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정음은 예뻤다
“빨리 끝나길 바랐는데, 사랑스러운 혜진이를 보내려니 아쉽더라고요.”
황정음이 종영 소감을 털어놨다. 촬영 내내 하루 1시간씩 자면서 버티느라 제정신으로 연기한 적이 별로 없었을 정도로 힘겨웠단다. ‘로코’에 최적화된 배우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그녀지만 정작 ‘그녀는 예뻤다’ 대본을 앞에 두고는 잠시 망설였다. 사실 최근 그녀의 출연작을 살펴보면 김혜진처럼 명랑하고 쾌활한 여성을 연기한 건 참 오랜만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발랄한 지방대 휴학생 이후 ‘내 마음이 들리니’, ‘비밀’, ‘킬미힐미’ 등을 거치며 감정 연기의 추를 점점 무겁게 기울여왔다.
그동안 연기력에 대한 지적이 나온 것도 여러 차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려왔다. 대표 ‘원톱’ 여배우로 안착했을 즈음 ‘지붕 뚫고 하이킥’ 극본을 썼던 조성희 작가가 다시 내민 대본이 ‘그녀는 예뻤다’였다. 작가에 대한 신뢰와 소속사의 끈질긴 권유에다 ‘이번엔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해보자’라는 결심이 더해져 결국 황정음판 김혜진을 탄생시켰다.
시작은 그다지 산뜻하지 못했다. 첫 회 시청률은 4.8%(닐슨코리아 집계). 촬영 현장에 찬바람이 불고 배우와 제작진의 어깨가 땅에 닿는 소리가 날 정도로 실망스러운 성적이었지만, 하는 작품마다 좋은 성적을 거둬 작품 선구안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배우인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단다.
“낮은 시청률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잘될 줄 알았어요. 자만하는 게 아니라 그냥 믿는 거예요. 저는 제가 하는 작품은 무조건 잘된다는 생각으로 연기해요. 현장 분위기가 안 좋아도 걱정 안 하죠. 걱정한다고 해서 그 걱정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시청률은 정말 하늘이 정해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연연한 적이 없어요. 낮게 나와도 거기서 조금 올라가면 그걸로 그냥 좋아요. 작가님은 속상해서 펑펑 우셨대요. 근데 전 실제 반응이 너무 좋아서 첫 회 끝나고 ‘아, 잘되겠다. 더 열심히 해야지’ 했어요.”
반응이 뜨거운 드라마였던 만큼 끝나고도 말이 많았다. 결말 때문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이 비극을 암시하며 끝난 것 때문에 반전을 은근히 기대하는 시청자들도 있었지만, ‘그녀는 예뻤다’는 ‘해피엔딩’을 밀어붙였다. 그래서인지 반대로 “유치했다”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녀는 이 역시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저는 그냥 연기에만 집중해요. 대본 내용에 신경 쓸 시간에 작품에 해가 되지 않고 도움이 되도록 제가 할 일을 열심히 하죠. 결말과 내용은 작가님 몫이고요. 사람들이 결말을 궁금해했는데, 전 안 궁금했어요(웃음). 안 그러면 작품이 산으로 갈 수도 있거든요. 제가 별 생각없이 내용을 두고 말해도 감독님과 작가님은 진지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요. 전 제 분량도 그냥 작가님 믿고 가요. 운명이죠, 뭐.”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 속 황정음.
유별난 자신감이 만든 황정음의 오늘
‘속 편한’ 황정음이지만 그래도 ‘못생긴 여자’로 분하는 데선 좀 우울했단다. 못생겨도 너무 못생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중에 예뻐지긴 했지만 그 전에 채널을 고정시킬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심지어 상대역인 단짝 친구 민하리(고준희 분)는 한껏 멋을 부리고 다니는 인물이다. 김혜진이 사랑받을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시안을 받았는데 정말 어마어마한 거예요. 머릿결은 ‘후까시’를 막 이상하게 넣어가지고(웃음). ‘이게 맞을까? 여배우는 예뻐야 하는데’ 하고 걱정했죠. 집에서 혼자 많이 생각했어요. 못생긴 아이를 보고도 채널이 돌아가지 않게 하는 것이 제게 주어진 숙제였어요. 결국 ‘못생겼지만 성격까지 궁상맞게 가진 말자. 주눅 들지 말자’라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물론 작가님이 사랑스럽게 만들어주셔서 애초 걱정할 필요 없는 부분이긴 했어요. 어느 순간엔 예뻐 보이기까지 하더라고요.”
이런 김혜진에게 꽂힌 ‘지부편’ 지성준(박서준)과 ‘똘기자’ 김신혁(최시원), 이 두 남자와의 로맨스 후기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애틋한 첫사랑의 추억과 달달한 현재형 연애 감정을 함께한 박서준. 그와의 기억은 역시 ‘키스신’이다.
“서준이가 입술이 좀 두꺼워요(웃음). ‘나는 혜진이니까 아무것도 안 할 거야’라고 했더니 나중에 ‘벽이랑 하는 줄 알았어’라고 하더라고요.”
한편 단무지를 던져주면 넙죽넙죽 잘 받아먹던 최시원은 별 계산 없이 연기하는 게 자신과 통했다고. 실제로도 촬영 일정에 지쳐 있는 자신을 곧잘 웃겨줬다고 말할 땐 최시원에게 느꼈던 고마운 감정이 묻어났다.
아이돌 걸 그룹 멤버로 시작해 ‘지붕 뚫고 하이킥’을 통해 연기자로 각인된 뒤 6년, ‘믿보황’ 황정음은 이제 자신이 잘하는 연기가 무엇인지, 연기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배우가 됐다. 스스로 욕심도 많고 “그만큼 공부했으면 뭐라도 됐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피나는 노력을 했다고 자부하는 건 늘 눈에 띄는 발전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겐 예전의 ‘발연기’와 ‘로봇연기’ 모두 시원하게 인정하는 게 가능하다.
“인기를 얻고 갑자기 많은 걸 누리게 되면서 배우가 정말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하게 됐다”라고 밝힌 솔직함은 얄밉기보다는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연기대상은 서른다섯 살 전에 받는 게 꿈이라서 아직 2, 3년 남았다”라고 여유도 부린다.
“자신이 하는 생각이 자신을 만드는 것 같아요. 저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자신감이 좀 유별났어요. 친구들이 ‘쟤 왜 저래?’ 하고 핀잔을 줄 정도로요. 그런데 결국 그 자신감이 지금의 행복한 저를 만든 것 같아요. 간단한 건데 잘 안 되긴 하죠. 저도 그래요. 연기를 잘하면 중요한 사람 같다가도 연기를 못하면 스스로가 바보 된 것 같고요(웃음). 지금까지 그런 수많은 고민스러운 상황에 놓였죠. 하지만 결국 그걸 헤쳐 나가는 것도 자신의 몫이 잖아요. 중요한 건 좋은 생각, 예쁜 생각 아닐까요?”
황정음은 김혜진이 첫사랑 앞에서 그랬듯 중요한 건 무엇보다 자신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지금, 황정음은 예쁘다.
■기획 / 노정연 기자 ■글 / 허남설(경향신문 대중문화부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사진 제공 / M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