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미생에 빠진 13가지 이유
1년간의 육아휴직을 마친 뒤 아이를 같은 아파트 단지 어린이집에 맡기고 복직을 했다. 하지만 엄마를 알아보는 아이와 아침마다 헤어지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아프기라도 하면 더더욱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를 떼어놓는 일은 정말 잔인하기 짝이 없는 감정 전쟁이었다. 한번은 강제로 떼어놓다시피 하고 어린이집을 나서는데, 굳게 닫힌 문 안쪽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여전히 새어 나왔다. 빨리 출근해야 하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온몸이 돌처럼 그 자리에서 굳은 것 같았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어린이집 문 앞에 서 있다가 지각을 하고 말았다. 그런 일을 몇 번 더 겪고 나서 결국 난 사표를 썼다. 남편과 달리 내 일은 경력이나 승진은 포기해도 프리랜서로 전환해 계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난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 그리고 여전히 프리랜서로 육아와 일을 병행 하고 있다. ‘미생’의 여사원들처럼 “애를 또 가졌느냐!”라는 인격 모독적인 말을 상사로부터 듣지는 않았지만, 여자이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받아야 하는 암묵적 비난과 불이익을 충분히 겪었다. 계약직 사원 장그래와 나는 다르다. 하지만 주류에 끼지 못한, 혹은 주류가 되기엔 부족한 여러 가지 불리한 조건을 가졌다는 점은 같다. 그래서 난 더 ‘미생’에 열광한다. 비록 나는 해내지 못했지만 장그래 사원만큼은 꼭 해내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차OO, 38세, 대전 서구, 프리랜서 워킹 맘)

우리가 미생에 빠진 13가지 이유
남편은 건설회사 해외플랜트 사업부 4년 차 사원이다. 업무가 어찌나 많은지 보통 주 4회는 야근이다. 게다가 부서의 과장이 윗분들에게 열심히 하는 모습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스타일이어서 주말에도 하루는 꼭 출근하라고 부하 직원들을 종용해 회사에 늘 매여 있는 처지다. 덕분에 얼굴 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쉬는 날 하루만큼은 집에서 같이 시간을 보냈으면 좋으련만 남편은 꼭 사회인 야구를 하러 나간다. 그거라도 안 하면 죽을 것 같다나. 그 문제로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나는 사실 교직원으로 일하고 있어서 그런지 ‘미생’처럼 무서운(?) 회사생활을 하고 있진 않은 것 같다. 저렇게 부하 직원을 마구 부릴 수도 없고 고성이 오가는 일도 없다. 그런데 ‘미생’을 보면서 내가 몰랐던 일반 회사생활의 민낯을 알게 되니 자꾸만 남편에게 미안해진다. 저렇게 힘들게 회사를 다니니 숨 쉴 구멍이 필요했을 텐데, 내가 왜 그거 하나 이해 못해줬는지…. 이번 주에는 남편에게 새 야구 글러브라도 하나 선물해줘야겠다. (허OO, 32세, 서울 양천구, 교직원)

우리가 미생에 빠진 13가지 이유
남편은 대기업 재무팀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남편의 부서는 회식이 잦다. 접대를 받을 일도 많고, 접대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했다. 그동안 남편의 회식에 대해 한 번도 자세히 물어본 적도, 특별히 궁금해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미생’에서 클라이언트 접대하는 모습을 보니 뒤통수를 ‘퍽’ 맞은 느낌이었다. 회식도, 접대도 회사생활의 연장이란 것, 나도 그 정도는 안다. 하지만 오 과장처럼 착실한 남편, 좋은 상사도 접대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여자들 있는 술집에서 접대를 하는구나, 싶어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더라. 지금까지는 남편이 “오늘 회식이야” 하면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제는 좀 신경 써서 남편을 살피게(?) 될 것 같다. 역시… 아는 게 병인가? (박OO, 35세, 서울 송파구, 전업주부)

