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베테랑’의 숨은 주역 영화제작자 강혜정

영화 ‘베테랑’의 숨은 주역 영화제작자 강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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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사람은 류씨, 안사람은 강씨. 그렇게 영화사 이름은 ‘외유내강’이 됐다. 영화 한 편이 나오기까지 영화제작자의 역할은 감독만큼이나 막중하다. 영화감독 류승완의 아내 강혜정씨. 영화제작자인 그녀의 힘은 영화 ‘베테랑’을 통해 고스란히 표출됐다.

영화 ‘베테랑’의 숨은 주역 영화제작자 강혜정

영화 ‘베테랑’의 숨은 주역 영화제작자 강혜정

기댈 수 있는 벽
형사가 맨몸으로 뛰면서 악당을 물리치는 권선징악 전개. 관객들이 쉽게 공감하고 응원할 수 있는 이야기. 영화제작사 ‘외유내강’ 강혜정(45) 대표는 관객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영화를 원했다. 어렵다는 평을 들었던 전작 ‘베를린’에 대한 반성이었다. 남편인 류승완(42) 감독은 명료한 스토리에서 나오는 시원하고 거침없는 쾌감을 잘 살려냈다. 아빠의 영화를 보여주면 항상 어렵거나 무섭다는 반응을 보였던 세 아이 역시 이번 영화만큼은 재미있다고 인정했다. 그때 직감했다. 이번 영화는 적어도 어렵다는 소리는 안 듣겠다고.

“친한 지인들뿐만 아니라 소식이 뜸하던 분들도 영화가 무척 좋았다며 연락을 주세요. 요즘 웃을 일이 없었는데 실컷 웃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제일 뿌듯했고요. 영화 인생 20년 만에 이런 적은 처음이에요. 앞으로도 정말 많은 것을 신나게 해야겠다, 또 그렇게 할 수 있겠다, 라는 걸 느끼고 있어요.”

영화제작자의 모습은 머릿속에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감독의 의무가 영화를 잘 만드는 것이라면 제작자는 감독의 컨디션을 최고로 만들기 위해 자본과 캐스팅에 관련된 제반 업무를 담당한다. 한마디로 영화 제작의 ‘하드웨어’적인 부분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류 감독이 연출하거나 각본에 참여한 영화 ‘짝패’, ‘해결사’, ‘베를린’의 뒤에는 언제나 그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영화를 재미있게 연출하고 구성하는 것은 감독과 작가의 몫이지만, 아무리 시나리오가 좋아도 그에 맞는 배우가 없으면 안 되거든요. 최대한 좋은 배우를 캐스팅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게 제작자예요. 보통 원작을 구매한 뒤 개발하면서 감독과 작가를 붙여요. 기획부터 유통, 수익 배분까지 최종 책임은 제작자에게 있죠.”

여러 영화사를 거치며 홍보와 제작 업무를 익힌 그녀는 2005년 ‘외유내강’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딱 10년이 흘렀다. 한때 회사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흥행에 참패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경험은 좋은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한다.

“영화 ‘다찌마와리’가 쫄딱 망해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래도 딱 적기에 위기를 겪었던 것 같아요. 살면서 한 번은 바닥을 치는 때가 있잖아요. 잘 극복했으니 다시 높이 올라갈 수 있었죠.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어요. 항상 제가 노력한 것에 비해 성과가 훨씬 좋았거든요. 이제부턴 더 이상 운에 기대지 않고 진짜 실력으로 부딪쳐야죠.”

부부가 함께 일해서 좋은 점은 일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것. 가까운 사이이다 보니 남편이 온전한 파트너로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류 감독이 무언가를 지적하면 ‘어떻게 나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믿음직한 지원군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그녀는 감독과 스태프를 강하게 견지하는 ‘벽’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한번 작품을 시작하면 부부가 둘 다 매진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점도 있다.

“저랑 남편이 서로 시간을 나눠서 아이들을 돌볼 수가 없잖아요. 같이 집중해야 하고 같이 바쁘니까요. 저와 함께 일하는 2명의 PD가 있어요. 처음부터 그들에게 얘기했죠. 난 아이들이 있고, 잘 키우는 것이 나에게는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요. 그 친구들이 저를 충분히 이해해줬기 때문에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었어요.”

한국 액션 영화의 새 장을 열었다고 할만큼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한 남편과 달리 그녀의 취향은 ‘시네마 천국’ 같은 가슴 뭉클해지는 영화다. 하지만 취향이 다르다는 건 일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류 감독은 종종 “이거 어때?”라며 아이디어를 툭 던진다. ‘베테랑’의 시작도 그랬다. 처음에는 강우석 감독의 ‘공공의 적’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시나리오 수정을 거친 뒤 독자적 색깔을 갖게 됐다. 그녀는 ‘베테랑’이 인생의 영화가 될 것 같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제작한 다섯 편의 영화를 소홀히 하는 건 아니다.

