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그우먼 정선희, 그녀의 온도
“진짜로 돈과 상관없이 계속 바쁜 사람이 따로 있나 봐요(웃음). 한창 방송을 많이 할 땐 일을 그만두면 여유가 생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집에 있어도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해요. 개를 7마리나 키우기도 해서 하루가 끝날 때쯤이면 만날 곯아떨어져요.”
최근에는 한 권의 책으로 인해 더 바빠졌다. 그녀가 직접 한국어로 옮긴 「하루 세 줄, 마음정리법」(고바야시 히로유키 저, 지식공간)이 출간됐기 때문이다.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단 하나, 매일 세 줄의 일기를 써보라는 것. 방법은 단순하다. 하루 중 가장 안 좋았던 일, 가장 기뻤던 일, 내일의 목표 세 가지를 생각한 다음 한 줄로 적으면 된다. 2년 전 한 프로그램에서 ‘욕 일기’를 쓴다고 밝혔던 게 번역의 계기가 됐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있던 출판사 대표가 그녀에게 러브콜을 했다고 한다.
“예전에 ‘욕 일기’를 잠깐 쓴 적이 있는데, 이게 의외로 후련했어요. 말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아무리 쏟아내도 브레이크가 잘 걸리지 않잖아요. 그런데 글을 쓰면 눈에 보이니까 브레이크가 걸려요. 잔뜩 욕을 써놓은 게 아주 흉측했죠(웃음). 번역을 시작하면서부터 저도 세 줄 일기를 쓰고 있는데, 확실히 감정의 온도가 내려가는 느낌이 들어요.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너무 끓고 있는 건 도움이 안 되잖아요. 온도가 내려가니 여유가 생겼어요.”
자기 계발서보다는 서사가 있는 소설이 그녀의 취향. 그러니 정신과 의사가 쓴 이 책이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하지만 번역을 하면서 저자가 던지는 메시지에 그만 설득당하고 말았다. 비록 밤샘의 연속이었지만 꽤 즐거운 작업이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일기라는 것이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닌데, 써놓고 보니까 괜히 제 자신이 대견해지더라고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보였고요. 전 번역자일 뿐이지만 주변에서 책이 좋다고 하면 저도 모르게 성취감이 들어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숫자와는 영 친하지 않다는 그녀. 대신 ‘언어’와는 아주 가깝게 지냈다. 외국어를 한다는 건 정말 매력적인 일이었다. 이는 곧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중학교 시절, 그녀에게 일본인 이모부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어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모부랑 만나면 대화가 안 되니까 막막하더라고요. 그 무렵에 영어 이외의 외국어를 배워보고 싶었는데, 이왕이면 일본어가 좋겠다 싶어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1년 공부하다가 2년 놀고, 공부 한 게 아까워서 다시 공부하고…. 이렇게 계속 이어지다 보니 일본어 교재도 내고 번역도 하게 됐네요.”
슬픔이여 안녕
남편 안재환이 세상을 떠난지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어떻게든 살아갈 이유를 찾아야 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아파하는 게 두려웠다. 힘들다는 걸 인정한 순간, 무너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피하려고 할수록 불행해져갔다. 모든 걸 시간에 맡겨둘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흐르면 상처도 아물 것이기에, 지금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동안 제가 왜 힘들었는지 생각을 해봤어요. 저한테 일어났던 불행한 사건 탓도 있지만, 그보다도 오해받는 현실이 너무 억울했던 것 같아요. 연예인들은 대중의 리액션을 통해 존재를 인정받잖아요. 자신이 누군지 깨닫기도 전에 어느 누군가가 돼야만 하죠. 물론 제가 좋은 사람이 돼야 하겠지만, 선행을 하면서 스스로가 불행하면 안 되잖아요. 문득 내가 행복하게 살면서 주변에도 좋은 영향을 주는 삶이 정답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 그 고리를 끊겠다고 생각했어요. 방송에 대한 미련도 버리기 시작했고요. 그동안 당연하게 누렸던 것들에 대해 ‘땡큐’라고 의미를 부여했어요. 사람은 참 신기해요. 생각한 대로 변하더라고요. 박수 소리가 커지면 내가 대단한 사람인 것같이 느껴지고 소리가 작아지면 초라해질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것과 무관해졌어요.”
그녀는 ‘나’를 더 사랑하기로 했다. 그러고는 “나한테 쪽팔리지 않게 살면 돼”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타인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서 그런지 자신을 내세우는 게 쉽진 않았다.
“자신한테는 본인이 겪었던 슬픔이 가장 크게 다가오잖아요. 저는 그렇게 되는 게 정말 싫었어요. 한 많은 여자가 되고 싶지 않다고, 속으로 계속 빌었던 것 같아요. 내가 겪은 게 최고의 아픔인 양, 남의 아픔을 우습게 여기는 할머니로 늙기 싫다면서 말이죠(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되지 않은 것에 감사해요. 어떤 때는 ‘내가 개그우먼인데, 이제 어떻게 사람들을 웃기지?’라는 생각이 든 적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선천적으로 웃기는 걸 좋아하고 밝은 사람이거든요. 세상이 저한테 슬퍼하기를 바란다고 해서 우중충하게 살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바뀌기 시작했어요.”
