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데뷔 이후 이슈의 중심에서 멀어져본 적 없는 이승철(48)이 또 한 번 떠들썩하게 뉴스를 장식했다. 지난 11월 초 지인의 초대로 일본을 방문하려다 공항에서 입국이 거부된 사건이 발단이 됐다. 부인 박현정씨와 출입국사무소에서 4시간가량 억류돼 있다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지난 8월 탈북청년합창단 ‘위드유’와 함께 독도에서 통일송을 부른 것을 문제 삼았다는 추측이었다. 실제로 당시 출입국사무소 직원은 “최근 언론에 나온 것이 문제가 된다”라는 식의 발언을 했고 그가 부당한 처사를 문제 삼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자 그제야 20년 전 대마초 흡연 사실을 거론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마초 사건 이후 일본을 15차례 입국하면서도 아무런 제재를 받은 적이 없고, 현지 활동에도 제약을 받지 않았던 그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였다. 일본이 독도 관련 한국 연예인 블랙리스트를 따로 관리하고 있다는 논란은 한일 양국의 외교 문제로까지 번졌다. 외교부는 주한 일본대사관 관계자를 불러들였고, 정부가 최근 철회했던 독도입도지원센터 건립이 재추진되는 움직임까지 일고 있다. 개인의 불유쾌한 경험으로 간과할 수 있었던 일을 공론화시키고 여론과 관계 부처의 움직임을 이끌어낸 건 이승철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슈의 중심에 선 상황에서 만난 이승철은 ‘큰일’을 낸 사람치고 평온해 보였다. 마땅히 할 일을 했다는 느낌이랄까.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여전히 그다운 강한 목소리를 냈다.
“입국 거부라는 것이 저 한 사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을 무시한 처사라고 생각해요. 그들 입장에서는 일개 한국 가수 하나를 입국 거부하는 게 별일 아닐 수 있겠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독도 문제가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큰 이슈가 됐고 월스트리트 저널에도 보도가 됐어요. 김장훈씨 표현대로 자충수를 둔 거죠. 그동안 우리나라를 무시하고 과거의 잘못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려 했던 일본의 무책임함이 자초한 일이라고 봐요. 철회됐던 독도입도지원센터 건립도 다시 논의되고 있고, 전 세계가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으니 앞으로는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요.”
사건이 있은 뒤 그는 독도에서 탈북청년합창단과 함께 불렀던 ‘그날에’ 음원을 무상 배포하기로 하고 향후 발생되는 수익 역시 통일과 독도, 평화와 관련된 단체에 기부하기로 했다. 음원은 전 세계인들이 함께 들을 수 있는 영어 버전으로도 공개됐다. ‘이 음악을 계기로 전 세계 사람들이 우리의 아름답고 멋진 땅 독도와 통일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해볼 수 있기를 소망하는’ 마음에서였다. 그의 이와 같은 대응은 양국 간에 싸움을 붙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공존하자는 것, 바로 그가 진행하고 있는 ‘ON 캠페인(One Nation Campaign)’과 그 뜻을 같이한다.
희망과 평화의 메시지 담은 ‘ON 캠페인’
일본과의 독도 영유권 논쟁으로 불거지게 됐지만 독도 음악회는 어떠한 정치적인 의도도 담겨 있지 않은 순수 평화 캠페인의 일환이었다. ‘그날에’는 극복과 화해를 주제로 통일과 인권 그리고 세계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노래다. 이를 반목과 갈등의 씨앗으로 본 건 일본의 삐뚤어진 시선에서 비롯된 일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독도에서 노래하게 했을까? 탈북청년합창단과의 만남이 그 시작이었다.
“올봄 탈북청년합창단 친구들이 저를 찾아왔어요. 독도에서 함께 통일에 대한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요. 처음에는 거절했어요. 통일이란 주제가 제가 감당하기엔 너무 예민할 수 있고, 정치적인 의도로 비춰질 여지가 있거든요. 그런데 이 친구들이 독도에 가기 위해 힘들게 비용을 마련해온 걸 보고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들에게 이 일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죠. 남한과 북한이 유일하게 같은 목소리를 내는 이슈가 독도와 위안부 문제예요. 그래서 독도에서 음악회를 열게 된 거예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전 세계에 우리의 목소리를 알리자는 생각에 영어 버전도 만들고 UN 본부에 가서 노래도 하자고 제안했죠.”
