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노래하는 조장혁 “자유롭게 음악하고 싶어요”

다시 노래하는 조장혁 “자유롭게 음악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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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급 허스키 보이스, 1990년대를 풍미했던 가수, 전설의 보컬리스트…. 그에게 훈장 같은 수식어는 이제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노래하는 조장혁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다.

다시 노래하는 조장혁 “자유롭게 음악하고 싶어요”

다시 노래하는 조장혁 “자유롭게 음악하고 싶어요”

소위 가요계의 ‘르네상스’라고 일컫던 1990년대는 다양한 음악뿐 아니라 걸출한 보컬리스트들의 전성기였다. 개성 강한 솔로 가수들이 사랑과 이별, 그리움을 노래했고 그들의 목소리에 기대 대중은 웃고 눈물 흘렸다. 그중 조장혁은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1996년 ‘그대 떠나가도’로 데뷔한 그는 ‘Change’, ‘중독된 사랑’, ‘Love’ 등을 통해 이별의 아픔과 사랑의 쓰린 상처를 노래했다.

거친 듯 섬세한 목소리와 멜로디로 여심을 흔든 가수이자 작곡가였으며 노래방에서 남자들을 열창하게 한 보컬리스트였다. 1990년대 가요를 들으며 청춘을 보낸 이들에게, 영원히 기다릴 거라 말하며 헤어진 연인의 집 앞을 서성이던 그의 목소리는 뜨겁고도 아름다웠던 젊음의 시간들을 소환한다.

한동안 가요계를 떠나 있던 그가 지난 6월 신곡 ‘숨 쉴 때마다’를 발표하고 다시 팬들 곁으로 돌아왔다. MBC-TV ‘복면가왕’에 ‘마른하늘에 날벼락’으로 출연해 여전히 녹슬지 않은 실력을 과시한 그는 한결 편안해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제 음악만 하겠다”라고 말했다. 다시 듣는 그의 노래가, 다시 노래하는 조장혁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가면을 벗었을 때 ‘아차!’ 했어요. 왜 몰랐지 싶더라고요. 그게 참 묘해요. 알고 들으면 틀릴 수가 없는데 생각보다 더 시각과 인식의 지배를 받고 있는 거예요. 주변에 저를 아시는 분들은 금방 알아차리시더라고요. 방송이 끝날 때마다 “너지?” 하고 문자메시지가 왔어요. 팬클럽 분들도 “오빠 아니었냐”라고 묻고.

다른 복면 가수들이 나올 때마다 ‘조장혁’이라는 이름이 거론됐었는데 정작 나왔을 땐 아무도 못 맞혔어요. 첫 라운드에서 정체를 들키면 대부분 탈락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최대한 목소리와 창법을 바꿨죠.

처음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는 어땠어요? 강균성씨가 출연했을 때 제 이름이 거론됐더라고요. (이)홍기가 제 노래를 부르면서 또 한 번 이름이 나오고. 바로 섭외가 들어왔는데 고민을 많이 했어요. 제 목소리가 워낙 강해서 금방 알 것 같았거든요. 처음엔 고사했는데 매니저들의 설득에 넘어갔어요. 결정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데 일단 마음먹은 건 열심히 해요. 그랬는데, 꼬마한테 졌네요(웃음).

‘클레오파트라’와 경연 후 “꼬마한테 졌네”라는 멘트가 나가고 나서 여기저기서 추측이 쏟아졌어요. 그가 누군지. 누군지 다 알지 않나요?(웃음) 그 친구와는 워낙 오랫동안 알고 지냈어요. 대학교 같은 과이기도 했고 제가 남동생이 없는데 “형, 형” 하며 잘 따르던 친구예요. 녹화 날 연습하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알았어요. 그날 녹화 끝나고 집에 와서 “수고했다”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는데 답이 왔어요. “형도 수고했어”라고요(웃음). (‘꼬마’의 정체는 7월 19일 방송에서 김연우로 밝혀졌다.)

제일 무서웠던 판정단은 누구였어요? 백지영씨요. 그 친구가 워낙 촉이 좋아서 들킬까봐 제일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피했어요.

가면 쓰고 노래하는 느낌은 어땠나요?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어요. 가면이라는 게 참 묘한 거더라고요. 사람들이 내가 누군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기분이었어요. 목소리를 바꿔보기도 하고 평소에 못했던 걸 하게 돼요. 용감해지는 거죠. 어쩌면 지금 내 얼굴이 가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거기에 갇혀서 사는구나 싶고. 가면 하나가 사람을 얼마나 자유롭게 하는지 느꼈어요.

