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충동’ 배우 안석환

‘인간 충동’ 배우 안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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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이 이어지던 8월. 배우 안석환을 두 번 만났다. 자타 공인 28년 연기 경력을 자랑하는 명배우의 이야기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 같았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음미하며 길어 올렸다.

‘인간 충동’ 배우 안석환

‘인간 충동’ 배우 안석환

17년 전 어느 일간지 문화면에선 그를 이렇게 소개했다. ‘오빠 부대 거느린 무대의 변신 로봇’. TV에선 코믹한 악역 혹은 아버지 전문 배우로 더 친근할지도 모르겠다. 1987년 극단 연우무대의 단원으로 연기를 시작한 안석환(56)은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연극과 TV, 영화를 종횡무진하며 수많은 인생을 연기해왔다. 1997년과 1998년 연극 ‘이 세상 끝’, ‘남자충동’으로 2년 연속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수상하고 한국연극협회 최우수남자연기상과 세계연극제 연극인이 뽑은 인기배우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까지 휩쓴, 연극판에선 일찌감치 실력을 인정받은 베테랑 연기자다. 그가 이제까지 출연한 작품은 손으로 꼽기에도 어렵다. 그럼에도 매 작품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그를 오랫동안 곁눈질해오던 차였다.

광복 70주년을 앞둔 어느 날, 안석환이 ‘우리겨레하나되기 운동본부’의 홍보대사로 일본 대사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인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시작된 안석환과의 대화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뒤 작은 카페에서 이화동으로 이어지는 작은 골목을 거닐다 이튿날 마포의 한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에서 막을 내렸다. 그동안 그는 한 번 울었고 두 번 눈물을 글썽였으며 백 번쯤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이제껏 만난 인터뷰이 중 ‘진정성’과 ‘휴머니티’가 가장 넘치는 인물이었다. 사람으로서 그리고 배우로서. 맥주 마시러 간다는 그를 쫓아 나가지 않은 게 두고두고 아쉽다.

얼마 전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본의 사죄를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했어요. 그날 정말 더웠는데 힘들지 않았어요? 아휴, 더 힘든 환경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많은데요. 제가 하루 거기 서 있던 건 아무것도 아니죠.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길 바라고 한 일이지만 칭찬받을 일은 아니에요. 그보다 마음이 힘들었어요.

서 있는 동안 무슨 생각이 들던가요? 소녀상 옆에 서 있다 보니 숙연해지더라고요. 우리가 일제강점기를 겪은 것이 100년도 더 된 일인데 그 오랜 시간 동안 잘못되고 왜곡된 걸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게 참담했어요. 얼마 전 일본 대사관 앞에서 독립운동가 후손께서 분신을 시도하셨어요. 이런 상황인데 한쪽에선 어이없는 발언들이 나오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싶어요. 답답하고 가슴이 무척 아프죠.

‘우리겨레하나되기 운동본부’ 홍보대사로 10년째 활동해오고 있어요. 2005년에 평양에 아리랑 공연을 보러 갔었어요. 그때 본부 부산지부장께서 홍보대사를 맡아달라고 하시더라고요. 노인네 말씀이시기도 하고, 저 역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통일이 꼭 됐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흔쾌히 하겠다고 했어요. 예전에 용천에서 폭발 사고 났을 때 아이들이 많이 죽었거든요. 항생제가 없어서 치료도 못 받았어요. 그때 이후로 평양에 항생제 공장 만드는 운동도 하고, 북한에 나무 심어주기 기금 모금 프리허그도 하고, 도움이 됐으면 하는 일들을 하고 있어요.

처음엔 이북분인 줄 알았어요. 제 나이가 몇인데요(웃음). 경기도 파주가 고향이에요. 마음이 가서 하는 일들이에요. 왜곡된 역사를 고치는 일이나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일, 독도 문제도 그렇고요. 바로잡아야 하는 것들이잖아요. 이번 1인 시위도 특정 개인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해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문제에 나선 거예요.