‘하나의 나라’를 뜻하는 ‘One Nation’의 이니셜을 따 ‘ON 캠페인’이라 이름 붙은 이 프로젝트는 전 세계 공용어인 음악으로 통일의 염원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의 이 같은 뜻에 동참한 각계 인사들의 참여가 이루어졌다. 엠넷 ‘슈퍼스타K 시즌5’에 참가했던 밴드 ‘네이브로’의 정원보가 통일송 ‘그날에’를 만들었고, 소치 동계올림픽 폐막식에서 이승철과 인연을 맺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양방언이 기꺼이 편곡을 맡아 뜻을 함께했다. 노래 녹음에는 머라이어 캐리와 마이클 잭슨의 앨범 믹싱 엔지니어로 일했던 스티브 핫지가 재능기부로 힘을 보탰고, 스페인 출신의 유명 화가인 에바 알머슨은 ‘ON 캠페인’ 프로젝트를 상징하는 배지 디자인을 맡아 아름다운 그림으로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다.
“에바에게 참 고마운 게, 길게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한 번에 오케이를 해줬어요. 덕분에 캠페인이 좀 더 트렌디한 옷을 입게 된 것 같아요. 젊은 친구들의 관심을 모으는 데도 도움이 됐고요.”
합창단과는 5개월 동안 틈 날 때마다 모여 연습을 했다. 광복절 하루 전날인 8월 14일, 많은 이들의 뜻과 염원이 담긴 노래가 독도에 울려 퍼지던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노래를 부르는 이와 듣는 이 모두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통일의 염원이 이토록 가슴 절절한 것임을 다시금 일깨워준 공연이었다.
노래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독도 공연으로 첫 단추를 꿴 ‘ON 캠페인’은 보름 뒤 하버드대학과 UN 본부에서도 울려 퍼졌다. 공연을 한 하버드대 메모리얼 처치는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 등 세계적인 명사들이 특강을 열었던 곳이다.
“하버드대를 선택한 건 국제사회의 인권에 관심이 많은 세계 리더들이 모인 곳이라고 생각해서였어요. UN 본부는 세계 평화를 상징하는 곳이었고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 공연을 계기로 많은 외신들의 주목을 받았고, 세계인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독도가 시작이었고 이제 중간 지점에 와 있어요. 앞으로도 세계의 여러 뮤지션들과 공연하며 평화를 위한 목소리를 내볼 생각이에요. 단순히 분쟁 지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통일과 인권을 위한 외침이 돼야죠.”
마음이 움직였고 몸이 따라갔다
3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스타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부정할 수 없는 음악적 재능과 인기로 톱스타의 삶을 살아온 그가 언제부터 우리 사회의 어두운 그늘로 눈을 돌리게 된 걸까? 그는 2011년 김천소년교도소 재소자들로 이뤄진 ‘드림스케치’ 합창단을 지휘하고, 지난해에는 문제아라고 불리는 대한민국 하위 3% 학생들로 합창단을 꾸려 폴란드 국제합창대회에 도전한 ‘송포유’로 감동을 안겼다.
“그동안 개인적인 기부를 해왔지만 그런 프로젝트를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김천소년교도소 아이들을 만나며 음악이 가진 힘을 깨닫게 됐죠. 맨 처음 교도소에 갔을 때 아이들의 눈빛은 어마어마하게 강하고 무서웠거든요. 20년 형을 받고 수감 중인 소년수들의 눈빛을 상상해보세요. 그런데 노래를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그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사랑과 정을 느끼고, 세상을 다시 바라보는 힘이 생기더라고요. 그걸 옆에서 지켜보면 저절로 깨닫게 돼요. 음악이 가진 힘을요.”
‘송포유’에서 그가 가르쳤던 성지고 출신 임형우는 가천대학교 실용음악과에 진학했다. ‘슈퍼스타K’에 출연해 다시 스승 앞에 선 ‘제자’를 보며 노래가 아이들에게 어떻게 희망이 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탈북 청년들과 함께하게 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들은 벽을 쌓고 살아가요. 그들이 쌓은 게 아니라 우리가 쌓은 벽이에요. 죽을 고비를 넘겨 우리에게 왔다 다시 돌아가거나 제3국을 선택하는 탈북자가 10%가 넘는다고 해요. 그만큼 한국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고통이 큰 거죠. 김천소년교도소 아이들은 군기가 들어 있었고, 성지고 아이들은 그래도 아직 어린아이들이었지만 이 친구들은 무언가를 애써서 해야 할 의지마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어요. 그런 친구들이 힘들게 돈을 모아 노래를 하고 싶어 한다는 건 그만큼 절실하다는 거예요. 독도에서 통일을 노래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죠.”
