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인 박찬숙 사진작가로 변신…물결에 깃든 사유
‘박찬숙의 시선-물결 숨결’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 전시 벽을 수놓은 작품은 현대미술 전시를 연상시킨다. 규칙성 없이 난무(亂舞)하는 무늬들, 화려하게 소용돌이치는 형상들은 흡사 우주를 담은 추상화 같기도 하다. 이미지의 정체는 물, 방송인 박찬숙(69)이 지난 3년간 포착한 물결의 모습이다. 도대체 우리가 아는 물의 어느 부분에 이런 모습이 숨어 있었던 것인지, 자꾸만 눈을 의심하게 된다.
“바람에 따라, 햇살의 강도에 따라 각기 다른 바탕을 만드는 물을 보며 무엇에 홀린 듯 셔터를 눌렀어요. 신기루처럼 보여주고 곧 사라지는 모습에 매료됐죠.”
그녀를 매료시킨 건 단순히 눈을 사로잡는 표면적 아름다움만이 아니었다. 바람이 불고 햇빛이 비치는 순간 만들어지는 물의 결은 인간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우리의 운명과도 같았다. 벽에 걸린 57점의 작품에는 그러한 본질을 꿰뚫는 그녀만의 시선이 담겨 있다. 온 정신을 기울여 담아낸 물의 본질은 강렬하고도 압도적이다. 저명한 방송인의 취미생활 전시쯤으로 알고 온 이들은 작품 앞에서 아연실색하고야 만다.
방송인으로서 40년 넘게 카메라 앞에 서온 그녀가 카메라 뒤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건 4년 전, 2011년 봄부터였다.
“40여 년을 카메라에 찍혀봤으니 이제 찍어보는 게 어떻겠냐는 지인의 말을 듣고 그날로 카메라를 샀어요. 문화센터 사진반에 등록해 배워보기도 했는데 사진이라는 게 배워서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특별히 아름답거나 신기한 순간을 찍어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이른 새벽 하루를 나서며, 일상을 보내고 밤거리를 걸으며 발길이 멈추는 곳에서 셔터를 눌렀다. 의식하지 않고 찍은 사진이 하나둘 쌓이기 시작했다.

금빛밀회
그녀의 관심이 비와 물로 모아진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사진을 찍기 시작한 지 6개월 만인 그해 11월, 그녀는 ‘배짱 좋게’ 자신의 이름을 내건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카메라를 잡은 지 1년 사계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른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연연하지 않았다. “시스템에 연연하는 건 제 스타일이 아니다”라며 그녀가 천진하게 웃는다.
“사진의 매력은 시스템에 연결돼 있지 않다는 거예요. 세월과 시간,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아요. 오로지 순간의 사유가 있을 뿐이죠.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홀로 무언가를 한다는 게 참 기뻤어요.”
첫 번째보다 두 번째 전시는 더욱 풍성해졌다. 물결은 한결 진하고 화려해졌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카메라가 멈춘 곳, 사유의 공간
그날의 하늘빛과 바람, 구름과 노을, 드리워진 나뭇잎 하나에도 모습을 달리하는 물결은 주위를 투영하며 놀라운 모습으로 변모한다. 현미경적인 시야로 들여다본 물의 모습은 그렇게 상상을 뛰어넘는 풍광을 만들어낸다.
“인위적으로 사진을 보정하거나 부분을 잘라내지도 않았어요. 그 순간 있는 그대로의 물결의 모습이에요. 물의 결이 그렇게 다양한 빛깔을 가지고 있어요.”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그러나 침묵하기엔 너무 아름다운 순간들이었다. 말 대신 몸을 움직여 사진으로 담았다.
“물결의 아름다운 빛깔이 결코 혼자 만들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바람이 불고 햇빛이 비치는 순간 결이 만들어지죠. 사람과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타인과의 교감 그리고 관계 속에 인간이 존재하잖아요. 깊은 고독에 빠져 있을 때조차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물을 보며 깨달았어요. 물과의 대화는 곧 세상과의 대화였어요.”
물결을 통한 성찰은 사진에만 녹아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 전시와 함께 발간된 사진집에는 그간 찍었던 사진들과 직접 쓴 시가 함께 담겨 있다. 물결이 일렁이는 수천 개의 고랑 사이사이, 시어 하나하나에 삶에 대한 깊은 사유가 녹아 있다.