우문일지도 모르겠는데 꼭 물어보고 싶었어요.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인의 신념과 배치되는 인물을 연기할 때 어떤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면 ‘경성스캔들’이나 ‘각시탈’에서 친일파를 연기했을 때라든가. ‘내가 친일파고 상대방이 독립군이다’라고 생각하면 못해요. 양심에 가책이 생겨서. 그 인물이 처한 상황에 집중하는 거죠. 예를 들어 일본 순사 역을 맡았다면 ‘친일파와 독립군’이 아니라 ‘형사와 용의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각시탈’에서 매국노 이시용을 연기했을 땐 캐릭터를 완전히 비틀어서 코미디로 만들었어요. 우스꽝스럽게. 제 특기예요. 배우로서 기본적으로 배역에 대한 애정이 있어요. 아무리 악역이라도 연기자로서는 살아보고 싶으니까. 다른 인생을 살아본다는 건 연기자의 특권이잖아요.

당연히 연기 전공인 줄 알았는데 경영학 전공이에요. 상고를 나와서 경영학과를 갔어요. 장사 하시던 아버지가 아들놈이 상대 나와 회사원이 되거나 아님 당신처럼 장사했으면 하신 거죠.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 연극의 ‘연’자도 몰랐어요. 1학년 때 오리엔테이션을 갔는데 사단장이, 그때는 군사 체제라 학생회장이 아니라 사단장이라 불렀어요, 앞에 나와서 연설을 하면서 대학생이 됐으니 서클 활동을 하라는 거예요. 그래? 그럼 한번 해봐야겠다, 하고 여기저기 탐색에 들어갔죠.

그중 꽂힌 게 연극부였군요. 몇 군데 둘러봤는데 영 아니더라고요. 그러다 학교 야외 음악당 뒤에 가니까 ‘극예술연구회’라고 쓰여 있는 곳에서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있는 거예요. ‘여기다!’ 했죠(웃음). 그래서 시작하게 됐어요. 점점 전공수업 듣는 시간보다 연극하는 시간이 더 많아지더니 나중엔 극회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어요.

그러다 자연스럽게 연극 무대에 오른 건가요? 아뇨. 군대 제대를 하고 집에 빨간딱지가 붙었어요.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서 회사에 취직을 했죠. 회사 생활을 한 3년 했는데 실적이 좋았어요. 승진도 빨랐고요.

‘인간 충동’ 배우 안석환

‘인간 충동’ 배우 안석환

창의적 인생 찾아 연극 무대로
그런데 왜 그만뒀어요?
세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첫째는 제가 노조원이었는데 형은 회사 간부였어요. 둘째는 업무적인 책임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들이 무척 힘들었어요. 세 번째가 결정적이었는데, 10년 뒤 내 모습을 생각하니 별로 좋지가 않더라고요. 승진이 빨랐으니 그때쯤이면 부장 정도 달 텐데, 영 아닌 거예요. 남의 인생 사는 것 같고. 난 좀 더 창의적인 인생을 살고 싶은데 이렇게 사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사표를 던졌나요? 연극을 하고 싶더라고요. 제가 군대까지 포함해 대학을 8년을 다녔는데 그동안 연극을 놓아본 적이 없어요. 군대에 있을 때도 동기들이 보내준 연극 대본을 봤어요. 한번은 「느릅나무 밑의 욕망」이라는 대본이 왔는데 표지가 빨간색이었거든요. 선임하사가 욕망이라는 단어를 보더니 “이 새끼가 미쳤구나” 하고 보지도 않고 찢어버렸어요. 남들은 위문편지 읽는데 저는 연극 대본을 보고 있으니 미친놈 같긴 했을 거예요(웃음). 아버지께 회사 그만두고 연극하겠다 말씀드리니 뭐, 당연히 반대가 심하셨죠. 1년을 싸운 끝에 5년 동안 해보고 안 되면 아버지를 도와 장사하기로 하고 승낙을 받아냈어요.

