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배우들과 연극 무대 준비하는 배우 서광재

장애인 배우들과 연극 무대 준비하는 배우 서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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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배우들에게 연기를 가르치고, 그들과 호흡을 맞추며 무대를 준비하는 게 어렵지 않냐고 물었다. 좀 더 기다려주기만 한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이 베테랑 배우는 말한다.

장애인 배우들과 연극 무대 준비하는 배우 서광재

장애인 배우들과 연극 무대 준비하는 배우 서광재

최초로 시도되는 장애인&비장애인 2인극
배우 서광재(55)는 요즘 특별한 공연 연습을 시작했다. 촬영 스케줄이 없는 날에는 꼭 서교동의 작은 연습실로 출근한다. 그곳에는 어김없이 먼저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두 남자가 있다. 서광재가 지난 3월부터 연기 지도를 하고 있는 ‘제자’이자 함께 공연할 파트너인 장애인 배우 길별은(47), 강민휘(35)다. 이들 세 배우는 2인극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장애인 아들과 비장애인 아버지의 갈등과 회복을 그리는 이야기(공연명 미정)로, 오는 12월 관객들 앞에 설 예정이다. 이 공연을 기획한 피플지컴퍼니 김은경(48) 이사는 “비장애인 가정에 장애인 자녀가 태어나면 ‘나를 왜 이렇게 낳았냐’, ‘너는 왜 그렇게 태어났냐’ 이러면서 서로가 다름을 극복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꺼내놓고 같이 고민해보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이번 공연에서 아버지 역할을 맡은 서광재는 1990년 KBS 22기 성우로 데뷔해 드라마와 영화, 연극 무대를 자유롭게 오가며 수많은 작품에서 존재감 있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고, 최근에는 KBS-1TV 드라마 ‘징비록’에 출연 중인 베테랑 배우다. 얼마 전에는 (사)한국장애인방송연기자협회 이사로 취임했다. 장애인 아들 역할은 실제로 장애를 앓고 있는 길별은, 강민휘가 더블캐스팅(한 배역에 두 명의 배우가 번갈아 출연하는 것)됐다. 보통은 장애인 역할을 비장애인 배우가 맡아 ‘연기’를 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 공연에서는 장애인 배우가 직접 배역을 맡아 장애인의 고민과 생각을 더욱 진실하게 전한다. 서광재의 말에 의하면 장애인 배우와 비장애인 배우가 어우러져 2인극을 시도하는 것은 연극계 최초의 일이다. 러닝타임 내내 등·퇴장 없이 오롯이 무대 위에서 연기해야 하기 때문에 베테랑 연극배우들도 진땀을 쏟을 만큼 어려운 장르가 바로 2인극이다. 또 오직 두 명의 배우만 등장하기 때문에 연기력, 호흡, 집중력, 무대 장악력 등 어느 것 하나라도 삐끗하면 극 전체가 흔들리고 만다. 그런데 이토록 어려운 2인극 공연에 장애인 배우와 비장애인 배우가 함께한다니 우선은 놀라움이, 다음에는 호기심이 생긴다. 이 세 배우, 과연 어떻게 호흡을 맞춰갈까?

혼신의 힘을 다한다는 것
“장애인 배우와 공연을 준비한다니까 주변에서 어렵지 않냐, 힘들지 않냐, 가능한 거냐, 라고 많이들 물어보세요. 그런데 해보니까 비장애인 배우들끼리 연기할 때보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할 뿐이지 별로 다를 게 없어요. 이 친구들이 대사를 하고 연기를 마칠 때까지 좀 더 기다려주기만 하면 되더라고요.”

통상 연극이나 뮤지컬은 2, 3개월 정도 연습하지만, 이 공연은 겨울 공연을 이른 봄부터 준비하고 있다. 두 배의 노력이 들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두 배만 더 노력하면 된다니, 연기라는 영역에 장애는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서광재는 연기는 세련된 테크닉보다는 진정성이 느껴지도록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오히려 두 배우의 강렬한 에너지에 자신이 감당이 안 돼 벅찰 때가 많다며 민망한 듯 웃는다.

“연기의 핵심은 감정 전달이거든요. 비장애인처럼 유창하게 대사를 하지 못하고 몸의 움직임이 조금 다를 뿐, 이 친구들은 제가 만났던 여느 배우들 못지않게 감정 표현이 아주 깊고 강렬해요. 장애가 있다고 해서 연기의 재능이 모자란 것은 결코 아니에요.”

