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아가씨 로미나의 쇼 타임
금발의 트로트 가수
팔등신의 금발 미녀가 트로트의 ‘꺾는 맛’과 ‘한국인의 한’을 이야기하는 광경은 신선함 그 자체였다. 촬영 1시간 전부터 ‘이미자 골든 베스트’를 틀어놓고 들뜬 표정으로 그녀를 기다리던 남자 스태프도 로미나(29)의 한마디 한마디를 흥미롭게 관전 중이다. 푸른 눈,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우도의 바다 빛깔 같은 눈을 반짝이며 한국과 트로트에 대한 애정을 설파하는 이 여인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독일 함부르크 출신으로 대학에서 동양학을 전공한 평범한 학생이었던 그녀. 한국과의 이 특별한 인연의 서막은 여행객으로 서울을 방문했던 20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낯선 도시는 생각보다 아늑했고 볼거리가 많았다. 돌아가서도 자꾸 한국 생각이 나 몇 달 뒤 1년 치 짐을 싸 한국외국어대학으로 어학연수를 왔다. 뭐가 그리 좋았냐는 질문에 “궁도 예쁘고, 한복도 예쁘고, 한국말도 예쁘잖아요!”라며 옹골찬 답변을 내놓는 독일 아가씨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금발 미녀의 트로트 입문기가 궁금해요. 어학연수 중에 친하게 지내던 한국 친구네 집에 놀러 갔는데 친구 아버지께서 이미자 선생님의 ‘동백 아가씨’를 듣고 계시더라고요. 가사는 잘 몰랐지만 멜로디가 무척 좋았어요. 이미자 선생님 목소리를 한참 동안 넋 놓고 감상했죠. 그날 이후로 트로트와 연애가 시작됐어요(웃음). 자꾸 듣고 따라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트로트의 어떤 점이 그렇게 끌리던가요? 이미자 선생님의 목소리는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어요. 제 마음도 확 끌어당기셨죠. 음악의 분위기도 좋고 꺾고 넘어가는 박자도 좋았어요. 이걸 종합해서 설명하자면 “필(Feel)이 팍 왔다!”라고 하면 되는 거죠?(웃음)
트로트는 어디서 배운 거예요? 노래 좀 한다 하는 사람들도 트로트의 ‘맛’을 살리기는 어렵거든요. 노래 찾아서 듣는 것부터 가사를 해석하는 것까지 친구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한국말을 잘 모를 때라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무작정 따라 했어요. 그때는 가사가 뭘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흥얼댔죠(웃음). 근데 이미자 선생님처럼 트로트를 맛있게 꺾어 부르는 건 아직도 어려워요.
이렇게 겸손하게 말하지만, 트로트를 잘 부른다는 건 기본적인 노래 실력을 갖췄다는 뜻이겠죠? 사실 독일에서는 노래를 해본 적이 없어요. 나서길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요. 아, 어렸을 때부터 옛날 음악을 좋아하긴 했어요. 독일 전통 가요나 라틴 음악, 집시 음악 가리지 않고 들었어요. 부모님께서 고전 예술품을 사고파는 일을 하셔서 그 영향을 받았나 봐요. 물건도 음악도 오래돼서 깊이 있는 게 좋아요.
로미나씨의 노래가 특별한 건 트로트 안에 녹아 있는 한국인의 ‘한’이라는 정서를 기가 막히게 표현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말인데, 한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나요?(웃음) 한국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슬픔이 있잖아요. 역사적으로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힘들었고 식민지였던 때도 있었고. 게다가 나라도 분단돼 있고요. 참고 참다 보니 속이 상할 수밖에 없죠. 그런 감정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 같아요.

독일아가씨 로미나의 쇼 타임
이제는 레전드가 된 가수 이미자는 로미나의 인생 2막을 열어준 은인이다. 자신에게 음악이 주는 기쁨과 행복을 가르쳐준 이미자를 대하는 로미나의 태도는, 얼핏 종교적 열망과 비슷할 정도다. 그분의 노래만 듣고, 그분의 사진을 보기만 해도 사춘기 소녀처럼 가슴 설레는 열혈 신자 로미나에게 어느 날 찾아온 기적 같은 일. ‘이미자 데뷔 55주년 기념 전국 투어 콘서트’ 게스트 제안이다.
이미자 선생님께서 직접 콘서트 게스트를 제안했다고 들었어요. 제가 방송에서 노래하는 걸 보고 연락을 주셨더라고요. 선생님 무대에서 노래했던 건 아직도 꿈만 같아요. 지금은 긴 꿈에서 깨어난 기분?(웃음) 전국을 돌면서 이미자 선생님의 팬들을 만난 건 평생에 한 번뿐일 영광스러운 경험이었어요.
로미나씨가 노래할 때 팬들 반응은 어때요? 주로 ‘여로’나 ‘님이라 부르리까’를 부르는데, 대부분은 좋아해주셨어요. 물론 아직 발음도 부정확하고 느낌도 모자란다고 혹평하는 분들도 계세요. 사실 무대에 서는 게 무척 떨려서 실력 발휘를 제대로 못할 때도 있어요. 이미자 선생님 공연이니까 실수하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엄청나거든요.
