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친아’ 배우 박재민 3년째 절에서 살고 있는 이유
그럼 지금은요. 독자분들에게 어떻게 소개할까요? 배우 박재민이요. 지금은 확고하게 연기자로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이전엔 배우가 아니었나요? 속된 말로 족보 없이 데뷔했죠. 개그맨인지 탤런트인지 가수인지 뭔지 모르는.
족보 없이 어떻게 데뷔했어요?(웃음) 비보이 시절 팀 리더 형이 제가 미국에서 와서 영어가 되니까 공연 때 마이크 잡고 영어 좀 해보라는 거예요(웃음). 그렇게 고1 때 비보이 하면서 무대에서 행사 진행을 하게 됐어요. 2003년 즈음이었는데, 한류 붐을 타고 비보이가 주목받고 방송에 나가게 됐죠. 그때 Mnet에서 저에게 VJ를 제안했고, 그렇게 방송과 인연을 맺고 광고도 들어오고. 그때까지만 해도, 취미였어요.
미국에서 살았어요? 부모님께서 유학을 가셨거든요. 저는 미국에서 태어나서 여섯 살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어요. 아! (나지막이) 군필의 대한민국 청년입니다.
여섯 살이요? 그 어린 나이에 귀국했는데 그렇게 영어를 잘해요? 운이 좋았어요. 위로 다섯 살 많은 형이 있는데, 형이 워낙 미국 드라마를 좋아해서 옆에서 같이 매일 보다가 그렇게 됐죠.

‘엄친아’ 배우 박재민 3년째 절에서 살고 있는 이유
3년간 열심히 방송했나요? 계획처럼? 하긴 했죠(웃음). 하지만 지상파는 케이블과 완전히 달랐어요. 다들 대중을 휘어잡는 기술들이 대단한 거예요. 전 그냥 어쩌다 보니 오게 된? 생존 기술 없이 밀림에 버려진 기분이었어요. 서울대라는 타이틀까지 부담스러웠어요. 예능인인데 서울대 출신이라고 하면 웃기지도 않고 ‘쟤 뭔데?’ 할 것 같아서 포털 사이트 프로필에서 출신대학도 빼버리고(웃음).
이전의 방송은 온전한 내 모습 아니야
서울대를 내세운 게 아니고 외려 숨겼다고요? 당시에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알리지 않다가 서울대라고 하면 반전이겠지? 뭐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고요(웃음). 굉장히 오버하면서 활동했어요. 리액션도 과하게 하고. 그렇게 첫 단추를 잘못 끼우니까 저도 제가 낯설더라고요. 제가 아니었어요. 잘못된 방법이었죠.
얘길 듣다 보니 위기의 순간이 오겠구나 싶어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려 했는데 방법이 잘못돼 부담을 주고 있었구나, 하고 깨달은 순간 그 사건이 터진 거예요.
박재민씨를 절로 들어가게 만들어버린? 네, 결혼 오보 기사 사건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절에 들어가신 거예요? 그것도 가장 화려하다는 연예인이란 직업을 가진 남자 배우가요. 사귀다가 헤어진 여자친구가 있었어요. 그 무렵 소속사 결정으로 ‘짝’에 나가게 됐는데, 그 프로그램 찍으면서 그 여자친구가 생각이 나더라고요. 촬영을 마치고 다시 그 여자친구랑 만나기 시작했어요. 진지하게 다시 만나기 시작한 얘기를 친한 친구에게 했는데… 그 친구가 기자였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결혼 오보 기사를 쓴 거예요. 그래서 상처가 더 컸던 것 같아요(당시 보도로 박재민은 결혼 얘기가 오가는 시점에 ‘짝’에 출연했다는 비난을 받으며 진정성 논란에 휩싸였다).
당사자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는 ‘오보로 기분은 상하겠지만 잘못된 거야, 하고 바로잡고 하루 이틀 지나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거든요. 맞아요. 이해해요. 음, 제가 그때 프로그램을 5개 정도 하고 있었는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모두 하차하게 됐고요. 소속사에서는 왜 결혼한다는 얘길 안 했냐며 성화였고, 결국 그 소속사와도 결별하게 되고…. 결혼은커녕 연애도 잘 안 됐죠. 지금도 PD님들 중엔 제가 유부남인 줄 아시는 분들이 있을 정도예요.
