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리게, 하지만 단단하게… 배우 성유리의 도약
“그때는 워낙 정신없이 바빴고, 로봇 같은 생활이었어요. 열심히는 했는데 뭘 했는지는 몰랐던 때죠. 주어진 것만 하고, 눈앞에 있는 것만 보니까 사명감이나 책임감도 떨어졌고요. 가수로서 부족한 부분은 멤버들이 채워줬으니 괜찮았지만 연기는 혼자 해내야 하는 거였거든요.”
하지만 그녀는 꿋꿋하게 연기를 했고, 핑클로 활동했던 기간보다 두 배를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배우로 살아왔다. 과거 자신의 어설픈 연기를 “귀엽다”라고 말할 여유도 생겼다. 최근 개봉한 전윤수 감독의 영화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에서 맡은 역할도 공교롭게 여배우다. 그녀는 영화에서 매니저와 드라마 작가에게 거침없이 독설을 내뱉고 화도 버럭버럭 잘 내는 까다로운 여배우 서정을 연기했다.
“처음엔 이렇게 센 인물인 줄 몰랐어요. 캐스팅이 되고 나서 최대한 캐릭터를 잘 표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 변화를 시도했어요. 배역이 인기 막장 드라마의 여주인공이다 보니 센 연기를 해야겠더라고요. 화장도 진하게 하고 옷도 섹시하게 입고요. 연기를 하며 일일드라마 주인공들이 정말 열연을 하시는구나 깨닫게 됐죠. 눈에 실핏줄이 터지기도 하고…. 재미있는 경험을 많이 했어요.”
그녀가 연기한 서정은 평범한 가수 지망생에서 톱스타로 거듭난 인물이다. 데뷔 후부터 자신을 묵묵히 지켜온 매니저 태영(김성균 분)의 비밀을 모른 채 엇갈리다 그의 진심을 마주하게 된다. 사실 시놉시스에 ‘매니저가 연상되지 않는 꽃미남’이라고 쓰여 있어서 잔뜩 기대했단다. 실제 캐스팅된 배우 김성균을 보고는 두 번 놀랐다고.
“예전에 같은 회사 소속이었는데 그때는 잘 몰랐어요. 이번에 함께 촬영하며 알게 된 사실인데 저와 한 살 차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고, 눈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랐죠. 원체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눈을 잘 못 마주치셨는데, 가끔 눈이 마주치면 진심이 느껴지는 거예요. ‘묘한 매력이 있다. 정말 멜로 배우다’ 하는 생각이 들었죠.”
사실 매니저와 연예인의 관계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극 중 스타를 몰래 사랑하는 매니저의 이야기가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그들은 무척 바쁘고 이해득실을 따져야 하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타와 매니저만큼 흉금을 터놓거나 서로를 잘 아는 관계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요즘에는 매니지먼트가 기업화·체계화되며 배우와 매니저가 비즈니스 파트너의 관계를 이어가지만 이전에는 동고동락하다 연애와 결혼으로 이어지는 커플도 있었다. 열일곱 어린 나이에 가수로 데뷔한 그녀에게 매니저는 어떤 존재였을까?
“핑클 활동을 시작했던 게 고등학생 때였어요. 20대 매니저 오빠가 있었는데 우리가 어지간히 괴롭혔죠. 한번은 매니저 오빠가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회사로 가겠다고 한 적이 있어요.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거예요. 사실 매니저가 남자친구처럼 잘 챙겨주는 존재이긴 하거든요. 싸우기도 했지만 떠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던 거죠. 연기를 하며 그때의 감정을 다시 떠올렸어요. 극 중 태영이 같은 매니저라면 설레지 않았을까 싶어요.”

느리게, 하지만 단단하게… 배우 성유리의 도약
이번 작품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배우 성유리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특히 극 중 막장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돼 ‘발연기’를 소화하는 장면은 절로 웃음을 유발한다. 서정은 작가의 농간에 수시로 대본이 바뀌는 상황에서 자극적인 대사와 연기를 쏟아내게 되는데, 그녀 스스로도 연기하며 웃음을 참기 힘들었단다.
“대사를 할 때 예전 영화 느낌을 살려서 성우분들이 하시는 더빙 느낌을 냈어요. 제 상대역으로 나오는 남자 배우도 발연기를 하는 설정이라, 표정은 진지한데 대사는 국어책을 읽는 듯해요.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죠. 현장에서 갑자기 상황 설정이 바뀌는 부분도 많았어요. 수영복을 입고 나오는 장면은 감독님이 추가한 장면이어서 당황했던 기억이 나요. 사실 그동안 과감한 연기를 많이 못했는데. 화도 내고 눈물도 흘리고 수영복도 입어보고, 후련했어요.”
2003년 성유리가 핑클 활동을 마치고 여주인공으로 이름을 알린 SBS-TV 드라마 ‘천년지애’는 여러모로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좋은 연기로 화제가 됐다면 좋았겠지만 첫 연기였던 만큼 냉정한 평가를 받았다. “나는 남부여의 공주, 부여주다!”라는 대사는 지금도 회자될 정도.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했다면 어떤 비난을 받았을지 헤아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거듭된 시행착오에서 발전의 가능성을 찾았고,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황태자의 첫사랑’, ‘눈의 여왕’, ‘쾌도 홍길동’, ‘태양을 삼켜라’ 등 여러 작품을 통해 차근차근 연기자로 거듭났다. 2010년에 들어서는 스크린에도 도전장을 던졌다.
