞아요. ‘이홍렬쇼’를 마흔네 살에 시작해 그때부터 10년을 한창 달렸어요. 토크쇼를 5년 동안 했고 시트콤도 했고요. 과분한 사랑을 받았죠.

2012년 국토 종단을 마치고 바로 남수단으로 날아간 이홍렬. 모금된 기부금을 모아 2천6백여 대의 자전거를 아이들에게 선물했다.
사람이 정상에 있다가 내려오는 게 올라가는 것보다 어렵다고들 하잖아요. 연예인들을 제일 반겨주는 곳이 식당이에요. 사실 식당에서 밥 먹고 있는데 사람들이 알아보면 불편하잖아요. 그런데 아무도 나를 알아봐주지 않고 반겨주지 않을 때는 허전하고 쓸쓸하더라고요. 제가 점점 TV에 출연하는 횟수가 줄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무렵 저를 알아보지 못하는 가게 점원에게 불친절함을 핑계로 화를 냈던 적도 있어요. 비교적 늦은 나이까지 방송을 한 저도 이런데 그보다 더 빨리 인기의 뒤편으로 사라진 다른 연예인들은 어땠을까 싶더라고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다, 내리막임을 인정하고 대접받으려 하지 말자, 라며 마인드 컨트롤을 했죠.
그러고 나니 나아지던가요? 그게 또 말처럼 쉽게 되나요? 한창 인기 있던 시절에는 TV에 안 나올 때에도 어디선가 바쁠 거라고 생각을 해요. ‘이홍렬쇼’를 할 때는 어디만 가면 “아이고 이홍렬씨, 바쁜데 여긴 웬일이세요?”라고들 했어요. 근데 지금은 만나는 사람마다 “요즘 한가하지?” 하고 물어. 요즘도 참 바쁘거든요. 라디오 녹음하랴, 생방 하랴, 강의 다니랴, 거의 매일 사람들을 만나고 바쁘게 움직이는데 TV에 안 나오니 아무것도 안 하고 살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요즘 왜 TV에 안 나와요?”라는 말에 하도 스트레스를 받아서 친하게 지내는 정신과 전문의 김병후 박사님께 상담을 한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박사님도 ‘아침마당’ 그만둔 뒤로 요즘 왜 아침마당 안 나오냐는 소리에 죽겠다는 거야. 아니, 내가 안 나가고 싶어서 안 나가는 거냐면서요(웃음).”
답은 못 들으셨어요? 연예인뿐만 아니라 누구든, 인생의 내리막은 반드시 찾아온다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그들과 교류하며 느꼈던 행복감을 상실한다는 건 상상 이상의 고통이라는 거예요. 가족, 지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여러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일수록 행복을 결정하는 관계 호르몬의 분비가 왕성하대요. 제가 지금을 미리 예상해서 한 건 아니었지만 28년 전에 초록우산 어린이 재단과 인연을 맺고 지금까지 꾸준히 활동을 해온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년 전에는 어린이재단과 아프리카 어린이 돕기 국토 종단을 하셨어요. 부산에서 서울까지 610km를 걸으셨지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실 그 무렵이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을 때였어요. 예순을 앞두고 어떻게 하면 지나간 시간을 잘 마무리하고 인생 2막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시기였는데, 우연히 신문에서 국토 종단을 하고 있는 대학생 사진을 보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날로 바로 제 버킷리스트에 넣고 실행에 옮겼죠. 이왕이면 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어린이재단과 아프리카 남수단 아이들에게 자전거 보내주기 기금 마련을 함께하게 된 거예요. 잊지 못할 경험이었죠. 전 그거 하고 일생에 받을 칭찬은 다 받았어요.
근데 왜 자전거였어요? 밥이나 돈은 다 쓰고 떨어지면 또 손을 내밀게 돼요. 남수단 아이들이 먹을 물을 긷기 위해 다니는 거리가 4km는 기본이고 10km 이상도 부지기수거든요. 자전거가 있으면 자전거로 물 길러 다니고 자전거 타고 학교도 가요.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공부할 시간을 벌어주는 거예요. 우리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께서 자전거 하나로 모든 집안일을 다 하셨거든요. 자전거로 짐도 나르고 자전거로 학교에도 데려다 주시고. 자전거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세대예요.
국토 종단을 위해 TBS ‘이홍렬의 라디오쇼’와 MBC-TV ‘맛있는 TV’ 등 당시 하시던 프로그램 4개를 모두 그만두셨잖아요. 이 또한 쉽지 않았을 결정인데요. ‘이홍렬의 라디오쇼’는 2009년부터 시작해서 딱 3년 차였는데 놓기가 참 아쉽더라고요. 50대 중반을 넘어선 저에게 단비 같은 프로그램이었거든요. 제 첫 방송이 TBC 라디오 ‘가요대행진’이었던 터라 라디오에 대한 애착도 컸고요. 무척 아쉬웠지만 50대가 가기 전에 꼭 국토 종단을 하고 싶었어요. 이왕 마음먹은 거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라디오를 떠나고 2년 만에 다시 ‘이홍렬의 라디오쇼’ DJ석에 앉으셨어요. 사실 국토 종단을 마치고 작년 한 해 동안 방송이 많이 없었어요. 제가 36년 코미디 인생 중 쉬었던 것이 딱 두 번이에요. 1991년에 일본 유학 갔을 때, 1998년 미국 유학 갔을 때. 그 이후로 처음 쉬게 된 거예요. 그래, 이때다. 책을 쓰자 하고 여기저기 다니며 글을 쓰던 중에 감사하게도 다시 제의가 온 거예요. 이런 행운이 있나 싶어요. 라디오로 방송생활을 시작한 만큼 마무리도 라디오에서 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제 마지막 열정을 쏟아 부을 곳이에요.
