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민(30)은 2007년까지 한화 이글스와 두산 베어스에서 활동한 프로야구 선수였다. 평생 야구밖에 몰랐다던 이 남자는 어느 날 미련 없이 자신의 세계를 깨고 나왔다. 우연히 본 뮤지컬 한 편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김종욱 찾기’에 매료된 관객이었던 그는 3년 뒤, 주인공으로 무대에 올랐다.
몇 편의 뮤지컬과 드라마를 거치고 ‘무정도시’에서 정경호의 10년 지기 친구 김현수 역을 꿰차며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명랑하고 쾌활하다 못해 능글맞기까지 했던 ‘마녀의 연애’ 속 용수철,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대중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각인시킨 ‘연애의 발견’ 속 도준호, 촬영이 한창인 첫 주연작 JTBC ‘순정에 반하다’의 냉철한 변호사 이준희까지. 부지런히도 달음질해왔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살았지만, ‘아무리 바빠도 연애할 시간은 있다’라는 명문을 몸소 증명한 그. 정확히 「레이디경향」과의 인터뷰 이틀 뒤 터진 ‘오로라 공주’ 전소민과의 열애설에 다시금 연락을 하자, 쿨하게 인정하며 “알콩달콩 잘 만나고 있다”라는 소식까지 전해왔다.
프로야구 선수 출신이라는 수식어를 좋아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본인의 의사에 상관없이 그 말은 지금도, 앞으로도 배우 윤현민에게 오래도록 따라다닐 꼬리표일 거예요. 데뷔 초에는 정말 싫어했어요. 자격지심이라고 해야 하나? 연기로 평가받고 싶은데, 야구 선수라는 이력 때문에 나를 봐주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였죠.
지금은 어때요? 그때 왜 그렇게 싫어했는지 모를 정도로 좋아요(웃음). 주변에서도 “연기하는 애가 야구까지 했었어?”라며 한 번 더 알아봐주시고요.
선수 시절에 비해 지금은 외양도 그렇고 분위기까지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체중을 20kg 정도 뺐어요. 다이어트를 해도 근육 때문에 몸이 두꺼워 보여서 고민이었는데, 한 달 정도 시체처럼 누워만 있었더니 그제야 몸이 슬림해지더라고요. 근육 빼느라 고생했어요.
독하게 마음먹고 시작한 연기 생활이지만 처음부터 이름을 알리진 못했어요. 혹독하고 힘들었던 신인 시절을 돌아보면 어때요? 사실 무명 시절에도 그렇게 힘들진 않았어요. 기대를 안 했거든요. 직업 바꿀 때는 어느 정도 계획을 세우잖아요, 10년 안에만 인정받자고 다짐하고 야구복을 벗었어요. 서른 중반 즈음에는 드라마에 출연할 수 있을 거라고,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거라고 생각했죠. 제 계획보다 훨씬 빨리 자리 잡은 거예요.
계획보다 앞서갈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성실한 태도도 한몫했나 봐요. 주변 스태프나 동료들이 하나같이 ‘윤현민은 성실한 사람’이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연기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체계적으로 배우지도 못했어요. 배우로서 뭘 잘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 현장에서 꾀부리지 않고 더 열심히 뛰어다니는 것밖에 없더라고요. 인사는 야구부 생활 덕분인지 몸에 뱄어요. 현장에서도 형, 누나들이랑 친하게 지내는 편이에요. 선배들은 아무래도 깍듯한 후배를 좋아하니까.
장동건, 김승우, 공형진 등이 속한 영화인 야구단 ‘플레이 보이즈’에서도 사랑받고 있는 멤버라고 들었어요. 야구를 관뒀지만, 전설의 포수 ‘요기 베라’의 명언처럼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네요. 은퇴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예요. 데뷔하기도 전에 아는 형 따라 선배님들 연습 경기를 구경 갔다가 인연이 닿았죠. 대한민국 1% 배우들이 속한 곳이잖아요. 함께하게 돼서 행운이고 영광이에요. 형들 보는 것 자체가 연기 수업이거든요. 매주 일요일마다 경기가 있는데, 스케줄 때문에 작년에는 한 번밖에 못 갔어요. 아직 팀에 별 도움은 안 되는 것 같아요(웃음).
