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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색 보디슈트에 아찔한 스틸레토힐을 신고 필라테스 체어 위에 올라선 김서형(42)은 능란하게 포즈를 바꿔가며 카메라 렌즈를 상대했다. 어떤 자세를 취해야 보디라인이 제대로 나오는지 아는 걸 뛰어넘어 마치 각 신체 부위의 기능을 새로 가르치겠다는 듯 리드미컬한 움직임을 보여줬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그 순간, 그녀의 눈은 셔터 소리에 맞춰 모니터에 등장하는 1초 전의 자신을 부지런히 좇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덩달아 흥분에 겨워 열정적으로 촬영한 스태프가 스튜디오를 떠난 뒤, 캐릭터 티셔츠와 롤업한 다크 블루진을 매치한 차림에 플립플롭을 신고 다시 등장한 주인공과 독대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누군가가 또 있었다. 아홉 살 된 요크셔테리어 꼬맹이가 이런 자리는 익숙하다는 듯 김서형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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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의 몸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다. 가장 큰 재산이라고 해도 틀릴 것이 없는 배우의 몸. 그래서 최고급 피트니스클럽에서 미끈한 몸을 과시하는 퍼스널 트레이너의 관리를 받고, 최신의 기술이 응집된 스킨케어 프로그램을 섭렵하며, 이물질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유기농 음식만 먹는다고 해도, 아니 정말 이슬만 마신다고 해도 의심할 나위 없는 여배우의 그 몸에 대해 순진한 듯 도발적인 질문이라도 던져볼 참이었다. 몸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아는 사람의 몸이라는 나름의 소감에 김서형은 “으음, 네네”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저희는 일을 몰아서 하잖아요. 남들과 다르게 쉴 수 있는 시간은 있지만, 작품을 할 때는 대기 시간도 길고 밤새는 게 다반사이니까요. 요즘 드라마는 거의 생방송 수준으로 찍기 때문에 멘탈이나 육체를 평소에 건강하게 잘 관리해두지 않으면 일할 때 많이 힘들어요. ‘아내의 유혹’ 때 소리도 많이 지르고 무릎도 다쳐가며 촬영하면서 절실히 느꼈어요. 그것이 이제 나이가 들다 보니까 재활로 가는 거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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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은 꾸준히 해요. 관리라기보다는 건강 때문에 하는 거죠. 요즘처럼 촬영하느라 시간이 없을 때는 집에서 아령 들고 스테퍼를 30분 정도라도 해요. 그 아주 조그맣고 저렴한 스테퍼 있잖아요.”
웬만한 집에는 하나씩 있는 홈쇼핑 히트 상품 운동기구로 관리를 하는 여배우는 같은 드라마에 출연했던 동료들과 어울려 사이클을 타고 라이딩에도 나선다. 그녀는 긴장을 푸는 방법을 묻자, “그냥 멍 때리기”라고 답한다. 소파에 기댔던 몸을 스르륵 일으켜 세우며 인터뷰에 본격 발동을 거는 이 여배우의 몸보다 마음이 더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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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촬영 없는 날 뭐 하느냐고 물으면 저는 멍 때린다고 해요(웃음).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도 쉽지 않더라고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어야 하거든요. 가만히 있다 보면 이것저것 잔고민이 들어오니까요. 그럴 땐 집 근처 남산으로 가서 걸어요. 그냥 햇빛 쬐고 나무 그늘을 찾을 수 있는 곳이 거기더라고요.”
지난 3월 SBS-TV ‘런닝맨’에 출연해 김종국과 러브 라인을 만들어 유재석으로부터 ‘금호동 잘꼬심이’이라 불리며 큰 웃음을 줬던 김서형은 그 별명처럼 남산 자락 금호동에 살고 있다. 강릉에서 상경해 반지하 셋집에서 어려운 무명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이름 석 자 알려졌다 싶으면 강남으로, 청담동으로 세를 얻어서라도 이주하는 라이징 스타들의 패턴을 보면 도리어 신기하게 느껴진다고 하자 “CF 스타가 아니라 돈 많이 못 벌어요”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김서형에게 자연스러움이란 그런 것이었다. 거스름이란 없는 기질은 불과 30cm 거리에서 바라보는 얼굴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가끔은 고민해요. 얼굴 살이 빠질 때는 뭘 좀 맞아야 하나? 그랬다가도 이런 개성 있는 얼굴도 필요하지 뭐, 하고 말아요. 곱게 늙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죠. 잘 살면 그게 얼굴에 나타나잖아요. 그게 잘 늙어가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럼 그 얼굴로 연기하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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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정숙, 또 하나의 나
“20, 30대로 돌아가고 싶진 않아요. 물론 50, 60대가 되면 40대가 더 고생스러웠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요. 지금 가장 좋다기보다는 가장 치열했던 20, 30대의 한 고비를 넘어왔다는 게 더 의미 있는 거겠죠. 그때의 내 모습보다는 지금이 스스로와 훨씬 덜 싸우는 것 같아요. 똑같은 고민이 생겨도 그걸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그때보다는 잘 알고, 또 안 좋은 기운을 떨쳐버릴 수 있는 방향도 빨리 찾게 되니까요. 지금은 50대가 기대될 만큼 40대를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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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적당히’가 안 돼요. 내 입에 밥숟가락 넣는 일을 하는데 어찌 적당히 살겠어요? 이쪽 일을 한 지 벌써 20년이 다 돼가는데, 그 경력 때문에 습관처럼 하고 싶진 않아요. 그래서 저를 다그치고, 거기에 맞추느라 주변 사람들이 좀 힘들죠. 그게 긍정적이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일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거니까….”