“창립작인 ‘짝패’ 같은 경우 지금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아요. 정두홍·류승완씨 주연이잖아요. 류 감독에게 ‘짝패2’ 하자고 하면 ‘왜 그래~’ 이래요(웃음). ‘부당거래’는 처음으로 류 감독이 영화를 참 잘 만드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게 된 작품이에요. 시나리오를 보고 너무 어렵다고,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현장 편집본을 보고 제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알았죠. ‘베를린’은 해외 촬영을 비롯해 압박이 심했기 때문에 기억에 남아요. 손익분기점이 450만 명이나 되는 영화를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근데 그걸 뛰어넘었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걸 실감했죠.”

영화 ‘베테랑’의 숨은 주역 영화제작자 강혜정

영화 ‘베테랑’의 숨은 주역 영화제작자 강혜정

영화는 내 운명
‘당신도 영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대학을 갓 졸업한 1993년의 어느 날, 그녀는 길을 걷다 전봇대에 붙어 있는 전단지의 문구를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독립영화협의회가 진행하는 워크숍 광고였다. 호기심이 생겨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이런저런 얘기가 들렸지만 그녀에게 잘 와 닿지 않았다. 분명히 뭔가 있는데 설명이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묘한 끌림을 느끼며 30만원을 내고 워크숍에 등록했다.

“대학 다닐 때 학생운동을 했어요. 사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고, 졸업해서도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기를 열망했죠. 워크숍 전단지를 본 건 정말 운명과도 같았어요. 전화를 걸고 행동을 했으니까 오늘의 제가 있는 거잖아요. 그곳에서 영화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남편을 만난 곳이기도 하고요. 벌써 23년이나 됐네요. 그 예쁜 남자는 어디로 가고, 아저씨가(웃음)….”
흔히 말하는 ‘영화광’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태권브이’ 개봉 소식이 들려오면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가서 보는 정도였다. 영화가 어떤 ‘의미’로 다가온 건 워크숍에 참가한 이후부터였다.

“당시에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영화과가 4개밖에 없을 때였어요. 영화과를 나오지 않은 사람들은 영화를 만들 기회가 많지 않았죠. 16mm 필름으로 영화 만드는 걸 배우면서 영화를 알게 됐고, 과연 영화가 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됐어요. 그땐 한국 영화가 부흥의 싹을 틔우고 있던 시기였어요. 좋은 영화들이 많이 나오기 시작할 때였죠. 타이밍이 좋았어요.”

스무 살이었던 류 감독은 워크숍의 조교였다. 그는 3기 수강생이었고 강 대표는 5기였다. 그녀는 희멀건 얼굴의 청년을 보고 마음속으로 ‘예쁘게 생겼네’라고 생각했다. 그가 소년 가장이며 할머니와 어린 동생과 함께 산다는 사실은 꽤나 충격이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그늘 없이 해맑은 표정으로 지내는 그가 멋있게 느껴졌다. 둘은 워크숍이 끝나면서부터 연애를 시작했다.

“류 감독은 항상 영화를 할 거라고 당당히 말했어요. 스무 살 특유의 패기가 있었죠. 그에게서 나에게 없는 모습을 발견하고 매력을 느꼈어요. 주변 사람들은 세 살이나 어리고 대학도 나오지 않은 류 감독과의 만남을 곱게 보지 않았지만요. 게다가 영화를 한다고 하니 비웃더라고요.”

집안의 반대 역시 어마어마했다. 딸에게 재떨이를 던질 정도로 류 감독과의 결혼을 반대했던 아버지는 한 푼도 주지 않는 조건으로 결혼을 승낙했다. 그녀는 11평짜리 아파트에서 시할머니, 어린 시동생과 함께 신혼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부모라도 반대했을 것 같아요. 화도 나고 걱정도 되셨겠죠.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결혼한 뒤부터 사위에게 정말 깍듯하셨어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항상 남편에게 잘해줘야 한다고 제게 말씀하셨죠. 어릴 때 부모님을 잃고 굉장히 씩씩하게 자랐기 때문에 안에 외로움이 많을 거라고요. 그걸 이해하고 따뜻하게 품어주라고 하셨어요.”

시동생 류승범과의 인연은 연애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둘은 과외 선생님과 제자로 처음 만났다. 강 대표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류승범에게 1년 동안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학원에서 영어 강의를 했어요. 입소문이 나서 학원에도 나가고 과외도 했죠. 어느 날 남자친구가 부탁이 하나 있다면서 자기 동생을 만나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초등학생 승범씨를 처음 만났어요. 눈도 안 마주치고 바닥만 보고 있고, 숙제 내주면 제가 오기 직전에 부랴부랴 하는 사춘기 학생이었죠. 그래도 인사 잘하고 굉장히 예의가 발랐어요.”

