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30년 무명 가수 나미애의 꽃밭

‘트로트 엑스’ 화제의 3인방

① 30년 무명 가수 나미애의 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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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사연은 달랐지만 트로트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 이들이 한 무대에서 만났다. 누군가에게는 흥겨움을 전하는 자리였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애절함을 담아내는 시간이었다. 대한민국에 트로트 새 바람을 일으킨 Mnet 오디션 프로그램 ‘트로트 엑스’. 최종 우승자로 선정된 나미애 역시 ‘떨림’이 있고 ‘꺾임’이 있는 트로트의 한 자락처럼 순탄치 않은 인생을 살았다. 오직 음악이 전부였던 지난 30년. 그녀가 트로피를 거머쥘 수 있었던 건 인고의 시간 속에서도 진심은 통할 것이라는 믿음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트로트 엑스’ 화제의 3인방]① 30년 무명 가수 나미애의 꽃밭

[‘트로트 엑스’ 화제의 3인방]① 30년 무명 가수 나미애의 꽃밭

무대 위의 전사
작고 아담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적인 가창력 그리고 허스키한 목소리 속에 배어 있는 애절함. 첫 무대에서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를 불렀을 때부터 나미애씨(50)는 강력한 우승 후보 중 1명이었다. 심사위원이던 태진아의 표현처럼 ‘이토록 노래를 잘하는 가수가 왜 그동안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는가’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매회 그녀는 보석처럼 빛났다. 여기에 30년 무명의 설움을 딛고 마침내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이야기는 여러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여기저기서 축하 연락이 많이 와요. 그렇지만 달라진 건 없어요. 어제의 하늘과 오늘의 하늘이 다르지 않듯 저는 예전 그대로의 저인걸요. 트로트를 더 열심히 알리라고 큰 상을 주신 것 같아요. 오히려 방송 후 책임감과 함께 겸손함이 생겼어요. 말이나 행동도 조심하게 되더라고요. 대선배들이나 톱스타들은 이런 불편함을 어떻게 견뎠을까, 싶기도 하고요. 사실 무명이었을 땐 나름의 편안함이 있었는데(웃음)….”

사실 그녀는 이미 7집 앨범까지 낸 어엿한 중견 가수다. 그렇지만 혹여 ‘저러니까 30년 동안 무명이었겠지’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프로그램 오디션을 앞두고 오랜 시간 고민했다. 그녀의 선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TV에 나오는 딸의 모습을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어머니의 한마디였다.

“‘이번이 마지막 무대야’라는 마음으로 마이크를 잡았어요. 긴장감을 털어내기 위해 ‘우와, 나를 위해 이렇게 멋진 무대를 세운 거야?’라고 최면도 걸어봤죠. 그런데도 심장이 쿵쾅거리는 거예요. 바로 그때 ‘객석에서 엄마가 듣고 계시잖아. 그럼 됐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사를 천천히 곱씹으면서 노래를 불렀죠. 그러다 마침내 엑스 월이 오르는 걸 보면서 그동안 쌓여온 응어리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데, 하마터면 노래를 끝까지 못 부를 뻔했어요.”

위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경쟁자였던 벤과의 맞대결에서 패배하면서 탈락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방송을 통해서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대결 당일, 그녀는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벤은 배울 점이 참 많은 친구예요. 실력도 잘 정돈돼 있고요. 그 친구를 보면서 ‘내가 저 나이 때 저 정도로 노래를 했던가’ 하고 여러 번 질문해봤는데 아니었던 것 같더라고요(웃음). 연습하면서 ‘승패를 떠나 온전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즐기자’라고 말했어요. ‘꽃밭에서’를 나눠 부르며 역동적으로 표현해보자고 했죠. 그런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 거예요. 결국 엔딩을 제외한 클라이맥스 부분은 벤에게 양보했어요. 내 모든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스스로에게 화가 났고 아쉬웠어요.”