여행을 하던 중 길을 잃은 상황. 어찌할 줄 몰라 헤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변에 펼쳐진 새로운 풍경들을 카메라에 담는 사람도 있다. 정선희는 카메라를 들기로 했다.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굳이 외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면 좀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아져요. 요새는 스스로를 구석으로 몰고 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럴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 저도 겪어봤으니 힘든 사람들의 심정은 이해해요. 그렇지만 이 세상에는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아요. 손에 잡히는 명예는 사실 별거 아니에요. 저도 일단 명예를 얻고 보자 하던 때가 있었어요. 한창 명예가 고플 신인 때 과로가 꿈이라고, 링거 한번 맞아봤음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었죠(웃음). 타인의 삶에 참견하려는 게 아니라 제가 선택해서 걷고 있는 삶에 대해 얘기해주고 싶어요.”

개그우먼 정선희, 그녀의 온도
지난해 1월, 그녀는 ‘TV 동물농장’에 다시 복귀했다. 딱 6년 만이었다. 2주에 한 번 녹화가 진행되는데, 이때마다 큰 에너지를 얻고 온다. 동물에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으니 현장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다고.
“(신)동엽 오빠, (김)생민이랑은 20년 지기니까 정말 편하죠. (장)예원이는 무척 귀엽고요. 큰일 났어요, 새끼처럼 귀여워서(웃음). 예전에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할 당시에도 ‘TV 동물농장’은 특히나 편안하고 즐거운 방송이었어요. 지금은 이게 유일한 일이다 보니 더 각별해진 것 같고요.”
한때 8개 프로그램을 도맡아 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더 이상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지 않기로 했다. 계속 방송에 집착할수록 껍데기가 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방송이 줄어서 스트레스 받았던 시기는 이미 지나갔어요. 완벽하게 예전과 동일한 상황이 주어졌을 때 다시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저를 점점 더 불안하고 초조하고 매력 없게 만들더라고요. 주어진 기회를 즐기면서 살고 싶어요. 남자친구가 소홀한 상황에 비유를 하자면 굳이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고 친구도 만나고 학원도 다니면서 재미있게 사는 거예요. 그가 저한테 마음을 주지 않으면 딴사람 사귀지 뭐, 이런 깡으로 가자는 생각이죠(웃음).”
정작 그녀는 모든 미련을 훌훌 털어버렸지만 아직 더욱 활발한 활동을 바라는 팬들이 있다. 라디오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반응 일색이다. 지난해 10월, SBS 라디오 ‘정선희의 오늘 같은 밤’에서 전한 인사를 끝으로 더 이상 DJ 정선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런 바람들에 힘이 실리고 시기가 맞아떨어지면 다시 시작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은 저 혼자 라디오를 짝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는데 이 사람의 마음이 돌아설 때까지 애걸복걸하느냐, 아니면 나를 잘 가꾸면서 기다리느냐. 딱 이 문제인 것 같아요. 언젠가는 당연히 그 자리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책을 읽다가도 좋은 구절이 나오면 적어놔요. 다시 꺼낼 날이 있을 테니까요.”
최근에는 인스타그램을 시작했다. 소통하는 법을 배워보라는 후배의 말에 계정을 개설하긴 했지만 아직 익숙지 않아 주로 ‘눈팅’만 하고 있다.
“지속적으로 사진을 업데이트할 성격도 못 되고, 쑥스럽기도 해서 SNS를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후배 하나가 언니는 완벽하게 갖추기 전엔 보여주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한번 일상을 공유해보라고 하더라고요. 함께 소통하는 사람들이 저에게 큰 힘을 실어줄지도 모른다면서요. 귀가 얇아서 바로 계정을 만들긴 했는데, 아직도 뭘 올려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웃음).”
글자를 쓸 때 들리는 ‘사각사각’ 소리가 좋아 번역을 할 때도 컴퓨터보단 종이와 연필을 사용한다. 2년 전부터 중국어를 배우고 있는데, 한자를 쓰다 보면 마음이 정리되는 느낌을 받는다고. 그녀는 이런 자신을 ‘촌년’이라고 표현한다. 최근에는 번역만 하지 말고 직접 글을 써보라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하지만 글보다는 말로 갈증을 푸는 편이라 큰 욕심은 없다. 단, 50대가 되면 동화를 써보고 싶은 소망은 있다.
“가끔 동화를 읽거든요. 마음이 뭉클해지는 작품들이 있어요. 동화를 쓰는 건 모든 문학 분야 중에서도 가장 순도 높은 작업인 것 같아요. 그래서 할머니가 되고서 쓰려고 해요. 전투적이고 호전적일 때보다, 마모가 돼서 낡아졌지만 따뜻한 온기가 있을 때….”
스무 살에 데뷔해 매일같이 일만 하다가 이제야 여유를 즐기게 됐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워커홀릭으로 살았는지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다.
“요즘엔 영화나 전시, 공연 보는 걸 정말 좋아해요. 여행 다녀온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 듣는 것도 재미있고요. 관절에 무리가 오기 전에 아르헨티나에 가서 탱고를 배우고 싶어요(웃음). 여행 계획을 짤 때의 그 묘미가 있잖아요. 요즘 스마트폰으로 세계 시각을 자주 봐요. 아르헨티나, 포르투갈, 덴마크, 이집트가 지금 몇 시인지 보면서 혼자 흐뭇해하죠.”
올 연말까지는 강연 스케줄이 많이 잡혀 있다. 지방에 갈 땐 주로 기차를 이용하는데, 얼마 전부터 그 매력에 푹 빠져버렸단다. 내년에는 꼭 기차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행선지는 정하지 않았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다니는 게 목표다. 어느새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는 나이가 됐다. 그래도 아직 하고 싶은 게 많다. 오늘도 그녀는 더 큰 세상과 마주하기 위해 밖으로 향한다.
■글 / 노도현 기자 ■사진 제공 / 하이씨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