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남자의 사랑, 지진희
마주앉은 그가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드라마 ‘애인 있어요’에서 ‘논란의 소지가 다분한 남자’ 최진언을 열연 중인 지진희(44)는 요즘 시청자들의 뜨겁다 못해 따가운 시선을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데뷔 후 여러 작품에서 정통 멜로 연기를 선보이며 로맨티스트로 사랑받아온 그가 이토록 비난의 대상이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최진언이 불륜남이기 때문이다. 최진언은 사랑하던 아내 도해강이 차갑게 변해가는 모습을 견디지 못해 바람을 피우고 결국 이혼에 이르게 되는 캐릭터다. 열 살이나 어린 후배에게 마음을 뺏겨 아내를 배신하는 남자, 다시 시작하고 싶다며 울면서 매달리는 아내를 매몰차게 거절하는 남자 그리고 결국 기억을 잃은 채 돌아온 그녀를 가슴 절절히 사랑하게 되는 남자. 최진언을 연기하는 그를 바라보는 시청자들의 감정은 복잡 미묘하다. 덕분에 그는 데뷔 후 처음으로 ‘쓰레기’, ‘국민 불륜남’ 등 격한 호칭을 얻게 됐다.
“얼마 전 사인회에 갔다가 깜짝 놀랐어요. 여기저기서 욕하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아파트 단지를 지날 때도 마주치는 분들이 한마디씩 하세요. ‘왜 그랬어. 그러면 안 되지. 벌 받을 거야’라고요.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가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 들어요(웃음).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만큼 관심을 가져주시는구나 싶어 만족스러워요.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관심도예요.”
사실 그가 불륜남을 연기한 것이 처음은 아니다. 전작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도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정신적 불륜을 저지르는 남자 유재학 역을 맡아 섬세한 감정 연기를 펼친 바 있다. 드러나는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았던 재학에 비해 격렬히 흔들리는 진언은 시청자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특히 아내 도해강을 앞에 두고 “이 사람 좀 치워달라”라고 읍소한 장면은 진언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조차 앗아간 장면이었다. 이쯤에서 그의 변명을 들어볼 때가 됐다.
그는 자신이 연기하는 최진언에 대해 ‘욕먹는 캐릭터’이지만 동시에 ‘설레는 캐릭터’라고 했다. 진언을 변호하자면 불륜이 아닌 사랑이라는 것. 드라마의 시작부터 진언의 마음은 오직 사랑이라고 믿어왔다. 드라마 초반, 불륜을 소재로 한 막장 드라마가 아니냐는 질문에 “불륜이 아닌 사랑, 막장 드라마가 아닌 명품 드라마다”라고 못 박을 수 있었던 것은 진언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다.
“진언이에게는 해강이밖에 없어요. 해강이를 미워하게 되고 헤어지게 된 이유에 대해 설명이 됐지만, 후배 설리와의 관계가 부각되다 보니 해강과의 관계가 상대적으로 묻힌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나쁘게 보시는 게 아닌가 싶어요. 혼란스러운 부분도 있었겠지만 이제 풀어나가고 있는 단계니 좀 더 지켜봐주셨으면 해요. ‘아, 진언이가 저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순간이 올 거예요.”

드라마 ‘애인 있어요’ 캡처.
헤어진 전처와 두 번째 사랑에 빠지다
드라마는 진언이 이혼 후 4년 만에 돌아온 한국에서 기억을 잃은 채 살아가는 아내 도해강을 다시 만나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진언을 향한 날카로운 시선이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다. 시청자들의 마음을 연민으로 바꾼 것은 지진희라는 배우가 가진 힘이다. 회한과 그리움에 가득 찬 눈빛, 해강을 향한 말투와 몸짓 하나하나가 가슴에 와 닿으며 시청자들을 설득시키고 있다는 평이다. 치명적인 불륜남으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듯했던 진언은 어느새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애틋하게 파고들고 있다.
“진언이 해강에게 전화로 ‘그만 자자. 잘 자’라고 했던 장면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바로 옆에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대사도 대사지만 사실 해강이를 바라볼 때마다 찌릿찌릿할 때가 많아요. 그런 감정들이 시청자분들께도 전해지지 않았나 싶어요. 욕하면서 끌리는 캐릭터래요(웃음). 해강에 대한 진언의 마음이 드러나며 밉지만 완벽하게 미워할 수 없는 감정이 생기는 것 같아요. 한편으로 진언과 해강을 바라보고 있는 설리와 백석 두 사람에 대해서는 안쓰러운 마음이에요. 그들도 희생자일 수 있으니까요. 앞으로 이야기가 얼마나 더 흥미진진해질지 저 역시 기대하고 있어요.”
이번 드라마는 지진희에게 여러모로 도전이 되는 작품이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우유부단한 남자, 그로 인해 불륜이라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남자는 누가 봐도 이미지상 득보다 실이 많은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예상보다 ‘격렬한’ 반응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진언을 선택한 데에 후회는 없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감정을 더욱 깊게 만날 수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즐겁게 연기하고 있단다. ‘불륜남’이라는 꼬리표가 붙을지언정 앞으로도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은 캐릭터에 제한을 두지 않을 생각이다.
“이번 작품을 통해 좀 더 솔직하게 제 자신을 돌아보고 있어요. 이미지에 대해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계신데, 지금 제 나이에 표현할 수 있는 사랑의 감정이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가슴 절절하고 애틋한 로맨스가 있는 작품을 꾸준히 하고 싶어요.”
결혼을 약속한 연인 설리를 두고 전처와 사랑에 빠진 진언은 또 한 번 불륜이라는 덫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지독할수록 매력적인 사랑, 지진희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