미안해요. 그 정도로 파장이 컸을 줄은 몰랐어요. 무척 힘들었어요. 우울증이 심해 7개월 정도 치료를 받으면서 약도 먹었고요. 단기 기억상실증까지 걸릴 정도로 당시에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어요.
기억상실증이요? 저녁에 어떤 행사에서 박태환 선수를 인터뷰했는데, 바로 그날 밤 “누굴 만나고 왔느냐”라는 질문에 대답을 못했어요. 기억에 없는 거예요. ‘박태환 인터뷰 6시 30분’이라는 문자메시지를 보고 나서야 생각이 났죠. 의사 선생님이 스트레스가 심하면 그렇게 단기 기억상실증이 오기도 한다더군요. 그 정도로 기억력도 떨어진 상태였어요.

‘엄친아’ 배우 박재민 3년째 절에서 살고 있는 이유
아직도 절에서 지낸다고요? 네! 오늘도 절에서 왔어요. 새벽 성불암에서.
결혼 오보 여파로 우울증까지 앓아
우문 같지만 아니… 왜, 지금까지요? 저는 미국에서 태어나 압구정동에서만 20년을 살았어요. 강남을 벗어나본 적이 없어요. 재수를 한 것도 아니고 바로 서울대를 들어갔고, 대학에 가서도 항상 1등이었죠. 와, 정말 좋은 것만 누리고 좋은 교육을 받으면서 실패라곤 해보지 않은 완벽한 삶 아닌가요? 취미로 시작한 비보이로 TV에 나오는 연예인까지 쉽게 되고요.
‘실사판 엄친아’라 할 만하죠! 그런데요. 한 번도 실패를 겪어보지 못했던 사람이 실패를 했던 거예요.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형편없이 약한 거예요. 우당탕탕 넘어지고 나서 보니까 일어나는 방법을 모르겠더라고요. 그 순간 아, 나는 자취방 구하기 위해 부동산 중개업소조차 가본 적이 없구나, 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죠. 순간 너무 비참했어요. 결혼 오보가 발단이었지만 그게 아니었더라도 ‘이런 내가 누굴 만나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엄친아’ 배우 박재민 3년째 절에서 살고 있는 이유
그래도 지금껏 절에서 머물고 있는 줄은 몰랐어요. 절이라고 해도 제가 기거하는 곳은 반지하의 허름한 두 평짜리 방이에요. 그곳에서 안정을 찾았어요. 뭐랄까, 그곳에 있어야 삶의 균형이 맞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부모님은 뭐라고 하세요? 부모님 입장에서 아들인 제가 안정을 찾고 좋은 모습으로 변모해가는 걸 보신 것 같아요. 결혼 전까진 계속 절에 있겠다고 하니 알아서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주말에는 집에도 가요.
주변에선 뭐라고 해요? 동료 연예인들은 믿지도 않겠어요. 안 믿죠(웃음). 그런데 지금은 다들 알아요. 물론 “연출 아니야? 진짜 절에 살아? 없는 사람이 절에 사는 것과는 다르지 않아?” 하면서 의아해하거나 삐딱하게 보는 눈들도 있어요. 저조차도 소박한 척 또 다른 가식은 아닌지 자문해요. 하지만 절에까지 오게 된 과정… 남들은 저를 이해하지 못할지언정 저는 제 자신을 이해하잖아요. 박재민의 모습으로 사는 저를요. 아직까지는 절에 있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출가를 고민했던 적이 있다면서요? ‘그 정도로 불심이 깊은가’를 물으시려는 거죠?
네. 이러다 정말 ‘얼짱’ 스님이 되시는 건 아닌지. 그냥 ‘절 오빠’로 남아줘요(웃음). 죄송하지만 절에 사는 저도, 부모님도 그렇게 불심이 깊진 못해요(웃음).
출가 얘기를 더 해야 할 것 같아요.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랐어요. 거짓말도 할 줄 몰랐어요. 인생에서 유일하게 한 거짓말은 부모님 몰래 비보잉을 시작했다는 것 정도예요. 삶을 대단히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사회에 나가보니 하나도 맞질 않는 거예요. 거짓말과 반칙들이 난무하는. 현실과 이상에 괴리가 오면서 정답에 대한 갈증이 생겼어요.

‘엄친아’ 배우 박재민 3년째 절에서 살고 있는 이유
칭찬이에요!(웃음) 종교학 수업도 듣고 출가까지 다 알아봤어요. 결론은 종교도 완벽한 정답은 아니라는 거였어요.
