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1 경쟁률 뚫고 생애 첫 주인공이 된 이상이
“오디션이요? 정말 많이 떨어졌어요. 셀 수 없을 만큼”
지난 3월 제작사 홈페이지에 ‘베어 더 뮤지컬’ 캐스팅이 먼저 공개됐을 때만 해도 팬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대학로에서 소위 잘나가는 이 5명의 배우를 결코 한자리에 모을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이들 모두 피터와 제이슨 역을 맡았고 공연은 단숨에 상반기 최고 기대작으로 떠올랐다. 최종 캐스팅에는 앞서 공개된 배우들 외에 1명이 더 추가됐다. 공개 오디션에서 800: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주연을 거머쥔 신인 배우 이상이(24)였다. 작년 ‘그리스’에서 스윙(주연배우들이 공연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 대신 무대에 올라가는 역)으로 뮤지컬계에 발을 내디딘 지 꼭 1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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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이 진행됨에 따라 증폭되는 감정 처리는 신인답지 않게 노련했고, 애절함을 담아 부르는 목소리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이렇게 큰 무대에 서기까지 그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드라마와 영화에서 작은 역할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왔다. 무대에서 금방 사라지고 브라운관에서 금세 잊히는 역이라도 말이다. 오디션에서 셀 수 없이 떨어져서 처음 ‘베어 더 뮤지컬’ 합격 소식을 받고 기쁜 나머지 괴성을 질렀다며 수줍게 말했다.
“공연 전 무대 의상을 입을 때가 가장 기분이 좋아요. 옷을 입으면서 ‘피터가 될 시간이다’라고 스스로 주문을 걸어요. 피터의 삶이 펼쳐지는 순간이죠.”
그의 첫 주연작은 얼마 전에 막을 내렸다. 피터와 이별을 하고 이제는 뮤지컬 ‘무한동력’의 장선재가 돼 곧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원작의 감동을 관객들에게 온전히 전달해주고 싶다며 진심 어린 눈빛으로 말하는 배우 이상이였다.
Profile 이상이는…
1991년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출신이다. 2005년 SBS-TV 특집극 ‘소난지도의 영웅들’로 데뷔해 드라마와 단편영화에서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다. 2014년 뮤지컬 ‘그리스’, ‘런웨이비트’, ‘베어 더 뮤지컬’을 거쳐 ‘무한동력’ 장선재 역을 맡아 9월 첫 공연을 앞두고 있다.
단점을 장점으로 바꾼 188cm 장신 배우 이강우
“무대에서 너무 커 보인다고요? 대신 저만이 할 수 있는 역이 있죠”
이강우(31)는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그의 키는 188cm. 어느 곳에 있든 눈에 띌 수밖에 없을 정도로 큰 키다. 그에게 키 때문에 오디션에서 제약을 받은 적은 없는지 물어봤다. 주로 소극장 무대에 서는 연극배우인 터라 그의 큰 키는 종종 단점으로 두드러질 터. 다른 배우와 함께 무대에 섰을 때 우뚝 솟은 그의 머리로 인해 시각적 균형이 깨지거나 상대 여배우와 연기할 때 눈높이가 맞지 않아 배역에서 미끄러진 적도 있었단다. 게다가 그의 선 굵은 외모 역시 이미지를 제약하는 데 한몫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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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타고나길 긍정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졸업을 앞두고 친구들이 진로를 고민할 때도 이강우는 딱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연기를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였다. 그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하지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배우라는 무게감이 무겁게 느껴진다. 문득 현실적 고민이 앞에 놓일 때면 더욱 그렇다고. 그럼에도 연기를 그만둘 생각이 없다. 끝까지 손에 쥐고 후회가 없을 때까지 해보자는 게 그의 굳건한 의지다.
이강우는 자신을 “관객 손 많이 타는 배우”라고 말했다. 친한 연출자는 그러면 안 된다고 하지만 “관객이 많으면 저절로 힘이 생겨 어쩔 수 없다”라며 머쓱하게 웃었다. 좀 더 많은 관객에게 자신의 연기와 작품을 보여줄 수 있기를, 지치지 않고 오랫동안 연기할 수 있기를 배우 이강우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Profile 이강우는…
1984년생.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2009년 ‘한여름 밤의 꿈’을 시작으로 ‘불령선인-잊혀진 사람들’, ‘적의 화장법’, ‘두 덩치’ 등 다수의 작품으로 연극 무대에 올랐다. 현재는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만든 창작 집단 LAS에서 사람 냄새 폴폴 나는 공연을 올리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미생 ‘하 대리’가 추천하는 숨은 원석 박동욱
“조연이면 어때요? 이렇게 즐거운데!”