마음이 움직였고 몸이 따라갔다. 그리고 결국 뜻하는 바를 이뤄냈다. 그가 이처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뮤지션으로 거듭나게 된 데는 아내 박현정씨의 내조가 있었다. “처음엔 안 한다고 했는데 집사람이 나를 괴롭혔다”라는 그의 우스갯소리처럼 박현정씨는 남편의 능력이 가장 아름답게 발휘될 수 있도록 돕는 숨은 조력자다. 하버드대와 UN 본부에 편지를 보내 설득하는 일도 박현정씨의 공이 컸다. 매년 휴가를 반납하고 아프리카 차드로 봉사활동을 떠나는 등 결혼 후 그의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결혼을 한 뒤 기독교로 개종하며 믿음을 갖게 된 것 또한 그의 인생의 새로운 변화였다.
“삶의 모티브가 달라졌어요. 삶을 바라보는 포인트와 키워드가 달라졌다고나 할까요? 음악도 중요하지만 음악을 통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느냐를 생각해보게 됐어요. 전에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도우려면 돈을 보내주면 되지 굳이 그 먼 곳까지 가야 되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20시간 비행기를 타고 가게 돼요.”
그가 고 박용하의 뜻을 이어 짓기 시작한 아프리카 차드의 학교는 벌써 4곳이 지어졌다. 학교를 짓는 비용은 대부분 그의 공연 수익금에서 나온다. 10년간 차드에 10개의 학교를 짓는 것이 목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늘 곁에서 ‘해결사’ 역할을 자처하며 자신을 지지해주는 아내가 있기에 힘을 얻는다. 덕분에 박현정씨는 태어나서 이렇게 일을 많이 해본 건 처음이란다. 대학 졸업 후 사업가로 줄곧 바쁜 인생을 살아온 그녀가 이런 말을 할 정도이니 짐작이 된다. 하긴 세계적인 그룹 ‘U2’의 보컬 보노에게 합동 공연을 청하는 편지를 쓰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일은 제가 벌리고 아내가 뒷수습을 해요(웃음). 아무래도 사업을 했던 사람이다 보니 추진력도 있고 섬세해요.”
UN 본부와 하버드대 공연을 조율하면서 아내와 싸우기도 많이 했단다. 그래도 계속해서 일을 벌이는 걸 보면 천생연분, 두 사람의 궁합이 여간 잘 맞는 것이 아닌 듯하다.
인생의 방향을 잡아주는 아내 그리고 아이들
2007년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어느덧 결혼 8년 차를 맞이하고 있다. 뉴욕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있는 큰딸과 애교 많은 일곱 살 둘째 딸, 누구보다 든든한 인생의 동반자로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아내, 세 여자에 둘러 싸여 있는 이승철은 ‘결혼 참 잘했다’ 싶을 정도로 행복해 보인다. 집에서는 아이 아침밥에 김으로 하트를 만들어주는 아빠, 그리고 ‘미슐랭 레스토랑을 통틀어 세상에서 가장 고기를 잘 굽는 남편’이란다. 아이들 이야기를 꺼내자 미술을 배운 지 3년 만에 명문대 다섯 곳에서 장학금으로 입학하라는 제안을 받은 큰딸 자랑에 여념이 없다.
“큰애가 대학생, 작은아이가 일곱 살이에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다 보니 조금 달라요. 큰애가 작은애한테 엄마처럼 해요. 큰딸이 그더라고요.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과연 엄마, 아빠처럼 해줄 수 있을까?’라고요. 그 한마디가 어찌나 뭉클하던지. 조금 있으면 시집간다고 할 것 같아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위해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한 걸음 한 걸음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30년이란 시간 동안 ‘국민 가수’로 받은 사랑에 대해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 소유보다 나눔으로써 얻어지는 삶의 기쁨을 그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대중에게는 ‘보컬의 신’, 후배 가수들에겐 가요계 대선배이자 멘토, 가수를 꿈꾸는 지망생들에겐 냉철한 심사위원, 수많은 타이틀을 가진 그에게 욕심나는 타이틀이 있는지 물었다.
“없어요. 저는 늘 만족해요. 사람이 매번 잘될 수는 없겠죠. 조바심 내지 않고 물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스타일이에요. 저 고집스럽게 보이죠? 안 그래요. 와이프 말도 얼마나 잘 듣는데요(웃음).”
일상의 행복을 그리는 화가
에바 알머슨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장태규(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