틀에 갇혀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됐군요. 그동안 노래할 때마다 ‘나는 조장혁이니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사람들의 기대에 얽매였다고 할까요?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 항상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그 기대에 부응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과연 맞는 걸까 싶더라고요. 뮤지션으로서, 노래하는 사람으로서 좀 더 자유로운 모습을 바랄 수도 있는 건데, 나부터 스스로를 규정해버린 게 아닌가 싶었어요. 가면 한 번 써보고 느낀 게 참 많아요(웃음).

‘복면가왕’ 출연 후 가장 큰 변화는 뭘까요? 많은 분들이 “편하게 노래해도 좋겠다”라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음악을 대하는 자세가 좀 더 자유로워졌어요. 항상 한 치의 오차도 없이, CD처럼 불러야 한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가수도 사람이니 가끔 음 이탈이 날 수도 있고 다른 스타일로 부를 수도 있는데, 그러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있었죠. 그러다 보니 힘이 많이 들어갔더라고요. 축구도 골대 앞에서 공을 너무 세게 차면 엉뚱한 데로 날아가잖아요. 정말 잘하는 선수는 힘을 빼고 유연하게 ‘툭’ 하고 넣어요. 노래도 힘을 빼고 자유롭게, 스타일에 변화가 생길 것 같아요.

팬 카페에 ‘등업’ 신청이 밀려 있더라고요. 팬 카페 회원 수가 늘어난 것도 달라진 점이에요(웃음). 2012년 ‘나는 가수다2’에 출연했을 때 생긴 팬 카페인데, 이번에 ‘복면가왕’을 보고는 가입하시는 분들이 부쩍 늘었어요.

요즘 ‘중독된 사랑’을 매일 들어요. 무엇보다 다시 음악으로 관심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아요.

인생의 파도를 넘어 다시 무대로
한동안 음악 활동이 뜸했어요. 매니저와 계약 문제가 걸려 있었어요. 데뷔 때부터 함께했던 매니저였는데, 3집 ‘Love’ 활동이 끝나고 재계약을 하며 사람만 믿고 계약서를 썼다가 빚을 떠안게 됐어요. 그 채무를 정리하기 전까지 음악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죠.

그때가 2000년 초반이었는데 CD에서 디지털 음원으로 바뀌던 과도기였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법 다운로드가 성행하던 시기라 CD를 내면 2~3일 안에 음원이 다 복제돼 나가다 보니 타격이 컸죠. 그 이후에 2012년 ‘나가수2’에 출연하기 전까지 7~8년 동안 음악을 떠나 있었어요.

꽤 긴 시간이었어요. 장사를 했어요. 굴비 장사도 하고. 생활인으로 살며 빚 갚느라 정신이 없었죠. 제가 2004년에 결혼을 했는데 생활비가 없어서 한동안 많이 힘들었어요. 중간에 「Love is Over」라는 앨범을 내기도 했는데, 그때도 매니저한테 당하고(웃음).

정이 많은 성격인가 봐요. 이제 없어요(웃음). 사람을 잘 믿었고 착했죠. 설마 10년 넘게 나를 안 사람이 나한테 그럴까 싶었어요. 그 매니저는 지금도 활동하고 있어요. 이름만 들어도 알 만큼 유명해요.

가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한 셈인데, 무대가 참 많이 그리웠겠어요. 처음엔 그런 걸 느낄 겨를도 없었어요. 정신없이 살다 어느 날부터인가 음악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더라고요. 노래하고 싶어지면 술 마시고 노래방에 갔어요. 노래할 곳이 노래방밖에 없었거든요. 노래방에서 노래를 할 때마다 사람들이 놀라는 거예요. 내가 가수인 줄 몰랐던 분들도 계셨어요. 7~8년을 쉬었으니 잊힐 만도 하죠. 사업을 하면서도 언젠가 다시 음악을 하고 무대에 서고 싶다는 마음만큼은 변함이 없었어요.

대부분의 히트곡을 직접 썼잖아요. 항간에는 저작권료가 대기업 과장급이라고 하던데.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저작권료가 수입의 전부였어요. 저작권협회에 등록된 곡이 100곡 정도 되는데, 저작권료라는 게 가수가 활동을 안 하면 줄어들어요. 생활이 많이 힘들었죠. 가족에게 허리띠 졸라매고 조금만 버티자 했는데, 고맙게도 잘 버텨줬어요. 그때 절 믿어준 아내가 고마워요. 요즘 다시 활동을 시작하니 전보다는 많이 늘어나더라고요(웃음).