순정에 반하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드라마 속 윤현민은 누군가의 친구였다. 정경호의 베스트 프렌드였고, 박서준의 죽마고우였으며 정유미의 소꿉친구였다. 차분히 담금질의 과정을 거친 그는 이제 JTBC 드라마 ‘순정에 반하다’를 통해 누군가의 무엇이 아닌, 극을 이끄는 주연으로 활약하고 있다. 작품에서 친구로 만나 진짜 ‘절친’이 된 정경호와 여주인공 순정(김소연 분)을 두고 삼각관계를 이룬다.
감초 역할부터 지금까지 차근차근 걸어왔어요. 마침내 첫 주연이라니, 축하드려요! 하하! 감사합니다. 요즘은 정말 좋아요. 어깨가 무겁기도 하지만, 동료들과 더 오래 현장에 있을 수 있다는 게 행복해요. 예전에는 제 신이 그렇게 많질 않았거든요(웃음). 일주일 내내 밤새며 촬영하는데도 마냥 기뻐요.
현장 체질인가 봐요. 작년에만 단막극까지 총 여섯 작품을 했어요. 동료 배우들이 들으면 그걸 어떻게 다 했냐고 깜짝 놀랄 정도예요. 그런데 저는 드라마 끝나고 일주일만 쉬어도 몸이 근질근질하던데요?
‘순정에 반하다’를 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대본을 한 호흡으로 4부까지 쭉 읽어내려 갔어요. 극이 끊이지 않고 매끄럽게 연결되는 게 좋았어요. 제가 맡은 캐릭터가 냉철하고 차가운 인물이라 전작과 다른, 반전의 모습을 보여드릴 수도 있겠다 싶었고요.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감독님이 드라마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에 공감했기 때문이에요.
어떤 점에 공감 했나요? 드라마가 이 사회에 이바지하는 바가 큰 것 같아서 나쁜 드라마는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말이요. 배반, 음모, 막장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착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감독님 생각에 100% 동의해요.
하지만 정작 맡은 역할은 성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냉철한 변호사예요(웃음). 전작 ‘연애의 발견’ 속 톡톡 튀는 도준호와는 정반대의 캐릭터죠. 작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게 배우로서의 목표예요. 사실 지금까지 매 작품마다 의도적으로 그래왔어요. ‘무정도시’에서는 까불거렸고, ‘감격시대’에서는 묵직했고, ‘연애의 발견’의 준호는 푼수데기 같았고요. 다시 무거운 분위기의 역할을 맡을 때가 온 거죠(웃음).
정경호씨와는 벌써 두 번째 작품이에요. 최근에 함께 스페인 여행을 다녀왔다는 제보도 입수했습니다만. 친구랑 떠난 첫 배낭여행이었어요. 해외여행은 야구 선수 시절에 전지훈련 간 게 다였거든요. 한 달 정도 스페인 전역을 걸어 다녔어요. 맛있는 것 먹고, 구경하고, 축구도 봤어요. 무려 메시가 출전한 바르셀로나의 경기를! 둘 다 좋은 기억만 남기고 와서 드라마 끝나면 또 같이 떠나기로 했어요. 다음 행선지는 뉴욕이에요.
두 사람이 워낙 친해서 촬영 현장이 한결 편안할 것 같아요. 요즘은 주 7일 만나는 중이에요. 서로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해요. 어제는 경호 형 촬영 분량이 없는데도 현장에 나와서 모니터링을 해줬어요. 제가 좀 헤맸더니 슥 지나가면서 “여기서 이렇게 해봐” 하고 이야기해주더라고요. 진짜 고마웠죠. 제가 놓치는 부분을 알려주니까. 마찬가지로 형이 조언을 구할 때도 있어요. 함께 허심탄회하게 의논할 수 있어서 도움이 많이 돼요. 연기적으로도 그렇고 삶의 태도 같은 것도 한 수 배우고 있어요.