그럴 때 한국 사람들은 ‘청심환’이라는 걸 먹죠! 그래요? 그런 게 있어요? 당장 사서 먹어봐야겠어요.
이미자 선생님이 칭찬 많이 해주세요? 칭찬도 해주시고 다음 무대에서는 이런 걸 좀 고쳐보라고 조언해주실 때도 있어요. 제가 잘 못하는 부분은 한 번 더 가르쳐주시기도 하고요. 마지막에는 늘, “연습 많이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세요.
가까이에서 본 선생님은 어떤 분이에요? 무대 위에서의 카리스마는 말할 것도 없고, 평상시에도 범접할 수 없는 오라가 있는 분이세요. 그런 점이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져요. 저도 그렇게 나이 들고 싶은데 가능할지 모르겠어요(웃음). 사실 아직도 선생님 앞에 서면 너무 떨려요. 진심으로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이라 조심스럽기도 하고요.
선생님은 로미나의 어떤 점을 높이 평가해서 무대에까지 초대한 걸까요? 일단 제가 독일 사람인데도 한국과 트로트를 좋아하는 걸 예쁘게 봐주신 것 같아요. 그리고 언젠가 제게 노래를 멋 부리지 않고 깔끔하게 불러서 좋다고 얘기해주셨어요.
레전드 가수에게 인정받았으니 이대로라면 트로트 차트 1등도 머지않아 보입니다(웃음). 아직 정규 앨범이 없어요. 앞으로 앨범도 내고 싶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이미자 선생님 무대에 함께하고 싶어요. 무대에서 노래할 때가 제일 행복해요. 연습 많이 해서 한국에서 제일 트로트 잘 부르는 외국인이 될래요.

독일아가씨 로미나의 쇼 타임
매일 저녁, 시계가 8시 25분을 가리키면 로미나는 안방극장으로 출근 도장을 찍는다. KBS-1TV 일일드라마 ‘가족을 지켜라’에서 싱글 맘인 우즈베키스탄 국적의 무명 트로트 가수 ‘미나’를 연기하는 그녀. 가요 프로그램에 출연한 로미나를 눈여겨본 음악 감독의 소개로 연기자로서 첫걸음을 내딛었다.
연기하고 있는 캐릭터가 묘하게 본인과 닮아 있는 듯해요. 작가님이 처음부터 저를 염두에 두고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해요. 몇 년 전에 ‘가요무대’ 음악 감독님 소개로 작가님과 인사한 적이 있는데, 언젠가는 ‘한국에서 트로트를 부르는 서양 여자’ 이야기를 작품에 쓰고 싶었다고 하시더라고요.
배우의 세계를 경험해본 소감은? 생각보다 힘들어요. 제가 맡은 역할이 7년 넘게 한국에 살고 있는 인물이라 한국말을 더 유창하게 잘해야 하는데, 아직 억양이나 발음이 많이 서툴러요. 그리고 미혼인 제가 엄마 역할을 하는 것도 어렵고요. 어제는 “우리 딸, 잘 커줘서 참 고마워요”라는 대사를 하는데, 입에 붙질 않더라고요(웃음).
아직 푸른 눈의 배우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로미나의 연기에 대해 쓴소리를 할 수도 있을 텐데. 속상하지만 인정해요. 어색한 부분도 있지만 드라마 끝날 때 까지는 최선을 다해봐야죠! 다행히 별로 유명하지 않아서 ‘악플’도 ‘선플’도 별로 없어요(웃음).
앞으로 연기자로서의 계획, 궁금해요. 연기도 해보니까 재미있더라고요. 나중에는 영화 출연도 해보고 싶어요. 참, 사극에 꼭 한 번 출연해서 한복을 입어보고 싶은데 할 수 있는 역할이 뭐가 있을까요(웃음). 개화기 선교사? 이런 컨셉트로 도전해봐야겠어요.
이제 일 얘기 말고 연애 얘기도 좀 해볼까요?한국 남자와의 연애나 결혼은 어때요? 지금 만나는 사람은 없지만, 한국 남자와의 연애와 결혼은 모두 오케이죠! 가족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모습이 멋져 보여요. 독일 남자들은 가족보다는 개인의 삶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거든요. 그런 면에서는 한국 남자들에게 한 표 주고 싶어요!
벌써 2015년도 중반을 지났어요. 하반기는 어떻게 마무리할 생각이에요?
촬영 중인 드라마를 잘 끝내야죠. 그리고 올해 크리스마스엔 꼭 독일에 가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작년엔 공연 때문에 못 갔거든요. 한여름에 크리스마스 계획을 세우는 게 좀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네요(웃음).
“이미자 선생님의 목소리는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어요. 제 마음도 확 끌어당기셨죠. 음악의 분위기도 좋고 꺾고 넘어가는 박자도 좋았어요. 이걸 종합해서 설명하자면 ‘필(Feel)이 팍 왔다!’라고 하면 되는 거죠?”
■글 / 서미정 기자 ■사진 / 박재찬 ■의상&액세서리 협찬 / 다홍·케이트앤켈리·프란시스케이(02-508-6033), 스테파넬·브루노말리·그리니치(02-514-9006), 아가타 파리(02-3445-6429), 톰보이(02-3446-7725) ■헤어&메이크업 / 파크뷰칼라빈(02-515-58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