오랜 공백을 깨고 무대로 돌아오게 된 것이 2012년 ‘나가수2’였어요. 그때는 정말 벅찼어요.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격이었죠. 조용필 선배님의 ‘꿈’을 불렀는데, ‘이 세상 어디가 늪인지, 어디가 숲인지’라는 가사가 나와요. 정말 가슴으로 불렀어요.

‘나가수’는 가수들이 출연을 망설이게 되는 프로그램이에요. 오랜만에 서는 무대이기도 하고,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음악적 자존심이 강한 뮤지션들이 경연 프로그램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저도 처음엔 ‘나도 한때는 유명한 가수였는데’ 이런 생각을 했어요. 돌이켜보면 그때 자존심 때문에 숨어버렸더라면 지금 이런 기회가 있었을까 싶어요.

그러고 보니 ‘나가수’, ‘불후의 명곡’, ‘복면가왕’까지 경연 프로그램에 자주 섰어요. 원래 승부욕이 강했어요. 자존심도 세고.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이기고 지는 것에 대해 생각을 다시 하게 됐어요. 온몸에 힘을 주고 이기려고 달려드는 것보다 때로는 아름답게 지는 것도 이기는 게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삶이라는 게 이기는 것보다 지는 게 더 많잖아요. 직장에선 상사에게, 집에선 아내에게(웃음). 아름답게 지는 법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얘기해요. 다 이기려고만 하면 외로워질 수 있다고. 물론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억울해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단란한 가족의 가장이에요. 큰애가 2004년, 둘째가 2010년생이에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제가 쉬고 있던 상황이라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냈어요. 지금도 애들과 노는 게 제일 재밌어요. 얼마 전에도 홍천으로 글램핑을 다녀왔고, 다음주엔 아이들 유치원 친구들 다 데리고 주문진에 가요. 제가 총대 메는 걸 좋아해요(웃음). 유치원 학부모들과도 다 친해요.

아빠가 TV에 나오는 모습을 보고 아이들의 반응은 어때요? 예전에는 “사실 아빠가 조금 유명한 가수였어”라고 얘기해도 아이들이 잘 몰랐어요. 2002년부터 가수 활동을 쉬기 시작해서 2012년에 무대 위의 모습을 처음 보여줬으니까. 지금은 신곡도 다 따라 부르고 무척 좋아해요.

다시 노래하는 조장혁 “자유롭게 음악하고 싶어요”

다시 노래하는 조장혁 “자유롭게 음악하고 싶어요”

음악을 업으로 하는 사람
어렸을 적 꿈이 가수였나요? 초등학교 1학년 때 조용필 선배님 1집에 수록된 ‘너무 짧아요’라는 곡을 들었는데 그 노래가 좋아서 매일 부르고 다녔어요. 동네 이발소에 가서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고.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학창 시절엔 라디오 키드였는데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에서 음악이 흘러나올 때마다 심장이 쿵쿵 뛰었죠.

처음 ‘내가 노래를 잘하는구나’ 하고 느꼈던 때는 언제인가요? 고등학교 때 기타를 배우면서 혼자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어떤 녀석이 “야, 제 노래 진짜 잘 부른다” 이러는 거예요. 그때 처음 알았어요. 수학여행 가면 학교 밴드에서 보컬로 서달라고 하니까 내가 노래를 좀 하나 보다 했죠(웃음).

노래 잘하는 남자는 필히 인기가 많잖아요. 아뇨(웃음). 지금은 활달하고 사람들과 편하게 얘기하는데 그때는 안 그랬어요. 숫기도 없었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학생이었죠. 근데 노래하라고 하면 했어요.

어렸을 때도 노래할 때 허스키한 목소리였어요? 거기엔 사연이 있어요. 하루는 노래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유명 베이시스트인 송홍섭 선생님께서 “장혁아 너는 목소리가 승철이 같아”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요. 아무리 노래해봤자 이승철의 아류밖에 못 된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죠. 그때 나만의 목소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중독된 사랑’이 1년에 걸쳐 쓴 곡이라고 들었어요. 처음 ‘다시 너를 볼 수 있을까’까지 쓰고 진행이 안 됐어요. 서랍에 넣어두고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1년 정도 지나 술 한 잔 마시고 들어온 날, 문득 그 곡이 생각나더라고요. 다시 꺼내서 나머지 부분을 쓰게 됐죠. 그날따라 술술 곡이 써지더라고요. 그분이 오신 것처럼(웃음). 그날 1시간 만에 완성을 했어요.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이에요. 곡을 완성했을 때 진짜 자식을 낳은 것 같았어요. 쓰자마자 딱 느낌이 오더라고요.

