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대세 배우 유아인과 속 깊은 인터뷰
‘지금은 아인시대’. 배우 유아인과의 인터뷰에 앞서 챙겨봤던 한 기사의 제목이다. 얼핏 보면 1990년대에 SBS에서 방송돼 큰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 ‘야인시대’의 패러디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걸 그룹 소녀시대의 구호인 ‘지금은 소녀시대’를 생각나게 한다. 아무려면 어떤가. 지금 유아인의 인기는 ‘야인시대’와 ‘소녀시대’를 합쳐놓은 것과 비슷하다. 감히 ‘아인시대’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그는 지난해 JTBC 드라마 ‘밀회’에서 20년 이상의 선배 김희애와 농익은 연기 호흡을 맞췄고, 곧바로 두 편의 영화 촬영에 매달렸다. 한 편은 이미 눈부신 성과를 보여줬다. 류승완 감독이 연출하고 황정민, 오달수, 유해진, 장윤주 등과 작업한 영화 ‘베테랑’은 일찌감치 ‘천만 영화’ 대열에 올라섰다. 9월 중순 1,260만 관객을 넘어서며 먼저 천만 관객을 넘은 ‘암살’의 기록까지 위협하고 있다. 더욱 무서운 것은 그 뒷심이다.
유아인은 ‘베테랑’의 기세가 여전히 등등한 가운데 지난 9월 16일 극장가에 새 영화 ‘사도’를 올렸다. 충무로에서는 흥행 보증수표로 알려진 송강호가 출연하고 이미 ‘왕의 남자’로 천만 관객을 동원한 이준익 감독의 작품이라 일찌감치 올해의 화제작으로 손꼽혔던 영화. 아니, 어쩌면 ‘사도’의 흥행을 일찌감치 예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배우 유아인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역시 ‘사도’는 예매율 1위에 이어 개봉 첫날 25만 관객을 불러 모으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천만 관객은 무난할 거라는 전망.
그러나 정작 유아인은 ‘흥행’의 ‘흥’자에 취할 새도 없이 현재 SBS-TV 새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 임하고 있다. 사도세자에 이어, 조선 건국에 일조하는 이방원 역이라니, 그의 과감한 선택에 그저 탄성이 나올 뿐. 이 드라마를 마친 뒤 군 입대를 계획하고 있다니, 이 또한 드라마 인기의 기폭제가 될 듯하다.
‘베테랑’의 흥행이 생각보다 강하고 그 기세가 오래 이어져 다음 작품 ‘사도’의 홍보 기간에도 유아인은 ‘베테랑’과 관련된 질문을 부지런히 받았다. 주체하기 힘든 칭찬 세례에 우쭐할 법도 하건만 그는 한창 주가가 오르는 젊은 배우답지 않게 침착했고, 홍보에 나서는 작품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가장 적절한 이야기를 하려고 애썼다. “‘사도’ 이야기하러 나왔지만… 말씀드릴게요”가 그가 가장 많이 한 말이다. 오히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이 ‘아인시대’로부터 가장 비껴난 시간이라고 느낄 정도로 충무로의 가장 촉망받는 젊은 배우는 겸손했다.

요즘 대세 배우 유아인과 속 깊은 인터뷰
‘베테랑’이 잘되는데다 ‘사도’ 역시 흥행이 예상되고 있어요. 올해는 ‘되는 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되는 데에는 행운이 1번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해요. ‘열심히 노력했고, 애쓰고 있어서 합당한 결과라고 생각해요’라고 하기엔 노력하는 배우들이 무척 많죠. 배우라면 평소 열심히 하고 내공이나 매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지만, 행운을 어떻게 만나고 받아들이느냐도 그에 못지않은 것 같아요. 애초에는 시기적으로 두 영화 개봉 날짜가 좀 떨어져서 경쟁작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비슷한 시기에 계속 함께 화제가 되네요. 만드시는 분들에게도 결례인 것 같고….