우리가 미생에 빠진 13가지 이유
둘째 아이를 낳으면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큰아이만 키울 때는 어린이집에 보내기도 하고, 급할 때는 친정에도 맡기면서 비록 힘겹긴 했지만 회사생활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었는데, 둘째까지 생기니 아이를 더 이상 봐줄 곳도 없고 내가 들어앉는 수밖에 없더라. ‘미생’을 보면 아이 키우랴, 회사 다니랴 늘 허덕였던 나의 워킹 맘 시절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극중 영업 3팀에 새로 온 박 과장이 안영이를 가리키면서 “쟤는 결혼을 하면 선 차장처럼 되는 거고, 결혼을 안 하면 김선주 부장처럼 될 거야”라고 말했던 대목이 어찌나 마음에 콕 박히던지. 안영이는 똑똑하고 능력 있는 신입사원이지만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말을 들은 것이다. 일과 육아 사이에서 늘 전전긍긍하는 선 차장이 되거나 일만 하느라 결혼은 못한 골드미스 중 하나밖에 될 수 없다는 편협한 시각을, 내가 회사를 다니던 시절에도 남자 상사들 사이에서 느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생에 빠진 13가지 이유
(민OO, 39세, 서울 송파구, 퇴직한 전업주부)
5 씁쓸했던 계약직 시절의 기억
대학 졸업 후 회사에 입사했을 때 부모님이 정말 좋아하셨다.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회사까진 아니어도 탄탄한 기업이었다. 어머니는 번듯한 정장 한 벌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아껴둔 쌈짓돈을 쥐어주셨다. 장그래의 어머니가 빠듯한 형편에도 아들을 위해 큰맘 먹고 양복을 사주던 모습에서, 그때 그 시절 들떠 있던 내 모습이 자연스레 겹쳤다.
지금 그 정장은 내 옷장 안에 얌전히 걸려 있다. 나는 2년간 계약직 직원으로 열심히 근무했지만, 결국 정규직 입성에는 실패했다. 회사 분위기는 묘했다. 계약직 직원과 정규직 직원들이 겉으로는 잘 어울렸지만 정규직들의 은근한 무시, 나 같은 계약직들을 향한 우월감을 느낀 적도 몇 번 있다. 장그래, 안영이, 장백기, 한석율 4명의 신입사원들이 치열한 입사시험 PT를 통과해 계약직이 됐을 때는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지금은 그 자리도 그렇게 기쁘겠지만 계약이 끝난 후 너희들은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퍼뜩 들어서. 그저 드라마일 뿐인데, 알면서도 ‘미생’을 볼 때마다 주책없이 감정이입이 돼버린다.
(이OO, 27세, 경기 하남시, 취업 준비생)
6 아버지 생각나네요
고졸 학력이었지만 외국계 회사에 들어가 20년 넘게 근무하신 아버지. 아버지는 퇴근하실 때 열에 아홉은 늘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오셨다. 어린 마음에 그 모습이 너무 싫어서 아버지를 피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리곤 했다. 그때는 자주 술을 마시는 아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드라마의 대사처럼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하루가 있다”라는 걸 알게 된 지금, 새삼 가슴이 먹먹해진다. (한OO, 42세, 전북 전주시, 자영업)

우리가 미생에 빠진 13가지 이유
그동안 한국 드라마를 잘 보지 않았지만 ‘미생’은 꼭 챙겨 본다. 아내도 신기해한다. ‘미드’만 보던 사람이 웬일이냐면서. 직장인의 애환, 갑을관계의 서러움, 인간관계 문제 등 그동안 한국 드라마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부분을 섬세하게 그려내니 올해로 직장생활 19년 차인 내가 보기에도 공감이 갈 만큼 재미있다. 무엇보다 한국 드라마의 전형처럼 굳어버린 회사에서 연애하는, ‘기승전연애’ 드라마가 아니라서 더 좋고. (최OO, 46세, 경기 용인시, 회사원)
8 내 딸도 저렇게 고생하고 있을까?
