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이자 앵커에서 청와대 대변인, KT 임원을 거쳐 다시 앵커가 됐다. 작년 9월부터 MBN의 오후 뉴스 프로그램 ‘뉴스&이슈’를 진행하고 있는 김은혜(44) 앵커의 이야기다. 9월의 어느 날 저녁, 방송을 마치고 온 그녀를 만났다. 이번 만남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앵커 복귀 1년맞이 중간 점검 인터뷰쯤 되겠다.

김은혜 앵커, 슈퍼우먼은 없다
1993년 문화방송(현 MBC)에 기자로 입사한 뒤 ‘뉴스데스크’, ‘뉴스투데이’ 등 뉴스 프로그램 앵커로도 활동한 그녀에겐 언제나 ‘여성 최초 정당 출입 기자’, ‘최초 기자 출신 여성 앵커’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만년 기자일 줄만 알았던 그녀가 2008년 2월 청와대 대변인으로 발탁된 건 꽤 의외였다. 2년 5개월간 몸담았던 청와대를 떠난 뒤 지난해 2월까지는 KT에서 콘텐츠전략과 커뮤니케이션 파트의 전무로 근무했다. 이후 주부로 지내던 그녀가 다시 카메라 앞에 서게 된 이유는 뭘까. ‘약한 사람에게 약하고 강한 사람에겐 강한 사람이 되자’라던 초심 때문이었다.
“기업에서 퇴사하고 가정주부로 지내고 있을 때 세월호 사고가 났어요. 모든 엄마들이 그랬듯 무의식적으로 죄책감이 들더라고요. 일부러 뉴스를 보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동안 사회가 ‘우리’라는 개념을 까맣게 잊고 산 것 같아요. 사실 저도 초심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을 많이 했고요. 제가 다시 방송에서 사회에 필요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면 단 한 사람의 공감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대학을 갓 졸업한 스물세 살의 김은혜는 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걷어내고자 기자 일에 뛰어들었다. 이때의 마음가짐으로 어떤 영역에 있든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청와대 대변인과 기업 임원으로서의 일은 방송국에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상대방에게 묻기만 하던 사람이 쏟아지는 질문을 받게 됐을 때의 난처함과 곤혹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정부는 성장률과 수출 규모를 홍보하고 싶은데, 정작 국민은 당장 먹고사는 게 걱정인 게 딜레마였어요. 화려한 수치의 그늘에 있는 이들의 입장을 잘 헤아리지 못한 것 같아 후회가 남기도 해요. 기업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비싼 통신료를 인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많이 고민했는데 사익과 공익을 겸비한다는 게 참 어렵더라고요. 열심히 일했지만 충분했는지는 좀 의문이에요. 지금 방송하는 게 더 낫지 않나요?(웃음)”
맨 꼭대기에서 아래를 조망하는 것은 그녀에게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방송을 다시 시작하니 처마 밑에서 사람들과 함께 위를 올려다볼 수 있게 돼서 좋다고 한다. 지금도 항상 흔들릴 때마다 경찰서를 출입하던 사회부 기자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그때의 너처럼 살고 있니? 이게 맞니?’라고.
서툰 엄마
2006년 국제변호사 유형동씨와 부부의 연을 맺은 그녀에게는 아홉 살짜리 아들이 하나 있다. 일하는 엄마에게 아들은 항상 뒷전이었는데, 피를 나눈 형제 하나 없는 아이가 커가면서 느낄 외로움이 걱정됐다. 문득 ‘부모가 죽으면 이 아이는 누구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울게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주부로 지내는 동안 아들과 단둘만의 여행을 계획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이가 더 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그녀는 그 여행이 “모자 사이를 전격적으로 멀어지게 했던 사건”이라고 말한다.
“워낙 저하고 지내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들은 얼씨구나 하고 따라나섰죠. 그런데 제가 계획을 철저하게 짜지 않고 갔어요. 기차 타고 돌아다니다가 발길 닿는 데서 자는 식이었죠. 하지만 그 안에서 쓴맛과 서로에 대한 정을 느끼기엔 아이가 너무 어렸던 것 같아요. 저는 아이를 대학생처럼 생각한 거죠(웃음). 5km를 내리 걸어가고, 저녁이라고는 빵 하나에…. 아이가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을 거예요.”

김은혜 앵커, 슈퍼우먼은 없다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도 어느 순간 시간을 초 단위로 나눠서 아이에게 이것저것 시키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돼요. 마치 후배 기자에게 계속 지시하고 감시하는 선배처럼요. 하루는 아이가 ‘일 안 해? 어디 안 나가?’라고 묻더라고요(웃음). 음식도 그렇고 가사도 그렇고 제대로 잘하는 게 없었어요.”
다시 일을 시작한 지금, 둘의 시간은 예전처럼 줄어들었다. 얼마 전 아이가 건넸던 한마디는 또다시 엄마의 가슴을 후벼 팠다.
“아이를 챙겨주긴 해야 하는데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격한 소리가 먼저 나가기도 하는 것 같아요. 며칠 전에 아들이 그러더라고요. 자신이 외롭거나 아파서 곁에 누군가 필요할 때 엄마는 항상 그 자리에 없었다고요. 아이와의 삶은 정말 정답이 없는 것 같아요.”
그녀는 ‘성공하는 여성, 알고 보니 싱글이더라’라는 명제에 전적으로 한 표를 던진다.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며 슈퍼우먼처럼 비쳐졌던 그녀에게도 일과 가정의 양립은 힘든 것이었다.