성공한 삶이 아닌 성공적인 삶
개그맨으로 산 36년 동안 후회는 없었다. 마지막 순간 “인간답게 살았다”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 더 부지런해져야 한단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MBC-TV ‘코미디의 길’이라는 개그 프로그램도 시작하셨잖아요. 이응주 PD라고 예전에 ‘귀곡산장’을 같이했던 PD가 있어요. 불러서 갔더니 대뜸 “형, 우리 뭐 같이해야죠” 하는 거야. 이 PD도 22년 동안 참 변함이 없는 사람이에요. 나는 40대 때 내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이 나랑 평생 갈 사람들일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야. 내려와보니 알겠어요. 내려올 때 곁에 있는 사람이 평생 갈 사람이더라고. 여하튼 만나러 가면서 ‘콩트 무대에서 후배들과 같이 연기를 하라고 하면 정중하게 거절해야겠다’ 하고 생각했어요. 후배들이 저를 어려워해서 제대로 연기하기가 힘들테니까. 근데 얘기를 들어보니 페이크 다큐라는 거예요. 반은 페이크, 반은 다큐. 내가 또 새로운 거에는 귀가 뻥 뚫리거든. 예를 들면 나는 엄청 코미디를 하고 싶어 하는데 후배들은 나랑 같이하기 싫은 거야. 감 떨어졌다고. 실제 상황 같은 이야기잖아요. 얼마나 재밌어요(웃음).
20년 만에 다시 개그 후배들과 함께 무대에 선 소감은 어떠세요? 사실 제가 열과 성을 다한 후배들에게 뒤통수를 맞았던 적이 있어요. 그런 일을 겪고 한동안 후배들을 외면했었는데 그게 참 미안하더라고요. 그간 못 줬던 정을 주는 기회도 됐고, 이 나이에 또 즐겁게 노는 자리를 마련해주었으니 저로서는 참 좋은 일이죠. 같이하고 있는 친구가 김용재라고 저와 스물여덟 살 차이가 나요. 저랑 구봉서 선생님이 28년 차이거든요. 특이한 게 이 친구가 어른을 어려워하지 않아. 아주 웃기는 친구예요(웃음).

六十靑年 이홍렬과 나눈 수다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세요? ‘이홍렬쇼’를 할 때 많은 기자들이 저에게 와서 성공의 비결을 물었어요. 전 잘난 척을 있는대로 다 떨며 어딘가에서 들었던 좋은 말들을 늘어놓곤 했죠. 중요한 건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저에게 성공의 비결을 물어보는 기자는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저는 ‘이홍렬쇼’ 이후로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말이죠. 그럼 전 성공하지 못한 걸까요? 성공은 정말 일시적인 거예요.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일시적인 성공으로 그 사람의 인생을 단정 지을 수는 없어요. 우리는 우리 주변에 많은 성공한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추락하는 숱한 경우를 봐왔어요. 정말 성공적으로 살았는지는 그 사람이 죽은 다음에 살아남아 있는 이가 평가를 내리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이제껏 제가 받아온 사랑을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어요. 죽을 때 “저 인간 정말 인간답게 잘 살다 가네”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정말 멋지게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국토 종단 이후 ‘도전의 아이콘’이 되셨는데, 혹시 또 도전하고픈 일이 있나요? 방송은 나이가 들고 인기가 떨어지면 묵시적으로 이제 그만 나오라는 신호가 와요. 봉사는 내 사지가 멀쩡하고 내 입이 살아 있는 한 그만하라는 사람이 없어요. 제 남은 버킷리스트 중 ‘기부 특강 100회’가 있는데, 이제 80회를 했어요. 앞으로 스무 번 더 해야죠.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걷기 전에는 내가 정말 2천 대가 넘는 자전거를 아프리카에 가져다줄 수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일단 행동으로 옮기니 하게 되더라고요. 밤새 끙끙 앓고 이제 한 발짝도 더 못 걷겠다 했는데 새날이 밝으면 또 발걸음을 옮길 새 힘이 솟아요. ‘Big Dream, Big Think, Big Action’. 성공하려면 갖춰야 할 삼박자예요. 꿈을 크게 갖고 생각을 크게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열쇠는 실행에 옮기느냐, 옮기지 못 하느냐인 거죠. 그러니 다들 자, 지금부터 액션~!
인생의 내리막길을 바라보는 많은 이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비교하지 말 것, 누구나 전성기에는 끝이 있음을 알 것, 전성기 시절의 기억을 빨리 털어버릴 것. 제가 후배들에게 자주 하는 말인데 모든 분들에게 해드리고 싶은 말이에요. 이제 시작이에요. 어쨌건 살아 있는 동안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인데 환갑이 뭐 대순가요?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김정원 ■사진 제공 / 초록우산 어린이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