개봉 날짜가 다가오면서 흥행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어요? 저는 흥행 성적에 대한 욕심보다는… 저라는 배우가 어리니까, 바라는 건 없었어요. ‘사도’를 놓고는, 남자 배우가 제 나이에 그만큼 연기해볼 수 있는 배역이 있을까 싶어요. 배역이 결국 연기력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칭찬에는 역시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웃음).
‘사도’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영조와 사도의 비극적인 역사는 워낙 유명하죠. 그런데 영화는 정치적인 부분보다는 부자 관계에 집중하더군요. 왕과 세자라는 관계가 지금은 없는 설정이다 보니 공감대가 없으면 어쩌나, 하고 고민했어요. 하지만 아버지라는 자리와 자식이라는 자리에서 느끼는 부분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저는 아버지와 데면데면한 적이 많았거든요. 하지만 이 영화를 촬영하면서 아버지가 느꼈을 감정에 대해 이해가 됐어요. 사도는 아들이었지만 동시에 정조의 아버지이기도 했거든요. 정통성을 위협받는 천민 출신 어미를 둔 왕 영조가 아들에게 욕망을 투영해서 생기는 기대와 갈등뿐 아니라 부모 스스로가 자신의 뜻대로 자식을 키우려고 하는 욕심이 비극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어요. 세자라는 길이 주어졌지만 끊임없이 존재를 고민하는 사도의 모습에서 요즘 어린 친구들이 겪고 있는 상황도 떠올려볼 수 있었죠.

영화 ‘베테랑’ 스틸컷
사도세자는 지금껏 많은 작품에서 다뤄졌죠. 그랬죠. 하지만 뒤주에 갇힌 후 8일 동안의 이야기에 영조와 사도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한 작품은 없었어요. 1988년 정보석, 최수종 선배가 각각 사도로 출연한 드라마 ‘하늘아 하늘아’와 ‘조선왕조 500년-한중록’도 봤고요. 이제훈 형이 나온 드라마 ‘비밀의 문: 의궤 살인사건’도 봤어요. 저희 영화는 우직하게 기교나 멋을 부리지 않는, 영화로서 가지는 과한 장치를 최대한 제거한 상태에서 이야기를 풀었다는 점이 장점인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인간의 심리를 내밀하게 파고드는 영화를 좋아해요. 반전 같은 부분은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런 인간 본질에 대한 고찰이 있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에요.
영화 내내 울부짖고, 고민하고, 괴로워했어요. 감정의 응어리는 가눌 만했나요? 감정적으로 힘들었죠. 어둡지만 다 필요한 장면이니까요. 당시에 ‘밀회’, ‘베테랑’에 이어서 일을 많이 하던 시기라 더 그랬어요. ‘사도’는 영조와 사도의 사이가 좋았던 시절은 거의 다루지 않았거든요. 감정이 안 좋아진 이후부터 다룬 내용이기 때문에 힘들었죠. 하지만 그 안에서 힘을 어떻게 나눠야 하나, 감정을 어떻게 조절해서 풍성하게 만들어야 하나, 고민했어요. 영조는 순간순간 인간적인 면도 나오곤 했지만 사도는 시종일관 감정선이 일정했거든요. 그런 고민이 더 컸던 것 같네요.
송강호라는 큰 배우와 함께한 경험이 특별했을 것 같아요. 비슷한 감정선에서 풍성함을 만들어야 하는 영화였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걸 했을 뿐인데, 송강호 선배는 한 장면 한 장면에 대한 계획이 철저하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누구나 감정적인 장면이라면 연기력을 다 풀고 싶어 하잖아요. 하지만 주연배우로서 영화 전체를 보며 순간순간 조절하는 능력이 대단했어요. 끝까지 얼굴을 비치는 배우는 어떻게 힘을 안배하느냐가 중요하거든요. 각각의 장면을 보시기도 하지만 전체의 그림을 보시는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그냥 몇 장면만 얼핏 보면 악역 같은데, 점점 살이 붙어서 풍성해지는 영조를 보면서 감탄했던 기억이 나요.