영화 ‘베테랑’의 숨은 주역 영화제작자 강혜정

영화 ‘베테랑’의 숨은 주역 영화제작자 강혜정

지금은 제작자, 감독, 배우로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를 응원하고 있는 세 식구. 특히 류승완·류승범 형제의 우애가 남다르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둘은 서로 인간적으로 의지하고 사랑해요. 특히 승범씨는 굉장히 멋있는 어른으로 성장한 것 같아요. 예전에는 가족이기 때문에 염려했다면 지금은 가족이니까 믿어요. 승범씨가 외국에 나가 있어서 무척 보고 싶어요. 며칠 전엔 생일이었는데, 제가 약 올리느라고 SNS로 깍두기, 김치, 잡채 같은 단어를 써서 보냈어요. 음식 사진 보내면 고통스러울까 봐 이름만 보냈죠. ‘드시고 싶지 않아요?’라면서요(웃음).”

친분이 있는 감독과 배우가 누구냐는 질문에 류승완, 류승범을 꼽는다. 촬영하면서 만난 배우들과 두터운 정을 쌓은 류 감독과 달리 그녀는 아이들을 돌보느라 그럴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 개인적으로 배우 김혜수를 좋아하고, 가끔 그녀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따뜻함을 전하는 사람
고등학생인 딸과 초등학생 아들 둘은 엄마 얼굴을 많이 닮았다. 아이들이 “아빠 닮았으면 더 잘생겼을 텐데!”라고 푸념을 털어놓기도 한단다. 영화를 업으로 삼은 부모의 영향으로 아이들 역시 영화를 좋아한다. 이들은 그녀가 세상 무엇보다 아끼는 삶의 1순위다.

“집에 TV가 없고 모니터만 있어요. 아이들과 DVD를 같이 보곤 하죠. 특히 둘째가 영화를 깊이 있게 봐요. 예를 들면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영화들만 쭉 본 다음, 미군과 독일군 관점에서 만든 영화를 비교해요. 시나리오도 쓰고 싶어 하더라고요. 아빠에게 시나리오는 어떻게 써야 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남편이 씩 웃으면서 ‘드디어 올 것이 왔다’라고 했죠.”

공교육이 주는 학업 스트레스를 겪게 하고 싶지 않아 아이들을 대안학교에 보냈지만 지금은 모두 일반 학교로 옮긴 상태. 다행히 아이들은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며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첫째는 중학생 때까지 대안학교를 다녔어요. 고등학교도 보낼까 고민했는데 일반 학교에서 더 많은 친구들과 부대낄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더라고요. 지금은 잘 다니고 있어요. 둘째는 많은 공부를 해보고 싶다면서 자발적으로 일반 학교에 가고 싶다고 선언했고요. 셋째도 형 따라 보냈죠.”

아이들을 키우면서 제일 감사한 건 그들이 따뜻한 사람이 돼가고 있다는 것이다. 두 아들이 육교 밑에 좌판을 편 할머니를 보며 “꼭 저 할머니께서 파는 옥수수를 먹고 싶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마트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맛있어 보인다고 속삭이는 아이들에게서 온정을 느꼈다. 하지만 엄마는 요즘 아이들과 종종 다툰다. 다름 아닌 스마트폰 때문이다.

“아들 둘이 6학년, 4학년인데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 스마트폰을 안 사준다고 했어요. 중학교 가면 2G폰 사주겠다고 했죠. 그랬더니 막내가 몇 년이나 더 기다려야 휴대전화를 얻을 수 있는 거냐고 하소연하더라고요. 친구들은 다 갖고 있다고 말이죠. 아이들에게 계속 스마트폰이 왜 효과적이지 않은지에 대해 얘기해주고 있어요. 그런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웃음).”

세 아이에게 바라는 건 딱 하나. 어떤 직업을 갖게 되든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아는 것이다. 그녀 자신도 예전에는 엄마, 아내, 딸, 회사 대표로 살아왔지만 요즘은 온전한 ‘나’를 발견하려고 한단다. 끝없이 자신을 돌아본 끝에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결론지었다.

“앞으로 내가 또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 중이에요.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따뜻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가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시네마천국’, ‘인생은 아름다워’와 같이 깊이 있고 가슴 뭉클해지는 영화를 만들 수 있기를 꿈꾼다. 두고두고 생각나게 하고, 편안하면서도 가슴이 저릿해지는 그런 영화 말이다. 이 땅에도 아픈 역사가 있기에 충분히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단다. 다만 아직은 취향을 담아낼 만큼 성숙하지 않아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베테랑’이 개봉 5일 만에 손익분기점인 280만 명을 넘어서며 1,000만 관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금, 이제 좀 한숨을 돌리는가 했더니 또 다른 시작이 기다리고 있다. 이전까지는 주로 액션 영화를 제작했지만 김하늘 주연의 멜로 영화 ‘여교사’를 시작으로 외연을 확장해나갈 계획이다. 더욱 책임감을 가져야겠다는 그녀, 참 멋지다.

■글 / 노도현 기자 ■사진 / 박재찬 ■의상&액세서리 협찬 / 베스띠벨리(02-3445-6248), 소보제화·SEOP(02-548-3956), 이상봉(02-553-3380), 토이킷(070-8624-0687) ■스타일리스트 / 박남일(Style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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