넉 달 남짓한 시간 동안 함께 몸을 부대끼고 극을 만들어오면서 이 같은 생각을 갖게 됐지만 서광재도 처음부터 확신이 있었던 건 아니다. 자신도 두 배우를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의구심과 편견이 있었음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배우가 함께하는 2인극을 준비 중인 강민휘, 서광재, 길별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배우가 함께하는 2인극을 준비 중인 강민휘, 서광재, 길별은.

“연기 수업 첫날, 무척 당황했어요. 지레짐작으로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가르쳐야 될 거라고 생각해 기초 수업을 준비해 갔거든요. 그런데 웬걸요! 대사 한 토막, 지문 한 줄을 연기하는데,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게 보이더라고요. ‘아! 내가 너무 얕잡아봤구나’ 싶어 부끄러웠죠.”

그 후 서광재는 제자이자 동료 배우인 길별은, 강민휘를 바라보는 시선을 싹 바꿨다. 제자들이 연기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 보니 가르치는 일도 신이 났다. 다음 수업까지 10번 연습해오라고 하면 ‘거짓말 좀 보태서’ 100번을 연습해오니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더란다. 두 배우와 연습을 거듭할수록 서광재는 자신이 그동안 매너리즘에 빠졌었다는 것도 느꼈다. 오랫동안 연기자 생활을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깊은 고민 없이 비슷하게 연기해왔다는 걸, 온몸으로 몰입해 연기하는 두 배우를 보며 깨달은 것이다.

우리는 배우입니다
사실 이번 공연에서 장애인 아들 역할로 더블캐스팅된 길별은, 강민휘는 장애인 배우들 세계에서는 이미 유명 스타다. 연기자로 살아온 세월도 짧지 않다. 길별은은 태어날 때부터 뇌병변 장애를 앓고 있는 2급 지체장애인이지만, 그는 “남들보다 더 많이 연습하는 것으로 부족함을 극복한다”라고 말한다. 2004년 뮤지컬 ‘크리스마스 캐럴’로 데뷔한 그는 그동안 연극, 뮤지컬, 드라마, 영화 등에 활발히 출연해왔다. 최근에는 tvN 드라마 ‘갑동이’에서 주인공 하무염(윤상현 분)의 아버지 하일식 역을 맡아 짧은 출연에도 ‘신스틸러’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강민휘는 국내 첫 다운증후군 배우로 유명하다. 2005년 영화 ‘사랑해 말순씨’에서 다운증후군 장애인 재명 역을 맡으며 데뷔했고, 이후 KBS-2TV 드라마 ‘안녕하세요 하느님’, ‘달자의 봄’ 등의 드라마와 연극, 뮤지컬, 영화에 출연했다. 생후 6개월 만에 다운증후군 판정을 받은 지적장애인이지만 움츠러들지 않고 꿋꿋하게 배우의 길을 걸어왔다. 길별은과 강민휘는 이번 공연을 위해 아침 7시에 연습실에 나와 꼬박 12시간 넘게 연기 연습을 한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연기 연습을 하는 이들의 성실함에 주변 사람들이 놀랄 정도다. 강민휘는 “발음이 비장애인보다 부정확해서 하루라도 발성 연습을 쉬면 혀가 굳어버리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라고 담담히 말한다.

“서광재 선생님은 저희를 볼 때 한계를 짓지 않으세요. 장애가 있는 것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연기 선생님들도 많았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은 아무리 어려운 연기도 늘 ‘한번 해봐라.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해주세요. 저희한테 큰 동기부여를 해주는 고마운 분이세요.”

길별은, 강민휘 두 배우의 갑작스러운 진심 고백에 배우 서광재는 민망한 듯 “이 친구들이 인터뷰라고 애교를 부리네!”라며 핀잔을 줬지만, 입꼬리에 숨길 수 없는 기분 좋은 웃음이 번져나갔다. 자리를 뜨기 전, 그는 마지막으로 기자에게 당부를 했다.

“재능 기부라는 말은 쓰지 말아주세요. 함께 공연을 준비하면서 제가 더 많이 배우고 있는데, 그런 말은 참 쑥스럽네요.”
아! 정말이지 착한 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 다들 겸손한지.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정성민(프리랜서) ■사진 / 장태규(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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