함께 출연 중인 여주인공 김소연씨 칭찬도 해주세요. 섭섭해할 수도 있으니! 경호 형이랑 매번 놀라요. 성실의 ‘끝판왕’이에요. 여배우라 준비할 것도 많고 늦을 수도 있는데,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늘 먼저 대기하고 있어요. 현장에서 내뿜는 에너지도 대단하고요. 이런 여배우가 어디 있나 싶어요(웃음).
노래 되고 춤 되는 팔방미남
안방극장에서 그를 처음 본 건 얼마 되지 않지만, 사실 윤현민은 뮤지컬계에서 ‘김종욱 찾기’, ‘총각네 야채가게’, ‘스프링 어웨이크닝’ 등을 거치며 실력을 인정받아온 스타다. 매년 무대에 서는 게 자신과의 약속이지만 올해는 드라마 스케줄이 많아 걱정이라는, 그의 애교 섞인 투정을 들으며 생각했다. 못하는 게 없는 이 ‘팔방미남’에게 그 넓은 마운드가 좁게 느껴진 건 그리 이상할 것도 아니라고.
‘연애의 발견’ 때 OST 제안도 받았다면서요? 사실 되게 하고 싶었어요. 음악 감독님이 저를 위한 노래까지 만들어놓은 상태였는데, 촬영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부르진 못했어요. 그래서 이번엔 꼭 하겠다고 어필하는 중이에요. 제작발표회 때 노래 부를 기회가 있어서, 내려오자마자 감독님 찾아가서 어땠냐고 물어봤죠(웃음).
1년에 한 번씩 무대에 오르는 게 목표라고 했어요. 여건이 허락하는 한 꼭 그러고 싶어요. 사실 요즘에 드라마 하느라 공연을 자주 못해서 좀 헛헛했거든요. 최근에 대학로에서 촬영이 있었는데, 2~3시간 정도 짬이 나더라고요. 공연할 때부터 알던 팬들 불러서 밥 사줬어요. 옛날 공연할 때 생각이 많이 났어요.
뮤지컬이나 연극하는 분들은 ‘무대의 맛’ 때문에 놓칠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관객과의 찌릿한 교감이나 음악이 주는 행복이 대단해요. 그리고 무대 연기가 TV 연기에도 도움이 많이 돼요. 피드백이 바로바로 나타나거든요. 제 연기가 어색하면 관객들이 바로 반응을 보여요. 그 안에서 여러 가지를 시도도 하고, 실패도 해보면서 자신에게 맞는 색을 찾는 거죠.
이렇게 연기를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처음 배우가 되겠다고 했을 때는 부모님 반대가 심했다고 들었어요. 어머니께서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셨어요. 결혼과 동시에 연기를 그만두셨지만 그 세계를 잘 알다 보니 걱정이 많으셨대요. 당연히 반대도 심했고요. 지금이요? 물론, 아주 좋아하시죠!(웃음)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요? 선배들에게 예의 바르고,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배우. 그래서 촬영장의 동료들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앞으로도 차근차근 건강한 모습으로 삶의 과정을 잘 밟아가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짓궂은 마지막 질문이에요. 윤현민에게 야구란? 한때의 추억.
■글 / 서미정 기자 ■사진 / 이기영(쟈뎅 드 라망, 02-3445-2927) ■리터칭 / 김도훈 ■의상&액세서리 협찬 / 라코스테 라이브·세인트제임스·어그 오스트레일리아·에잇세컨즈·캘빈클라인 진·타미힐피거데님(02-3446-7725) ■헤어&메이크업 / 보이드바이박철(02-3443-0999) ■스타일리스트 / 김명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