생각이 가르마를 탄다. 부스러기들이 올라온다. 고통의 다른 얼굴. ‘망각’을 쓰고 웃는다. 부스러기가 부화한다. 나뉜다. 흩어진다. 갈라진다. 생각이 가르마를 탄다. 갈래마다 씨앗을 심고 기다린다. 파랑새 한 마리. -사유의 공간
한국 TV 뉴스 최초의 여성 앵커인 박찬숙은 여성 방송인 시대의 문을 연 상징적인 존재다. ‘최초’라는 타이틀에는 역사가 깃들게 마련이다. 그녀는 유물로 남기를 거부했다. KBS-1TV ‘생방송 심야토론’, ‘라디오 정보센터 박찬숙입니다’ 등을 진행하며 카리스마와 전문성을 갖춘 진행 능력을 인정받았고, 최근까지 채널A ‘박찬숙의 칼칼토크’, MBN ‘박찬숙의 시선’ 등을 통해 활발한 방송활동을 해왔다. 언론학과 교수로 강단에 서기도 했고 잠시 정치에 몸담기도 했지만 대중에게 박찬숙은 냉철하고 이성적인 방송인의 모습이다. 그런 그녀에게도 뜨거운 예술가적 본색이 숨어 있었나 보다. 일찌감치 소설로 문단에 등단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별다른 수련 없이 이토록 형형한 순간들을 포착해 내놓았으니 감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보석함
같은 풍경을 찍은 사진은 있어도 같은 사진은 없다. 사진에는 저마다의 철학과 시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진 역시 박찬숙만의 시선이 오롯이 녹아 있다.
“백두산에 올랐을 때 우리에게 익숙한 타원형 모양의 천지가 아닌 백두산 아래 일부분만 보이는 천지를 찍었어요. 백두산에 오르는 길이 네 갈래인데 서쪽, 남쪽, 북쪽은 중국을 통해, 동쪽은 북한을 통해 갈 수 있는 길이에요. 관념적으로 백두산과 천지는 우리의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기에 고통스러움을 절감했죠. 일부분만 보이도록 찍은 건 그러한 의미가 담겨 있어요.”
같은 풍경을 보고도 떠올리는 생각은 천차만별이다. 압록강 너머 손에 잡힐 듯 가까운 신의주를 보고 그녀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오늘 아침밥은 먹었을까?’라고 읊조린다.
“동해안, 변산반도, 서해안 염전과 갯벌…. 발길이 닿는 대로 곳곳을 다녔어요. 눈이 내린다 하면 폭설 내리는 설악산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고요. 눈이라고 해서 다 하얀 게 아니더라고요. 산그늘 아래 쌓인 눈은 푸르스름해요. 파란 물감을 뿌려놓은 것같이. 특별한 사진은 그날의 날씨와 햇빛과 바람이 만들어줘요. 저는 그것을 포착할 뿐이고요. 어떤 풍경을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것,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우리 인생과 같아요.”
새롭게 시작하는 하루 그리고 인생
평소 나이 얘기를 굳이 꺼내지도, 피하지도 않는 그녀다.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년이면 일흔을 맞는 그가 이토록 몸과 마음 그리고 생각의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을.
“신이 인간에게 주신 것 중 가장 공평한 게, 누구에게나 하루는 24시간이라는 거잖아요. 오늘을 사는 건 누구에게나 똑같으니까 나이에 얽매이지 않아요. 어떤 게 젊게 사는 것이고 어떤 게 나이 들게 사는 것인지 누가 알 수 있겠어요. 저는 귀한 오늘 하루를 저의 식대로 살 뿐이에요.”
수십 년째 매일 새벽 라디오와 TV를 켜고 뉴스와 신문으로 하루를 시작해왔다.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늘을 본다는 것이다. 빛이 좋은 날이면 빛이 좋은 대로, 비 내리는 날이면 비가 오는 대로 ‘오늘은 무언가 좋은 것을 만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동안 무심히 스쳐 지나갔던 순간들을 보게 됐어요. 전체보다 부분을 미세하게 보게 됐고, 또 그 작은 부분을 통해 전체를 보기도 해요. 기존의 것에 대한 ‘발견’이지만 그래서 늘 새롭죠. 누구라도 카메라를 들고 순간들을 만나다 보면 새로운 걸 발견하게 될 거예요. 가만히 있는 것보다 몸을 움직이는 게 좋아요. 걷고, 생각하고, 멈추고, 만나고. 굉장히 재미있고 설레는 일이에요.”
전시회와 사진집을 준비하며 바쁜 한 해를 보낸 그녀는 다시 카메라를 들 예정이다. 방송인으로서의 본분도 잊지 않는다.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일을 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도전하고 최선을 다하는 그 짧은 순간순간들이 그녀 인생의 소중한 ‘한 컷’이 되리라는 걸 말이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박재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