“선배들이 보통 ‘이전 작품을 보며 스스로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해라’라고 자주 조언해주세요. 한동안은 그 말씀을 들어도 예전 작품을 보기가 싫었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요? 예전에는 주변에서 ‘천년지애’ 얘기를 꺼내면 ‘그만해’라고 했는데 지금은 ‘귀엽지 않아?’라고 말을 받곤 해요.”
2013년부터 2년 가까이 진행했던 SBS-TV 예능 프로그램 ‘힐링캠프’는 그녀가 연기자이기에 앞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성숙하는 데 큰 영향을 준 프로그램이다. 배우
한혜진의 후임으로 MC석에 앉은 그녀는 이경규와 김제동 사이에서 프로그램의 윤활유 역할을 했다. 원래 한혜진이 했던 역할이 출연자의 폐부를 찌르는 과감한 ‘돌직구’ 질문이었다면, 성유리는 애교로 출연자의 마음을 무장 해제시킨 다음 천천히 출연자를 긴장시키는 특유의 화법으로 주목을 받았다. 가수와 연기자가 아닌 인간 성유리의 매력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힐링캠프’를 진행하며 기자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됐죠(웃음). 초대 손님으로 나왔다가 MC를 하게 됐는데 좀 센 질문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전날부터 잠이 잘 안 오더라고요. 대본을 볼때 그 질문이 나오기 세 장 전부터 떨리는 거예요. 가끔 이경규 선배님이나 김제동 선배님에게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면서 넘기기도 했고요. 확실히 제가 질문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니까 기자들의 상황도 이해가 되더라고요. 예전에는 기자분들이 무섭고 따로 인터뷰 훈련을 받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편하게 말씀해주시고 제 말을 알아서 걸러 들어주시는 걸 보고 ‘이제 나도 나이가 많이 먹었나 보다’라는 생각을 해요(웃음).”
‘힐링캠프’를 통해 많은 배우들을 만나며 다시금 연기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배우로서 발을 내딛고 대중에게 각인될 수 있었던 진정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스스로를 다지게 됐던 것이다.

영화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 스틸 컷.
“요즘 저만의 느낌으로 이것저것 글을 쓸 때가 있어요. 주로 밤에 감성적인 느낌이 충만할 때(웃음) 잘 써져요. 가끔 수지씨를 여주인공으로 떠올리며 쓰기도 해요. 지금은 가수로서 활동을 안 하니까 가수 후배들을 잘 못 보거든요. 수지씨는 지나치기는 했지만 따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수지씨, 이민호씨와 같이 연기를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봤어요.”
수지를 선망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1990년대 대한민국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원조 ‘국민 요정’이었다.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은 없을까? 1990년대 복고 바람이 불며 올해 초 MBC-TV ‘무한도전-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에 핑클 멤버로 출연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당시 영화 촬영이 한창이었던 터라 무대에 오를 수 없었다. 굳이 다시 무대에 올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핑클에 대한 환상을 깨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핑클은 여전히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촬영장에 가거나 회식 자리에 가면 꼭 핑클 노래를 고르시고는 저한테 넘기세요. 춤으로 때우고, 최대한 빼다가 다들 취하셔서 뭘 불러도 좋아하실 때 살짝 부르곤 해요(웃음).”
성유리의 필모그래피는 또래 배우들과 비교하면 빽빽하지는 않은 편이다. 심사숙고하는 성격 탓에 작품을 고르기까지 시간이 걸려 뜸하게 한 작품씩 하게 됐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힘을 내서 더 많은 작품에 욕심을 낼 생각이란다. 핑클은 핑클이고 성유리는 성유리다. 10년도 더 지난 기억 속에 스스로를 가둘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연기자로서, 한 작품과 한 장면을 고민하는 배우로서, 좀 더 치열하게 삶을 살아갈 뜻을 내비쳤다.
“작품에 출연했다가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에 선택이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요즘은 작품이 많이 없기도 하고요. 대한민국 배우들의 연령대를 보면 특히 30대 여배우가 가장 많다고 하더라고요. 작품을 많이 하고 싶다는 욕심은 항상 있어요. 앞으로는 좀 더 열심히 연기 활동을 해나갈 생각이에요.”
영화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는 그 첫발을 뗀 작품이다. 대중이 알고 있는 핑클의 성유리로부터 벗어나 또 한 번 과감한 연기 변신을 통해 연기자로서 진화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어느덧 배우 13년 차. 하고 싶은 연기를 꼽아달라는 질문에 이제 막 연기를 시작한 신인처럼 그녀는 눈빛을 빛낸다.
“프랑스 여배우 마리옹 코띠아르를 좋아해요. 인형같이 생겼잖아요. 그런데 연기를 정말 잘해서 무서웠어요. 특히 ‘라 비 앙 로즈’를 보고 충격을 받았죠. ‘이민자’ 역시 훌륭했고요. 그런 연기를 해보고 싶어요. 영화도 그렇고 드라마도 그렇고 기회가 된다면 지금의 모습을 최대한 많이 남기고 싶어요. 나중에 보면 얼마나 좋겠어요. 누군가에게 ‘나 예전에 저랬단다’라고 이야기 해줄 수도 있고요. 그때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돼야죠.”
배우 성유리는 여전히 발전 가능성이 있는 배우다. 연예계 데뷔 17년 차, 이제까지 변해온 만큼 앞으로도 끊임없이 변해갈 것이다.
■기획 / 노정연 기자 ■글 / 하경헌(스포츠경향 엔터팀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