박동욱(32)을 ‘주목받는 배우’로 추천한 이는 드라마 ‘미생’에서 까칠한 ‘하 대리’ 역으로 주목받았던 배우 전석호다. “성실함으로는 따라갈 자가 없고, 어떤 역할이든 제 몫 이상을 해내는 배우”라면서. 신인 배우들에게 어떤 연기자가 되고 싶냐고 물으면 열에 여덟은 연기 잘하는 명배우의 이름을 대며 그들처럼 감동적인 연기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배우 박동욱은 고개를 젓는다. 과거에는 대선배들의 연기를 분석하고 따라 해보기도 했지만, 이젠 더 이상 남의 연기에 흔들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그는 자신에게 더 집중하고 있다. 타인을 부러워하며 덧없이 흩어졌던 마음을 응축시켜 배우 박동욱 자신을 위한 담금질의 시간으로 채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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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지난 8월 11일 개막한 연극 ‘뜨거운 여름’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다. 주인공 ‘재희’의 성인 역할을 맡았다. 일인 다역을 맡아 노래도 하고 춤도 추는 독특한 형식이라 올여름 내내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하며 달디단 땀을 원 없이 흘렸다. 박동욱은 “나는 주연의 탈이라기보다는 조연의 탈이란 걸 안다”라고 할 만큼 스스로에겐 냉철하다. 하지만 “배우의 길이 어려워도 낭만을 잃지 않으며 살고 싶다”라고 할 만큼 삶에 대해선 따뜻한 애정이 넘친다. 무대의 중심은 아니어도 내 길을 열심히 걷고 있어 행복하다는 이 올곧은 배우의 가을이 궁금해진다.
Profile 박동욱은…
1983년생. 계원예고,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연극배우가 됐다. 2011년에 인도를 여행하고 제작진과 함께 만든 연극 ‘인디아 블로그’로 연극계의 이목을 끌며 데뷔했고, 이후 히말라야에 다녀와 ‘인사이드 히말라야’를 만들어 공연했다. 최근 ‘술과 눈물과 지킬 앤 하이드’에서 안정적인 연기로 박수를 받았으며 현재 연극 ‘뜨거운 여름’에 출연 중이다.
연기하고 대본 쓰는 액터라이터 한송희
“예쁘게 나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 배역처럼 보일 수 있다면요”
가요계에 싱어송라이터가 있다면 연극영화계에는 액터라이터(Actor-writer)가 있다. 배우 한송희(29)는 대본도 쓰고 연기도 한다. 그녀가 대체 불가한 배우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다. 물론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하는 법이 없다. 2011년에는 영화 ‘밍크코트’로 부산국제영화제 감독조합상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직접 집필한 두 편의 연극 ‘서울사람들’과 ‘미래의 여름’도 대학로 무대에 올렸다. 최근 개봉한 영화 ‘마돈나’와 ‘디렉터스 컷’에서도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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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밍크코트’에서 가난하고 팍팍한 인물을 연기했어요. 거친 피부, 헝클어진 머리에 분장은커녕 조명도 없는 상태로 연기했죠. 물론 예쁘지 않게 나왔어요. 그럼에도 어느 관객의 ‘고등학교 동창 중에 저런 애가 하나 있었던 것 같아’라는 감상평에 정말 뛸 듯이 기뻤어요.”
선택받아야 하는 입장에서 그 기회가 줄어들 때마다 한송희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밍크코트’는 그런 고민을 씻어준 작품이었다. ‘그 인물처럼 보일 수 있다면 이런 식으로도 쓰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고 고백한다. 대중은 얼굴이 예쁜 여배우를 원하고 몸매가 좋은 여배우에게 환호한다. 이른 바 ‘발 연기’ 논란을 얼굴로 커버할 수 있는 이유도 그래서다. 스타들의 세계에서는 반짝 통할지 몰라도 배우들의 세계에서는 버텨낼 수가 없다. 한송희는 대체 불가한 배우다. 연기를 잘한다는 단순함을 넘어 대본의 행간을 읽는 해석력에 그녀의 저력이 있다. 써본 사람만 아는 디테일을 읽을 줄 아는 것이다. 그녀의 연기가 앞으로도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Profile 한송희는…
1986년생.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디렉터스 컷’, ‘마돈나’, ‘허삼관’, ‘앵두야, 연애하자’ 등 다수의 영화에 출연했고, 영화 ‘밍크코트’로 부산국제영화제 감독조합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연극 ‘서울사람들’과 ‘미래의 여름’을 집필하고 연기했다.