오는 10월 5일에는 SBS-TV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로 만날 수 있겠네요. 거기서는 조선의 기틀을 잡는 이방원으로 등장해요. 이 인터뷰는 ‘사도’를 이야기하는 자리이지만… 여쭤보시니 말씀드릴게요(웃음). 아마 드라마를 보시는 분들은 ‘아니, 이방원이 뭐 저래?’라고 하실지도 모르겠어요. 이방원이라는 인물을 많은 작품에서 다뤘지만, 어린 시절이나 청년기의 모습은 별로 그려진 적이 없을 거예요. 입체적인 이방원을, 철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이방원을 그리고 싶었어요. ‘권력의 테두리 안에서 선은 과연 무엇이며, 악은 또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작품일 거예요. 개구쟁이 같지만 군주로서의 기질이 비치는 연기를 할 것 같아요. 워낙 진지한 작품을 많이 하다 보니 초반에는 힘을 빼는 데 애를 먹었어요. 사극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면을 보실 겁니다.

영화 ‘사도’ 스틸컷
인터뷰하러 오는 길에 어떤 기사를 봤는데, 제목이 ‘지금은 아인시대’더군요. 실감이 나나요? 모르겠어요. 얼떨떨하고요. “작품을 하다 보니 이렇게 좋은 일이 다 있네요” 하는 거죠. 젊은 배우가 영화라는 비즈니스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힘든 게 요즘 상황인데, 애쓰고 열심히 한다고 생각해주시는 것 같아요. 제가 운이 좋아서 좋은 작품도 만나게 된 것 같고요. 하지만 지나가겠죠. 지나갈 거라고 생각해요. 예전에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때도 제 역할 ‘걸오’에 빠진 분들이 ‘걸오앓이’라는 말을 쓰셨는데, 생각보다 금방 나으시는 것 같더라고요(웃음). 또 어느 기사를 보면 요즘 저에게 ‘블루칩’이란 표현을 써주시는데 저는 데뷔할 때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아, 젊은 배우는 영영 블루칩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밀회’, ‘베테랑’을 어느 날 갑자기 만난 것 같지만 저도 나름 무명 시절이 있었어요. 데뷔 10년이 지나니 ‘다 털자, 너무 신경 쓰지 말자’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베테랑’과 ‘사도’의 출연은 배우 유아인이 또래 배우에게는 없는 부분, 바로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선과 악이 공존한다고. 제게 자유로운 이미지와 자기 마음대로 하는 이미지가 있다고 평가하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분석을 해보면 나눠지는 부분은 있는 것 같아요. 선과 악, 마초와 소년, 여성성과 남성성, 퇴폐미와 순수미. 저는 어느 것에도 규정되지 않으려 하며 살아왔어요. 그런 마음을 지키려는 노력을 직업병처럼 느꼈죠. 사실 (배우라면) 누구나 그렇게 다양한 이미지를 갖고 싶어 하지만 쉬운 노릇이 아니죠. 또 평소에도 ‘할 말은 하는, 거침이 없는’ 이미지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어느 날 소주 광고와 녹차 음료 광고 제의를 받고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배우가 됐으면 하나요? 보는 사람마다 정답이 다 다르듯, 다르게 해석되고 어느 틀에도 들어가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게 지금까지 제가 가졌던, 규정되지 않은 욕망인 것 같아요. 다양한 이미지를 원하고 실제 성격도 그렇고요. 실제 제가 만들고 의도한 것은 ‘혼란스러움’인 것 같아요. ‘언제까지 제멋대로 갈까? 방점도 찍어보고 싶은데’ 하고 생각하는 초조함과 강박 그리고 혼란스러움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어요.
■기획 / 노정연 기자 ■글 / 하경헌(스포츠경향 엔터부) ■사진 제공 / 쇼박스, CJ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