“우리나라에 슈퍼우먼은 없다고 생각해요. 인생에도 총량의 법칙이 적용돼서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어요. 일과 가정에서 둘 다 완벽할 수는 없죠. 어느 한쪽에 열정과 시간을 투자한다면 다른 쪽의 불가피한 희생은 안고 가야 해요. 저는 지금까지 일과 가정을 7:3 비율로 해서 살아왔어요.”
청와대 대변인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날, 남편과 아이는 ‘축 잘림’이라고 쓴 스케치북을 들고 그녀를 맞이했다. 항상 자신을 배려해주는 두 사람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한번은 아이가 엄마, 아빠는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우리 주변 사람들이 사는 게 좀 더 편해지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얘기해줬죠. 그러고는 너도 앞으로 다른 사람에게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는데, 엄마가 먼저 가서 그 길을 열려고 하니까 도와줄 수 있겠냐고 물어봤어요. 역시나 이해를 못하더라고요(웃음). 제가 아이와 함께해주지 못하는 시간 동안 아이가 살아갈 미래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한다면 그건 ‘단절’이 아니라 ‘순환’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사람’
그동안은 직업의 성공이 중요했고, 어떻게든 승부수를 걸어야만 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던 시대, 최초의 기자 출신 여성 앵커였던 그녀가 잘되지 않으면 제2, 제3의 김은혜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질주하는 삶 속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이 있는 걸 차마 모르고 지냈다. 이제야 그 사람들이 가슴에 송곳처럼 박힌다. 특히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난다.
“아버지와는 예전부터 사이가 썩 좋지 않았어요. 불교 신자이신 아버지는 한 집안에 두 종교를 허용할 수 없다며 교회에 다니는 저를 이해하지 못하셨죠. 하지만 제가 기자가 되고 나서부터 마음을 내어주기 시작하셨어요. 딸이 워낙 힘든 일을 하니까 안쓰러우셨나 봐요. 그런데 저는 항상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로 아버지를 기다리게만 했어요. 결혼을 하고 애도 낳아 보니 어머니, 아버지 모습이 다시 보이더라고요. 감사한 마음을 담아 건강검진권을 선물해드렸죠. 제대로 된 선물을 드린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병원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충격에 빠졌다. 아버지가 췌장암 말기라는 것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께 선물다운 선물을 했는데, 그것이 시한부 통보를 불러왔다. 겁이 많으신 아버지께는 염증이 생겼다고 둘러댔다. 그녀는 아버지를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김은혜 앵커, 슈퍼우먼은 없다
지나가는 20대 청년을 보면 ‘오빠’라고 부르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들처럼 보이는 나이가 됐다. 40대에 들어서니 돌아볼 게 많아졌다. ‘이 아이들을 위해 난 뭘 할 수 있지?’라는 고민이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실력이 아닌 다른 외생변수로 인해 인생의 운을 틔우게 하는 건 정당하지 않잖아요. 조건이 윤택한 사람에게만 기회가 제공된다면 그건 우리가 살아갈 사회의 올바른 모습이 아닌 거죠. 이런 것들을 기사로 개선하는 게 제가 해야 할 일이었어요. 지금도 여전히 그런 생각을 갖고 있고요.”
기자는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려 수명이 짧은 직업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청와대 대변인과 기업 임원으로 일할 때도 기자 못지않은 긴장감과 불안에 시달렸을 게 틀림없다. 그녀의 스트레스 해소법이 궁금해졌다.
“그냥 자요. 잠이 들면 모든 것이 무장해제되잖아요. 아, 그리고 작물을 키우는 것도 좋아해요. 잡초가 더 많긴 하지만(웃음). 화분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멈춰 있는 듯하지만 항상 자라고 있어요. 아이의 학습으로 키우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모두 엄마의 몫이 돼버렸죠. 흙을 만지면 마음이 평온해지더라고요. 속도와 경쟁을 하다 보니 잠시 멈추는 게 필요했어요.”
현재 그녀는 ‘시청률’과 씨름하고 있다. 소수 언론사에서만 뉴스를 보도했던 과거에는 ‘독점’이 주는 묘한 편안함이 있었지만 지금은 180도 달라졌다.
“시청자들이 많이 무서워졌어요. 지금은 뭘 하나 하려고 해도 ‘그거 아침에 인터넷에서 봤다’, ‘다른 종편에서 다 봤다’, ‘뉴스를 왜 이리 편안하게 만드니?’라는 피드백을 시청률로 보여주세요. 울림이 있는 뉴스를 만들어야겠더라고요. 그러기 위해선 먼저 제 스스로가 공명이 되는 사람이어야겠죠. 깊이가 있는 시청자를 따라가느라고 가랑이가 찢어질 정도예요.”
김은혜의 커리어는 보도국에서 끝을 보는 걸까. 가족이 허락해주기만 한다면 앵커이든 그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녀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사실 뭐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어요. 기자일 때는 정말 기자로서 끝내겠다고 마음먹었거든요. 일은 달라도 원래 지향하던 바를 이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대변인과 기업 임원을 했던 거고요. 더 많은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는 포부로 방송국에 다시 돌아왔기 때문에 끝이 어디일지는 잘 모르겠어요.”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녀는 미혼인 기자에게 결혼을 늦게 하라는 조언을 건넸다. 일하는 엄마는 항상 죄책감과 싸워야 한다면서 말이다. 그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밤 10시. 그녀는 레고를 만지작거리며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를 보러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글 / 노도현 기자 ■사진 / 장태규(프리랜서) ■의상&액세서리 협찬 / 부래당(02-460-0358), 아이러브플랫(070-8632-7937) ■헤어&메이크업 / 김지헤, 오지은 ■스타일리스트 / 박남일, 천다희(어시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