그런 약속은 대부분 잘 지켜지지 않더라고요(웃음). 5년이 8년이 됐죠. 5년 동안 ‘외 다수’만 했어요. 누구누구 외 다수, 문성근 외 다수, 강신일 외 다수(웃음). 연극 하며 밥다운 밥을 먹은 건 8년 만이었어요. 그동안 라면, 반찬 없는 밥, 간장에 밥이 주식이었죠.

신인 시절 3분짜리 대사를 15분으로 늘린 적도 있다고 들었어요. ‘마술가게’라는 작품이었는데 대사가 3분 정도 되는 경비원 역이었어요. 신인 시절엔 대사가 고프기 마련이거든요. 이걸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말더듬이처럼 버벅대며 말끝마다 “개새끼야”를 붙여서 분량을 15분으로 늘렸어요. 객석이 뒤집어졌죠. “뭐 저런 놈이 다 있나” 하고(웃음). 그땐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정말 치열했어요. 여기저기 낄 데 안 낄 데 다 쫓아다니며 얼굴을 들이밀었죠.

형편이 좀 피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예요? 그렇게 한 8년을 지냈더니 고등어 반찬 먹을 정도가 되더라고요. 그때가 1994년이었는데 연봉이 1,440만원이었으니 한 달에 120만원 정도 번 거예요. 와,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었죠. 그래도 고기는 못 먹었어요. 그해에 딱 8일 놀았어요.

1994년에 굵직한 작품이 많았어요. 대표작인 ‘고도를 기다리며’도 그때 초연을 했고, 임권택 감독의 영화 ‘태백산맥’, 장선우 감독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도 출연했죠. 그 두 편의 영화는 저에게 의미가 큰 작품들이에요. 그 작품들로 제가 제대로 된 밥을 먹기 시작했거든요.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는 ‘색안경’이라는 기관원 역할을 했는데, 흔히들 그런 역할은 검은 양복 입고 검은 선글라스 쓰고 나오잖아요. 그대로 하면 재미가 없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장 감독한테 “제가 보기에 이 영화는 핑크인데, 이 역할이 너무 검게 나오면 재미가 없다. 적어도 보라색은 돼야 한다. 게이로 하자”라고 했더니 펄쩍 뛰더라고요. 30분 동안 설득해서 결국 그렇게 찍었어요. 다음날 촬영장에 갔더니 모든 스태프가 제 흉내를 내고 있더라고요(웃음).

같은 시기에 개봉한 ‘태백산맥’에서는 정반대 캐릭터인 토벌 대장을 연기했어요. 딱 한 신 찍었는데 임 감독님과 촬영감독님이 서로 무슨 말씀을 하시더니 사라지신 거예요. ‘아, 나 잘렸구나’ 했는데 저보고 눈빛이 살아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정말 8년 동안 먹은 라면이 사라지는 것 같았어요. 그 두 작품이 동시에 개봉을 하고 그다음부턴 개런티가 두 배로 뛰었죠. 대본도 5권씩 쌓이고. 마치 송강호처럼! 하하하.

그 이후로 드라마와 영화, 연극까지 종횡무진했어요. 데뷔 이후 지금까지 참여한 작품을 세어보다 포기했어요. 180편 정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많이 한 줄 몰랐어요. 연기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선 행복한 거죠. 우리 같은 사람들은 누군가 불러줘야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다른 건 몰라도 배우로서 열심히 살았다는 건 자부해요.

매해 서너 편의 드라마를 해오면서 한 번도 겹치기 출연 논란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만큼 맡은 역할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는 거겠죠. 30년 가까이 연기를 해오면서 항상 작품을 대할 땐 새로워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비슷한 배역일지라도 분명 인생의 차이가 있거든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니 연기하는 인물도 당연히 달라져야 해요. 연기자가 똑같은 대사를 해도 같을 수가 없어요.

익숙함 아닌 불편함, 낡을 틈 없는 비결
9월부터 연극 ‘에쿠우스’의 막이 올라요. 요즘 연습이 한창인데 바쁜 와중에도 연극을 놓지 않는 이유는 역시 회귀본능 같은 건가요?
무대는 고향 같은 느낌이에요. 카메라는 테크닉은 가르쳐주지만 연기를 가르쳐주지는 않는 것 같아요. 방송이 순발력과 테크닉을 요한다면 무대는 호흡 자체가 달라요. 2시간가량을 집중해서 긴장해야 하니까요.

