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년 차 여배우의 날 선 연기 내공, 전혜진
연기 경력은 18년 차. 연극에서 다진 연기 내공은 스크린에서 빛을 발했다. 최근에는 이준익 감독의 영화 ‘사도’에서 사도세자(유아인 분)의 생모인 영빈 역을 맡아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와 ‘날이 선 배역’, ‘남편 이선균’을 화제로 마주 앉았다. 숨김없이 솔직한 그녀와의 대화는 내내 즐거웠다. ‘쿨한 언니’라는 소문은 과연 맞았다.
연기 경력이 오래됐지만 인터뷰할 기회가 많지는 않았어요. 인터뷰에 자주 나서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스스로 ‘뭐, 나란 존재를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싶어 할까’ 하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사도’는 촬영을 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던 작품이죠. ‘조금이라도 영화를 도와줄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임감이 들게끔 하는 영화였죠. 물론 인터뷰에 나서기엔 다른 배우들이 바쁘기도 했고요(웃음).”
영화가 전국 관객 600만을 넘었어요. 영화를 찍은 소감이 어때요?
스스로 내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초반에는 조금씩 편집된 장면만 봤어요.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점점 다른 부분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연출자도 아닌데 ‘이건 줄여야 할 것 같고, 저건 빼야 할 것 같고’ 하는 생각이요. 그 정도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큼 감독과의 관계가 만들어졌다고 보는 거죠. 개인적으로는 영화가 떳떳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에 그런 대사가 나오잖아요. ‘창공을 날아가는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 하고요. 영화를 어떻게 만들면 관객이 좋아할지를 알지만 감독님의 의도를 알기 때문에 모두가 함께 움직였어요. 이런 형태의 강한 이야기를 이런 감정을 갖고 훌륭한 배우들이 하게 돼서 좋았어요.
배역 얘기를 해볼까요. 후궁 출신으로 사도를 낳아 나중에는 남편이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이는 모습을 보는 여자예요. 이해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어찌된 이유이든 누구의 편도 들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이 큰 사람들 사이에서 곪아 있는 인물이죠. 실제 영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인생 자체가 드라마예요. 사도가 죽고 2년 후 영빈도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제 정신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아들이 죽고 나자 죄스러운 마음을 갖고 결국 생에 대한 끈을 놔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영화 속에서 마지막에 사도가 죽고 나서 “내 탓이 아니지 않냐”라며 오열하던 장면은 와인을 마시고 찍었어요. 한 번도 자기주장을 하지 못했던 그녀가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며 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기분으로요.
노역 분장도 화제가 됐죠.
평균 3시간을 분장에 투자했어요. 처음엔 좀 이상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또 모니터를 보니까 괜찮은 것 같더라고요.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팀에게서 사사한 스태프들이 합류했어요. 분장이 힘들긴 했지만 남자 배우들은 시간이 더 걸리니까 뭐라고 불평을 못했죠(웃음).
실제 평소 성격과 영빈의 모습은 서로 좀 다른 면이 있죠?
주눅 든 연기를 하는데 박원상 선배(홍봉한 역)가 “너 참 연기 잘한다” 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웃음이 났어요. 영빈은 웃으면 안 되는데(웃음). 어릴 때는 예뻐 보이는 역할이 아닌 남들이 못하는 연기를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요즘은 평범한 역을 하는 일이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제 안에서 뭔가 다른 것을 발견해주는 감독, 동료들을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준익 감독님이 제 안의 슬픔을 보셨대요. 저는 “안 그런데요”라고 말은 했지만 제 다른 모습을 발견하셨으니까 제가 연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송강호, 유아인, 문근영 등 함께한 배우들과는 어땠어요? 기존의 생각과 달랐던 부분이 있었나요?
송강호 선배는 제가 극단에 처음 들어갔을 때 극단에서 마지막 연기를 하고 계셨어요.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여전히 어려워요. 오랜만에 뵀는데도 말씀하시는 거 하나하나가 듣기 좋았어요. 이번 영화에서 영조 역을 하시면서 목소리를 많이 긁잖아요. 하도 열심히 연습을 하시기에 심하지 않나 생각했는데 결국 함께 찍으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됐죠. 이 영화를 그렇게 배우들이 많이 와서 본다고 해요. 송강호 선배의 연기를 보기 위해서요. (유)아인이는 에너지가 많은 배우예요. 극 중에 관에서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정말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을 봤어요. 한 번 그렇게 되면 근접하기 힘들 정도예요. 이번 영화를 통해서는 송강호라는 배우에 대한 선입견이 깨졌고, 유아인이라는 멋있는 친구를 만난 게 소득인 것 같아요. (문)근영이는 친구로 만난 느낌이 들고요.