온전한 배우 박재민으로 다시 시작
출가는 안 했지만 득도한 느낌이에요. 여행 프로그램을 정말 많이 하셨잖아요. 여행도 자신에게 많은 답을 주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작년에 시베리아를 거쳐 모로코, 스페인, 스웨덴, 캐나다, 미국, 방글라데시 등을 다녀왔어요. 방송 때문에 간 여행이었지만 덕분에 방송은 많이 못했어요. 그 여행들을 통해 더 내려가야겠구나, 생각했어요. 인간이 사는 마을 중 가장 춥다는 러시아의 오미야쿰이란 곳을 갔을 때였어요. 제가 갔을 때가 영하 60℃? 거기 사시는 분께 “이 추운 데서 왜 살아요?” 하고 물으니 “여길 왜 떠나야 해?” 하고 우문에 현답을 내놓으시더라고요. 세계의 다양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느낀 건 절대적인 행복은 없다는 거예요. 절대적인 행복을 그리며 출가도 생각했는데…. 여행은 궁극적인 가치는 없구나, 맞춰가는 게 행복이구나, 라는 걸 알게 해줬어요.
인터뷰를 해야 하는데, 박재민씨 말을 곱씹느라 자꾸 말하는 걸 잊게 돼요(웃음). 화제 전환을 해야겠어요. 이 모든 일들의 시작인 그 기자 친구, 연락하세요? 아니요(웃음). 하지만 이젠 그 친구에게 참 고마운 마음이 들어요. 그 친구를 통해 완전한 나를 찾을 수 있었으니까요.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네!(웃음)
이제 배우 박재민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고 했어요. 배우란 이름에 의미를 가진 계기가 있었나요? 아날로그 방송이 종료되고 디지털 방송으로 전환될 당시 특집 프로그램에 연예인 대표로 나가게 됐어요. 혼자 사시는 할머니 댁에 디지털 수신기를 달아드리는 장면을 찍었는데, 그때 할머니께서 “아침부터 잠들기 전까지 내 말을 들어주고, 또 말을 걸어주는 건 TV뿐이야”라고 하셨어요. 그 순간, ‘아, 내 눈빛 내 행동이 전부일 수 있는 분들이 이렇게 계시구나. 이건 아주 위험하면서도 진지한 직업이었구나’라며 제 일의 의미를 찾게 됐어요.
겉만 엄친아가 아니라 속도 꽉 찬 청년 같아요. 어떤 성격인지 궁금해요. 쑥스러운데요. 그냥 돕는 걸 좋아해요. 중학교 때가 생각나요. 비가 오면 지렁이들이 인도에 많이 올라오잖아요. 그런데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밟혀서 다 죽고. 전 그게 그렇게 불쌍하고 괴로웠어요. 그래서 비만 오면 나가서 지렁이를 풀밭으로 옮겨주곤 했어요. 진짜 거짓말 안 하고 제가 옮겨준 지렁이가 수백 마리는 될 거예요.
위안부 할머니들과 세월호 침몰사고 구조활동에 기부한 사연을 물을 참이었어요. 잘 벌어서, 돈이 많아서 기부한 것 아니에요. 사실 여기저기 돈 융통해서 한 거예요. 그건 지금 해야 할 일이니까요. 연예인의 수입은 대중으로부터 나오는 거잖아요. 사랑이 돈으로 환산돼서요. 저는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돌려드려야 한다고 봐요.
이렇게 멋진 말을 남기고 다시 2평짜리 절 방으로 돌아가시는 거죠? 정말 완벽한 엄친아 ‘절 오빠’네요(웃음). 노력할게요!(웃음)
앞으로 배우 박재민으로서 어떤 역할을 해보고 싶나요? 진짜 깐족대는 악역이요! 그런데 지금까진 징크스가 있어요. 드라마 배역이 다 중간에 죽었어요. 아, 그럼 안 죽는 역할, 끝까지 살아남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해야 하나요?(웃음)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강은진(객원기자) ■사진 / 이종훈(쟈뎅드라망, 02-3445-2927) ■리터칭 / 최종웅(쟈뎅드라망) ■의상 협찬 / 미우치아 옴므 ■헤어&메이크업 / 에이컨셉(02-514-4425) ■스타일리스트 / 최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