[‘트로트 엑스’ 화제의 3인방]① 30년 무명 가수 나미애의 꽃밭

[‘트로트 엑스’ 화제의 3인방]① 30년 무명 가수 나미애의 꽃밭

구사일생으로 심사위원들에게 ‘파이널 배틀 진출권’ 카드를 받고 다음 단계에 진출하기까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그녀는 “천당과 지옥을 오간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박자, 음정 안 틀린다고 잘 부르는 게 아니에요. 저는 매 순간 진정성을 담아 노래를 불렀어요. 거짓 없이 불러야 듣는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이 나이가 되니까, 감히 인생을 조금은 알겠어요. 또 트로트가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도….”

나를 버티게 한 힘, 어머니
스무 살 때 지인을 따라 녹음실에 갔다가 작곡가 이호섭을 만나게 됐다. 어릴 적부터 가수를 꿈꿨지만 가정 형편 탓에 선뜻 나서지 못한 그녀에게 찾아온 첫 번째 기회였다. 일찌감치 실력을 알아본 스승은 기본이 되는 발성부터 가르쳤다. 날마다 반복되는 연습이 고되고 힘들었지만 그것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즐거움이 더 컸다.

“녹음실까지 가려면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했어요. 그렇지만 토큰도 없고…. 1시간 노래 수업을 위해 몇 시간씩 걸어야 했죠. 한여름이었는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그렇게 강행군을 하다 보니 나중엔 별이 다 보이더라고요(웃음).”

중풍으로 누워 계신 아버지와 이미 자신들의 가정을 꾸린 언니들. 그녀는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알음알음으로 한 캬바레 무대에 오르게 됐고, 그것이 트로트 가수로서의 첫 내딛음이었다.

“그 뒤로 별별 고비를 다 겪었어요. 방송 출연시켜준다는 말에 몇 달간 모은 돈을 갖다 줬는데 나 몰라라 하고, 돈이 좀 들어오나 싶었는데 대표가 잠적해버리고…. ‘산 넘어 산’ 인생이었죠. 그렇지만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더 독하게 노래에 빠지게 됐어요.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음악이라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하면서 행복해했어요.”

오로지 트로트만 고집하던 그녀는 미사리에 있는 라이브 카페에서 일하며 다른 장르의 음악도 섭렵하기 시작했다. 신청곡 위주로 선곡하다 보니 초반에는 고충도 많았다고.

“발라드 곡을 불러도, 댄스 곡을 불러도 ‘뽕끼’가 있더라고요. 안 되겠다 싶어서 죽어라 연습했어요. 몇 천 번씩 같은 곡을 반복해 불렀죠. 나중엔 민요까지(웃음).”

기회가 줄어드는 무대와 달리 날마다 늘어나는 빚.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걸려오는 독촉 전화. 희망이라는 빛이 보이지 않는 순간들도 있었다. 극단적인 생각도 여러 번. 그때마다 그녀를 버티게 한 힘은 어머니였다.

“저는 친구가 없어요. 음악을 하면서 먹고살기도 바빴기 때문에 친구를 만날 여유가 없었어요. 희로애락을 음악으로 풀었죠.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본 어머니는 늘 제게 ‘사람이 이렇게만 살라는 법은 없다’라며 언젠가 빛을 보게 될 것이라고 힘을 주셨어요. 이 나이가 되도록 한 번도 결혼하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는걸요. 제가 얼마나 이 일을 좋아하는지 아시니까….”

여전히 그녀의 삶은 팍팍하다. 상금으로도 다 갚지 못하는 빚이 남아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자신처럼, 혹은 자신보다 더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고 싶다.

“제 기사에 공통적으로 달린 댓글이 ‘정말 잘됐으면 좋겠다’라는 응원이었어요.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여기까지 외길 인생을 걸어온 제 모습에 많은 생각을 하셨대요. 정말 감사한 일이에요. 나미애라는 꽃을 피우기 위해 30년의 세월이 걸렸어요. 앞으로 더 활짝 피어나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이번 프로그램 참가를 계기로 침체된 트로트가 부활돼서 더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고 싶어요. 좌절의 늪에 빠져 있는 분들에게 힘이 되고 싶어요.”

■글 / 김지윤 기자 ■사진 / 김성구 ■사진 제공 / CJ E&M ■장소 협찬 / 에반스 빌(070-7636-3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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