극단을 오가는 얼굴, 천생 배우 김다흰
“관객을 기쁘게 만드는 배우가 될래요”
좋은 얼굴을 가졌다. 이목구비가 잘생긴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내면의 차가움과 따뜻함을 극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배우의 얼굴로서 더할 나위 없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 중 ‘인간은 다면체’라는 구절이 절로 떠오를 만큼 말이다. 사진 촬영을 하는 짧은 순간에 김다흰(33)은 놀랄 만큼 다양한 표정을 구사했다. 웃으면 눈이 반달 모양이 되면서 환한 소년의 얼굴이 되고, 정색하면 눈빛이 얼음처럼 서늘해지면서 정웅인이 연기한 ‘민준국’ 뺨칠 정도로 살벌한 느낌을 풍긴다. 1인 2역을 해야 하는 역할에 적합한 배우를 찾고 있다면 서슴없이 추천할 수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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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에겐 아직 생소해도 공연계에서는 김다흰을 모르는 이가 없다. 감정선을 섬세하게 살리는 연기와 밴드 보컬로 오해할 만큼 범상치 않은 노래 실력으로 인정받고 있다. 연극 ‘카스테라’, ‘인디아 블로그’, ‘터키 블루스’, ‘인사이드 히말라야’와 뮤지컬 ‘엄마를 부탁해’, ‘사춘기’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종횡무진하고 있다. 배우 김다흰의 매력은 노래하며 연기하는 뮤지컬 무대에서 가장 극대화된다. 군살 하나 없는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폭발력이 나오는지 커다란 극장을 마이크 없이 자신의 목소리로, 연기로 꽉 채울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있다. 여러 번 만나도 인상이 흐릿한 이가 있는가 하면, 단 한 번 만나도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사람이 있다. 배우 김다흰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그런 예감이 들었다. 그는 분명 잊히지 않는 배우로 남을 것이라고.
Profile 김다흰은…
1982년생. 고등학교 때 영화광 친구의 처녀작에 캐스팅돼 생애 처음으로 연기의 매력에 눈떴다. 제대로 연기해보고자 연기학원에 갔다가 중앙대 연극학과에 진학했고, 그렇게 진짜 배우가 됐다. 2008년 데뷔 이후 연극과 영화, 뮤지컬 무대에서 꾸준히 활약하고 있다. 연기와 노래 둘 다 사랑한다는 다재다능한 배우다.
마임 연기의 정수를 보여주는 박정원
“제한된 상황에서 연기할 때 희열을 느껴요”
박정원(28)을 안다면 뮤지컬을 안다는 말과 같다. 창작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의 순호 역으로 사랑받고 있는 그는 주호민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무한동력’에도 일찌감치 캐스팅됐다. 탄탄한 연기력과 가창력을 발판으로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는 그의 뒤에는 화력 강한 팬들이 포진돼 있다. ‘출구 없는 배우’라는 별명처럼 박정원의 연기를 본 사람들은 그의 매력에 빠져든다. 물론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는 없다. 그의 롱런을 확신하는 이유는 그가 수많은 실패와 핸디캡을 극복한 배우라는 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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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소라별 이야기’에서 ‘똥개’ 역할을 맡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강아지 가면을 써야 했어요. 대사는 짖는 것뿐이었죠.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이 차단됐기 때문에 난감했지만, 개의 동작과 상태를 면밀히 분석하고 모방해서 감정을 더했죠.”
이처럼 제한된 상황을 미션처럼 생각하고 허들을 뛰어넘듯 연기를 하는 배우 박정원.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 같아서 오히려 더 좋았다”, “마스크에서도 표정이 느껴진다”라는 관객들의 평을 보면 그의 한계가 어디인지 궁금해진다.
“무명 배우면 어때요? 들꽃도 저마다의 이름이 있잖아요. 장미가 아니라도 괜찮아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꽃필 수 있다면요.”
톱 배우가 되고 싶다는 말보다 “「연극 개론」에 이름 석 자를 올려보고 싶다”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연기에 대한 진정성이 느껴진다.
Profile 박정원은…
1987년생. 중앙대 연극학과 출신이다. 가창력에 탁월한 마임 연기력까지 갖춰 뮤지컬계의 떠오르는 스타로 평가받고 있다. 2006년 ‘화성에서 꿈꾸다’로 데뷔해 다양한 창작 뮤지컬에 참여했고, 현재 ‘여신님이 보고 계셔’의 순호 역으로 공연 중이다. 9월 시작하는 ‘무한동력’에도 장선재 역으로 참가한다.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이선희·정성민·강보라(프리랜서) ■사진 / 쟈뎅드라망(02-3445-2927) ■헤어&메이크업 / 정은경(플랫폼드지, 02-547-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