한 가지 일을 30년 가까이 하면 어떤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 같아요. 지금 신인 시절을 떠올려보면 어때요? 아직도 모르는 것투성이죠. 지금도 모르는데 그땐 정말 뭘 안다고 까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웃음). 그땐 ‘어떻게 하면 나에게 기회가 올까’가 지상 최대의 고민이었어요. 나보다 잘나가는 친구들을 보면 질투하고 괴로웠죠. 원인은 나에게 있는데 심적 여유가 없을 때는 내가 보이지 않아요. 자꾸 남이 보이지. 이제는 그걸 알기 때문에 남이 아닌 나를 보게 돼요. 점점 더 어려워져요.

그동안 연기하기 가장 힘들었던 작품은 뭐예요? 힘이 안 든 것은 없어요. 부딪히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제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 편해지는 거예요. 편안하고 안정이 되면 굳어져요. 그래서 자꾸 불편해지려고 해요. 우리끼리 그런 말을 해요. 연기자는 돈을 벌면 안 된다고(웃음). 예술 행위자는 편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도 가난한가요? 먹고살 만은 해요(웃음).

연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뭐라고 생각해요? 기본은 배려라고 생각해요. 상대 배우에 대한 배려, 관객들에 대한 배려 그리고 스태프들에 대한 배려. 연기는 혼자 하는 예술이 아니거든요. 한 작품의 성패는 그 안의 배역들이 얼마나 조화로운가에 달렸어요. 물론 부딪히기도 해요. 서로 역사가 다른 사람들이 만나서 부대끼는데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죠. 그것을 잘 풀어가는 과정도 연기자가 성장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가 돼요. 아, 그리고 요즘 느끼는 건데 체력이 정말 중요해요. “연기력이 아니라 체력이야!”라는 말이 입에 붙었어요.

체력 관리를 위해 특별히 하는 게 있나요? 운동이라든가. 매일 뛰어요. 오늘도 아침에 23km 뛰었어요. 오늘은 저녁에 술 약속이 있어 더 많이 뛰었어요(웃음).

촬영할 때 주변 사람들에게 자상하기로 유명해요. 가족에게도 자상한가요? 딸이 중학교 3학년인데 꽤 친한 편이에요. 밖에 나가면 항상 통화를 해요. 촬영 때문에 늦거나 못 들어올 때도 꼭 전화를 하고요. 딸 때문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아내가 알면 삐치겠네(웃음).

이제까지 살면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뭐예요? 회사 그만두고 연기한 거요. 그게 제가 여태까지 살면서 제일 잘한 짓이에요(웃음). 고생도 했지만 연기자로 산 것에 대한 후회는 없어요. 못해도 내가 못한 거고. 지금 연기를 하며 창의적으로 살고 있으니 성공한 거죠.

요즘 새롭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이 있나요? 후배들을 가르쳐보고 싶다는 생각에 마흔 넘어서 대학원에 갔어요. 체계적으로 연기 이론을 공부해보고 싶더라고요. 성균관대 공연예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얼마 전 극단도 만들었어요. 연기하는 사람들은 한 번쯤 자기가 직접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워낙 이리저리 비틀어 상상하고 각색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기존의 작품들을 해석을 달리해서 무대에 올려보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조만간 창단 공연을 할 거예요. 극단 이름이 ‘연모’예요.

이제까지 많은 인물을 연기하며 다양한 인생을 살았는데, 혹시 앞으로 꼭 한 번 살아보고 싶은 인생이 있을까요? 울지도 웃지도 않는 신격화된 왕을 연기해보고 싶어요. 최근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인격화된 왕들이 등장하죠. 예전에는 왕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다고 하잖아요. 그런 절대적인 존재를 연기하면 어떨까, 궁금해요. 제 연기의 모토가 휴머니티인데, 왕 역할은 참 욕심이 나요(웃음).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장태규(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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