내 딸은 정말 열심히 사는 아이다. 공부하라 잔소리한 기억도 별로 없는데 스스로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을 타온 적도 여러 번이고, 외국어며 봉사활동, 인턴 생활까지 부지런히 했다. 아이는 대학교 때부터 목표가 확고했다. 꼭 가고 싶은 회사가 있다면서 대학 2학년 때부터 입사 준비를 정말 열심히 했다. 그러고는 기어코 자기가 가고 싶다고 했던 회사에 합격해 내 자식이지만 속으로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딸은 남자들만 있는 부서에 배치됐다. 걱정이 좀 되긴 했지만 딸은 그런 건 개의치 않는다 했다. 이제 입사 6개월이 넘었다. 내 딸은 요즘 점점 더 지친 얼굴로 퇴근하곤 한다. 말수도 무척 줄었다. 먼저 수다를 걸어오던 아이가 말을 붙이면 한두 마디 하고 끝이다. 늘 쾌활하고 명랑했는데 이젠 집에 들어오면 씻고 자기에 바쁘다. 머리 말릴 시간도 부족해 수건을 베개에 깔고 곯아떨어질 정도다. 그러다 우연히 틀어놓은 TV에서 이 드라마를 보았다.
그야말로 전쟁터같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회사 상황을 보고 회사에서 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편도 저렇게 치열하게 생활해서 지금 자리까지 올라간 거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 새댁 시절의 내 모습도 떠올랐다. 그런데 여자 신입사원인 안영이가 팀 선배들에게 구박을 받는 모습을 보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남자들만 있는 부서에서 혹시 내 딸도 저렇게 마음고생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요즘 사회생활이 어떤지도 잘 모르면서 너라면 무조건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부추긴 게 얼마나 미안하고 속이 아리던지. 지금 힘들게 직장생활에 적응해나가고 있는 내 딸 또래의 신입사원들에게 모두 힘내라고 말해주고 싶다. (강OO, 54세, 서울 마포구, 전업주부)

우리가 미생에 빠진 13가지 이유
요즘 우리 회사는 월요일 아침마다 주말에 본 ‘미생’ 이야기하느라 바쁘다. 동료들은 모두 보는 눈치인데, 드라마를 한 편도 안 본 나는 대화에 낄 수가 없어서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보기 시작했는데, 요즘은 한 회 한 회 모두 챙겨보는 ‘폐인’이 됐다. 동료들끼리 입을 모아 하는 말은, 영업 3팀처럼 인간미 있는 팀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것. 그러나 우리들 모두 잘 알고 있다. 저건 드라마니까 가능한 판타지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영업팀 부장님으로 나오는 분 눈치 빠른 것 하며, 이해득실에 따라 확확 돌변하는 모습이 꼭 우리 부장님 같아서 깜짝깜짝 놀란다. 아, 이거 가명으로 나가야 하는데. (김OO, 35세, 충남 서산시, 회사원)
10 나는 저런 선배였던가?
우리 부서에 어리바리하고 사회 경험도 없는, 그야말로 애송이 같은 신입사원이 있다. 꼭 장그래처럼 말이다. 늘 바쁘게 돌아가는 회사생활에서 장그래같이 빠릿빠릿하지 못하고 버벅대는 신입사원은 사실 반갑지만은 않다. 드라마니까 장그래가 보기 좋지만, 현실의 회사생활은 늘 빨리빨리 일처리를 해야 하니 말이다. 그런데 한 회, 두 회 ‘미생’을 볼수록 나는 어떤 선배인가에 생각이 미쳐서… 부끄럽다. 특히 김 대리 캐릭터를 보면서 속으로 뜨끔했다. 아무것도 몰라 쩔쩔매던 신입 시절에는 김 대리처럼 잘 챙겨주는 선배가 없다며, 자기 일하는 데만 바쁘고 정작 제대로 일을 가르쳐주지도 않으면서 혼내기만 한다며 친구들에게 선배 뒷담화를 하곤 했는데, 이제 대리가 된 나는 정작 그런 선배가 돼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윤OO, 35세, 경기 성남시, 회사원)
11 여직원들 마음 이해가 가
난 남자이지만 여자들의 사회활동에 대해 공감하는 계기가 됐다. 남자인 내가 보기에도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직장이란 곳은 여성들이 일하기 힘든 환경이라는 게 사실인 것 같다. 치열한 회사생활에서 하루하루 잘 버텨내는 모든 여성 직장인들 응원합니다. 파이팅!!!