순간 마치 퀴즈 정답이라도 외치듯 “그 얘기 정말 자주 하더라”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김서형은 지금도 그렇다며 쉬이 수긍했다. 2008년이었다. ‘아내의 유혹’으로 전국을 들썩이게 만들며 김서형은 데뷔 이래 가장 찬란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모두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이 펼쳐질 거라 기대에 찬 시선으로 신데렐라의 탄생을 축하할 때였다.
“아버지가 갑자기 암 선고를 받으셨어요. 본인께서도 그렇게 될 줄 어찌 아셨겠어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처음 겪었기 때문에 큰 일일 수도 있지만, 그때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했어요. 그 일이 내일 어떻게 될지도 모르니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결심을 굳히게 한 계기가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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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할 수 있지만, 배우 김서형에게 주기는 힘든 역할인 건 맞아요. 감독님께서 촬영 전까지 ‘아내의 유혹’ 같은 제 출연작을 못 보셨더라고요. 주변에서 제가 ‘센 걸’ 많이 했다고 듣기는 했는데 저를 만나보고서도 믿기지가 않으셨던지 그 이후에 드라마를 찾아보셨대요(웃음).”
이쯤 되면 ‘장화, 홍련’, ‘형사 듀얼리스트’ 등의 미술감독 출신인 조근현 감독이 드라마광이 아니라는 점을 고마워해야 할까. 선입견을 거둬낸 눈으로 바라보니 악다구니 쓰던 신애리도, 서슬이 퍼렇던 황태후도 아닌 말간 얼굴의 진짜 김서형을 건져 올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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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김서형은 정치의 본산 국회를 배경으로 한 KBS-2TV 수목드라마 ‘어셈블리’에 출연 중이다. 방송기자 출신으로 금배지를 달고 집권 여당 대변인으로 활약 중인 홍찬미 역을 소화하기 위해 긴 머리도 짧게 잘랐다. 본격 정치 드라마답게 짐짓 무거운 남자 드라마로 흐를 수 있었던 작품에서 보좌관 최인경(송윤아 분)과 홍찬미의 대결 구도는 숨통을 트이게 해준다는 평을 듣고 있다. 공식에 대입해서 풀어내기에 ‘이기심과 출세욕에 불타는 의원회관의 사이코’라는 극 중 설정은 20년 차 연기 베테랑에게는 외려 쉬울 수 있었다. 그런데 제작진이 김서형에게 거는 기대는 그 이상이었다.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장악했던 ‘금호동 잘꼬심이’의 캐릭터를 슬쩍 홍찬미에 녹여낸 것이다. 덕분에 비인간적이기만 하던 홍찬미는 김서형의 엉뚱함을 이식받아 완벽하지만 어딘가 허술한 면이 있는 입체적인 캐릭터로 빚어졌다.
직장 여성들 사이에서는 그대로 벗겨내서 내일 출근할 때 입으면 딱 좋을 홍찬미의 패션도 화제다. 한때는 안티 카페가 만들어질 정도로 남부럽지 않은 미움을 받았던 김서형은 어느덧 여성 팬이 더 많은 배우가 됐다. 물론 캔디나 천사표 역할의 출연 제의는 가뭄에 콩 나듯 하지만, 두려움 없이 제 목소리를 내고 응징을 두려워하지 않는 김서형표 악녀는 사회적 약자를 천형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대다수 여성들에게는 ‘사이다’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일종의 대리만족이랄까. 바라건대, 이 속 깊은 언니의 레이스가 더 강렬해졌으면 한다. 눈빛 레이저 한 방이면 세상의 온갖 지질한 남성 캐릭터들이 오금을 못 펴는 그런 초강력 액션 영화라도 좋겠다. 주인공이 김서형이라면.
■진행 / 이은선 기자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 신우(프리랜서) ■제품 협찬 / 나인웨스트(02-514-9006), 로앤디(02-6237-7200), 발망·베르수스 by dal·아브라함케이한글·준야와타나베 꼼데가르송 by dal·지방시·MSGM(02-546-1997), 베드니(02-3448-0805), 벵갈빈티지(070-8274-5610), 슈즈원(02-3443-1703), 에트로(02-3018-2313), 월포드·제라르다렐(02-546-7764), 쥬얼카운티(070-4112-1479), 티에르(070-7882-4465) ■헤어&메이크업 / 하나, 권윤희(김청경 헤어페이스, 02-3446-2700) ■네일 아티스트 / 김나혜(김청경 헤어페이스) ■스타일리스트 / 신우식(나피스타일), 안하영·박수경(어시스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