18년 차 여배우의 날 선 연기 내공, 전혜진
남편은 시간이 갈수록 좋아지는 친구 같은 존재
육아에 한창인데 아이들 돌보기가 쉽지 않았을 듯해요.
죄책감이 장난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아이들에게 느끼는 미안함이 영빈 연기에 도움이 됐을 정도예요. 가족에게도, 어머니에게도 미안했어요. 아이들을 봐주셔야 했으니까요. 촬영을 하다가 전화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스태프들에게도 미안했어요. 혼란스럽더라고요. 아이들에게 내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지금까지는 몰랐던 워킹 맘들의 마음이 이해됐어요. 최근에는 연극 연습을 하고 있는데, 집에 오면 애들이 자다 깨는 거예요.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귀찮은 마음이 왔다 갔다 해요(웃음).
최근 이선균씨가 ‘성난 변호사’에 출연했잖아요. 부부가 비슷한 시기에 스크린에 등장하게 됐어요.
그래도 촬영 시기가 달라서 크게 문제는 없었어요. 제가 일을 하는 부분에 대해 남편이 지지를 많이 해줘요. 어릴 때는 여배우가 안 맞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연극은 유명하지 않아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생각도 점차 바뀌는 것 같아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는 연극하는 일이 솔직히 더 힘들었어요. 얼마 전에는 아이들에게 “엄마도 배우야”라고 하니까 “TV에 왜 안 나와?”라고 묻더라고요.
이선균씨가 TV에서 전혜진씨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인데 그럴 때 기분이 어때요?
우연히 TV를 같이 볼 일이 있으면 남편이 욕을 좀 먹어요(웃음). 이선균이라는 배우가 좀 그래요. 배우답지 않은 면이 있죠. 그게 아니면 자신이 가짜라는 생각을 해요. 저도 그런 성격이에요. 그냥 솔직하게 묻고 대답하고 서로 티격태격 싸우기도 하고 그렇죠. 로맨스를 잘하는 배우라고 하는데 생각보다는 부드럽지 않은 것 같아요. 지인들 하는 말이, 남편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차갑다고 하는데 제게는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막내의 모습이 남아 있어요.
벌써 곽경택 감독의 영화 ‘희생부활보고서’ 그리고 극단 차이무의 연극 작품을 차기작으로 정했어요. 앞으로는 연기에 더욱 매진하게 되는 건가요?
이번 작업을 하고 나서 ‘영화 현장이 이렇게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일을 하다 보면 여러 사람들을 만나요. 좋은 사람을 만나면 따로 연락도 하게 되는데, 이번에도 사람을 많이 얻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어떤 연기를 하고 싶다, 어떤 일을 하고 싶다, 하는 생각은 없어요. 마음이 가는 대로 할 것 같아요. 영화뿐 아니라 다른 데서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관계를 이어가고 싶어요. 어찌 보면 연기 욕심보다 사람 욕심이 더 있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부부가 참 닮은 느낌이에요.
요즘은 예전과 달라진 것 같아요. 배우들이 모습을 숨기는 게 아니라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소통을 하니까 인간적인 모습도 관심을 받게 되는 걸 느껴요. 남편도 그런 상황이죠. 진짜 서로 친구 같아요. 시간이 지날수록 좋아져요. 같은 길을 가고 비슷한 생각을 해서 더 그런 느낌을 받는지도 모르겠네요. 서로의 힘든 부분을 잘 알게 되니까 힘들다는 이야기를 서로 못하게 되는 상황도 되더라고요. 저도 이미지라는 틀에 갇혀 있는 모습이 있긴 해요. 그래서 얻고 싶은 것도 있지만 또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도 있어요. 이제는 서로 그런 부분을 이해하고 연기를 하는 것 같아요. “힘들었겠다”라고 말하면 “알겠지?”라고 답하고 나중에는 서로 “잘해라”라고 이야기해주기도 하죠. 연기를 제대로 못하면 둘 다 불안해해요. 서로에게 타박을 들을까 봐요(웃음).
■기획 / 노정연 기자 ■글 / 하경헌(스포츠경향 엔터팀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