(장OO, 29세, 경북 문경시, 회사원)

우리가 미생에 빠진 13가지 이유
나는 ‘미생’을 보면서 대리만족 한다. 왜냐고? 올해 초 대학을 졸업할 때만 해도 바로 취직이 될 줄 알았는데, 아직도 자격증 따러 학원이나 다니는 취업 준비생 신세이기 때문이다. 함께 학원을 다니는 친구들은 ‘미생’에서 신입사원들이 깨지고 구박받는 모습을 보면서 회사생활이 겁난다고들 하는데, 난 그런 살벌한 회사라도 좋으니 빨리 출근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김OO, 24세, 경기 안양시, 취업 준비생)
13 회사 관두고 싶은 내 모습이 보여
영업일을 하고 있지만 인맥이 화려하지도, 언변이 뛰어나지도 않고, 성격까지 내성적인 편이라 그런지 일하는 것이 점점 더 힘겹다. 실적이 시원찮다 보니 회사에서도 늘 기를 못 편다. 거래처 사정 봐주느라 단호해야 할 때도 주저하는 박 대리가 나온 에피소드에서 얼마나 눈물이 났는지 모른다.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서 이제 그만 관두고 싶지만, 아이들과 아내를 보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출근하는 그 모습이 마치 내 모습 같았다. 나는 여전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지만, 마지막에 가서 당당하게 나선 박 대리를 보면서 왠지 모를 위안을 받았다. (김OO, 37세, 부산 동래구, 회사원)
드라마 ‘미생’은…
바둑만이 인생의 전부였던 주인공 장그래가 프로 입단에 실패한 뒤 무역회사에 입사하면서 벌어지는 ‘오피스’ 드라마다. 고졸 출신 낙하산인 장그래가 ‘영업 3팀’에 합류하면서 인간적인 상사 오 과장, 김 대리와 함께 편견과 난관을 헤쳐 나가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에서 대리만족과 감동을 느낀다는 평이 압도적. 또 주인공 장그래의 신입사원 동기들인 알파걸 안영이, 모범생 장백기, 현실파 한석율이 좌충우돌하며 적응해가는 모습, 여기에 마치 우리 주변에서 따온 것처럼 현실감 넘치는 직장 내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이야기가 현실감 있게 펼쳐져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사고 있다.
매회 어록 풍년!
‘미생’ 속 공감 백 배 말, 말, 말
찰나의 대사 속에도 직장생활의 애환이 묻어나고, 처세의 정석이 녹아 있으며, 인생살이의 교훈까지 줬던 ‘미생’ 속 촌철살인 명대사를 모았다.
● 바둑에 이런 말이 있다. 이왕 들어왔으니 어떻게든 버텨봐라. 여기는 버티는 것이 이기는 곳이야. 버틴다는 건 완생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우린 아직 다 미생이야.
(오 과장이 장그래에게)
● 꼼수는 정수로 받습니다. (장그래)
● 기본도 안 된 놈이 빽 하나 믿고 에스컬레이터 탄 세상, 나는 아직 그런 세상 지지하지 않아. (오 과장이 장그래에게)
● 그저 걸을 뿐이다. 매우 성실하게 한 걸음 한 걸음. 그것이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의 숙명이다. (장그래)
● 어른이 되는 건 나 어른이오, 떠든다고 되는 게 아냐. 꼭 할 줄 알아야 되는 건 꼭 할 수 있어야지. (어머니가 장그래에게)
● 취직해보니까 말이야. 성공이 아니고 그냥 문을 하나 연 느낌이더라고. 어쩌면 우린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다가오는 문만 열어가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어. 중요한 건 자기가 그 순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달린 것 아닐까.
(김 대리가 장그래에게)
● 성취 동기가 분명한 사람은 토네이도와 같아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거나 피해를 주지. 하지만 그 중심은 고요하잖아. 중심을 차지해. (오 과장이 장그래에게)
● 뭔가 하고 싶다면 일단 너만 생각해. 모두를 만족시키는 선택은 없어. 그 선택에 책임을 지라고. (친구가 박 대리에게)
● 순류에 역류를 일으킬 때 즉각 반응하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상대가 역류를 일으켰을 때 나의 순류를 유지하는 게 상대방의 처지에서 보면 역류가 되는 거죠. (장그래가 동기들에게)
● 우리 모두에겐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 (장그래)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정성민(프리랜서) ■사진 제공 / tv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