당시 노래방에서 조장혁씨 노래를 부르지 않는 남자들이 없었어요. 제가 여자보다 남자 팬이 많아요(웃음). “예전에 남자친구가 진짜 많이 불러줬는데”라고 하시는 여자분들이 많더라고요.

연애 시절 아내에게도 많이 불러줬어요? 슬픈 노래여서 그랬나? 잘 안 불러줬어요. 아내와는 6년 연애하고 이제 결혼 11년 차예요. 만난 지 17년이 됐네요.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해요. 가수 김정민씨와 친해요. 하루는 카페에서 정민이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앞쪽에 어떤 여자가 앉아 있더라고요. 멀리서 봤는데 한눈에 반했어요. 어떻게 말을 걸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정민이가 들어오며 그 여자한테 알은체를 하는 거예요. 바로 소개시켜달라고 해서 적극적으로 대시를 했죠(웃음). 그때 제가 서른, 아내가 스물둘이었어요.

집사람이 단국대 연극영화과 출신이에요. 그때가 막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였는데, 저를 만나며 일을 그만뒀어요. 건모 형의 ‘당신만이’ 뮤직비디오 이후 항공사 CF가 마지막 작품이 됐어요. 나중에 처제에게 들은 얘긴데 저를 만나기 전에 아내가 TV에 제가 나오면 채널을 돌리더래요. 그때 제 머리가 알록달록했거든요. 그 녀석이 남편이 되다니, 지금도 신기해해요(웃음).

1996년에 데뷔해 이제 내년이면 가수 데뷔 20주년이에요. 기분이 어때요?
다사다난했죠. 평탄하지만은 않았어요. 아쉬움이 있어요. 그때 좀 더 잘했다면, 계약 문제도 똑바로 했다면 지금과는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또 그때 그런 일을 겪었기에 지금 이렇게 나올 수 있구나 싶기도 해요. 어쨌거나 다시 노래하게 될 운명이었다는 걸 믿게 됐어요. 다시 노래하는 사람으로 섰다는 게 뿌듯해요.

오랜 공백을 깨고 지난 6월 ‘숨 쉴 때마다’를 발표했어요. 조규만씨와 가사를 같이 썼더라고요. ‘나가수’ 이후부터 항상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이제 비로소 나오게 된 거죠. 신곡을 쓰며 조규만씨에게 괜찮은 작사가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자기가 쓰겠다고 하더라고요(웃음). 다행히 잘 나왔어요. 올가을쯤에도 신곡이 나올 예정이에요.

가사는 많이 편해졌는데 목소리는 여전하더라고요. 금방이라도 불을 뿜을 것 같은. 요즘 워낙 그런 보컬을 만나기가 힘들다 보니 왠지 울컥했어요. 제 목소리를 처음 들으시는 분은 “술 좀 하셨나 봐요”라고 하세요(웃음). 반겨주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제 노래, 제 목소리에 많은 분들의 추억이 묻어 있는데 그걸 모른 체한다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제 음악만 할 거예요. 노래할 때 가장 저다운 것 같아요.

여유가 있어 보여요.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서 약간 여유가 좀 생겼어요. 빚도 다 갚았고요. 앞으로 좀 더 편안하고 자유롭게 음악 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꾸준히 음악 만들며 좋은 무대 있으면 서고, 팬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공연도 하고 싶어요. 학교에서 후배들도 가르치고 있어요. 가수의 꿈을 가진 아이들이 음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제가 가진 것들을 나눠주고 싶어요. 이제 그럴 때가 된 것 같아요.

‘1990년대를 풍미했던 가수’, ‘전설의 보컬리스트’ 등 여러 가지 수식어가 있어요. 지금의 조장혁은 어떤 사람으로 불리고 싶어요? 노래하는 사람, 음악 하는 사람, 뮤지션. 연예인이라 하기엔 좀 그렇고. 그냥 음악을 업으로 하는 보통 사람이라고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사실 인터뷰 전엔 좀 무서울 줄 알았어요. 제 노래 스타일이 그래서인지 저를 무섭게 보시는 분들이 많아요. 초야에 묻혀 있는 야인, 고독한 뮤지션 뭐 이런 이미지라고(웃음). 저는 그냥 노래 좀 하는 옆집 오빠, 형 같은 그런 사람이에요.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제공 / 정실장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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