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무후무한 연기로 브라운관의 신스틸러가 된 배우 백지원

전무후무한 연기로 브라운관의 신스틸러가 된 배우 백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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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지는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있다. 허구인 줄 뻔히 알면서도 어딘가에 저런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그런 연기를 하는 이들은 주인공이 아니어도 눈에 띄게 마련이다. 백지원은 그런 배우다.

전무후무한 연기로 브라운관의 신스틸러가 된 배우 백지원

전무후무한 연기로 브라운관의 신스틸러가 된 배우 백지원

진리가 이렇게 사랑받을 줄이야!
요즘 주부들 사이에서 가장 자주 회자되는 드라마는 단연 SBS-TV 주말드라마 ‘애인 있어요’다. 이 드라마에서 배우 백지원(43)은 재벌 천년제약의 맏딸이자 하고 싶은 말은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독설가 진리 역할을 맡았다. 말도 독하고, 표정도 표독스럽기 그지없다. 선한 구석이라고는 일 그램도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다. 그런데도 묘하게 밉지만은 않다. 그녀가 내뱉는 말이 때론 속 시원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녀는 시청자들로부터 ‘사이다녀’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사랑받고 있다.

“자신의 생각을 전혀 거리낌 없이 퍼붓는 유일한 인물이라서 시청자들이 통쾌하게 생각하는 거 아닐까요? 게다가 누구한테는 못되고 누구한테는 착한 게 아니라, 쭉 일관되게 모든 사람에게 못됐어요(웃음). 심지어 남편에게까지요. 사실 제가 생각할 때 진리 나름으로는 매사에 굉장히 진지해요. 다만 그 진지함에 상대방의 감정을 배려하는 것은 전혀 들어 있지 않아요. 굉장히 유아적인 정서를 가진 여자죠.”

백지원의 대사 중에 특히 화제가 됐던 독설이 있다. 더 정확히는 주부 시청자들의 박수가 터졌던 대사다. 극 중 자신의 이복동생 진언(지진희 분)과 결혼하겠다는 설리
(박한별 분)에게 “너도 유부남인 것 알고 덤벼들었다. 기억상실증이냐. 네가 하면 사랑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냐”라고 퍼부었다. 또 뒤늦게 전 처인 해강(김현주 분)에 대한 애정을 내비치는 진언에게는 “지가 버려놓고 어떻게 사랑이 나오길 바라느냐”라고 일갈해 시청자들로부터 “속이 다 시원하다”라는 반응이 쏟아졌다.

백지원이 악역을 연기하면서도 사랑받는 것은 그녀의 맛깔스러운 연기에 이유가 있다. 특히 놀란 부분은 백지원의 대사 처리다. 남이 한 마디 하면 열 마디로 받아치는 진리 캐릭터는 대부분의 신에서 대본 한 장 이상 되는 많은 대사 양을 소화해야 한다. 그럼에도 길고 긴 대사를 때론 속사포처럼, 때론 이죽거리며 쏟아내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다. 오버할 때는 확실하게, 능글거려야 할 때는 사악한 뱀처럼 느물대는 솜씨가 대단하다.

“배유미 작가님이 굉장히 리드미컬하게 대사를 써주시는 덕분이에요. 그냥 읽으려야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의 리듬이 살아 있어서 늘 감탄스러워요. 저는 거기에 높낮이를 좀 더 추가하는 정도고요. 그리고 진리 자체가 고민을 많이 하고 남을 배려하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연기를 할 때도 그렇게 하려고 해요. 그래도 예전부터 발음 하나는 자신 있던 부분이긴 해요(웃음).”

연기를 하면서 가장 호흡이 척척 잘 맞는 상대는 극 중의 앙숙인 새엄마 역할의 나영희다. 드라마상의 앙숙 설정과는 딴판으로 백지원을 잘 이끌어준단다.

“제가 어떻게 나가도 아주 노련하게 잘 받아주며 연기를 이끄는 선배님들이 계세요. 나영희 선배님이 그런 분이에요. 제가 정말 편하게 연기할 수 있게 해주세요. 자주는 못 만나지만 아버지 역할의 독고영재 선배님도 마찬가지로 후배들을 편하게 해주셔서 연기하기가 수월하고요. 제일 자주 만나는 남편 역의 공형진 선배도 마음대로 해보라고 넓게 열어주는 편이에요. 파트너 복이 참 많아요.”

그녀는 ‘애인 있어요’ 최문석 감독의 전화 한 통으로 진리와 인연을 맺게 됐다. 전화기 너머 대뜸 들려오는 첫마디가 재미있었단다.

“‘못생긴 역할인데 괜찮아요? 그렇다고 지원씨가 못생겼다는 건 아니고요.’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알고 보니까 극 중 진리 설정이 ‘성형으로도 안 되는’ 외모였어요. 저는 괜찮다고, 좋다고 했죠. 전혀 상관없었어요.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이제는 홑겹의 제 외모가 개성 있다는 소리도 듣고 있거든요(웃음).”

드라마의 인기가 뜨거운 것은 지진희가 연기하는 최진언을 향한 여성 팬들의 열광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득 진리가 아닌 평범한 여자로서 백지원은 최진언 같은 남자를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했다.

“개인적으로 우유부단한 사람은 좋아하지 않아요. 대답이 됐을까요?(웃음) 아마 시청자들도 마음의 혼란을 겪으면서 보시는 것 같아요. 분명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진언이 같은 남자는 용서가 안 되는데 그럼에도 왠지 끌리고 좋아지니까 어쩐지 짜증이 나는 혼란스러운 기분, 그런 거요.”

조곤조곤하면서도 딱 부러지는 말투로 ‘갈대남’은 싫다고 말하는 그녀. 극 중 진리의 캐릭터와는 판이하게 다른 성격을 가졌다. 인터뷰 내내 차분하고 신중한 모습이었으며, 쑥스러움도 많이 탔다. 대답은 거의 천천히 곱씹어보고 뱉어냈다. 맡은 역할이 꼭 배우의 실제 모습과 닮을 필요는 없지만, 이렇게 다른데 그동안 드라마에서 얄미운 역할만 도맡아왔다는 것은 놀라웠다. 더구나 조연임에도 출연 작품마다 탁월한 ‘밉상’ 연기를 잘 소화했다.

“이러다가 얄미운 역할로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 아니냐고 묻는 분들도 계세요. ‘밀회’와 ‘풍문으로 들었소’, ‘떴다 패밀리’에서 맡은 역할들이 크게 보면 못되고 얄미운 역할들이지만 나름대로 색은 조금씩 달라요. 고착된다는 걱정은 전혀 안 해요.”

연극 무대에서 차근차근
유독 발음이 뛰어난 배우들을 추적해보면 무대 출신이 많다. 백지원도 그런 경우인가 물었더니 역시 그랬다. 연극배우라는 평범치 않은 길을 걷게 된 계기는 의외로 지극히 사소했다. 예술가라고는 한 명도 없던 평범한 집안의 1남 1녀 중 장녀. 조용한 모범생이었던 그녀 앞에 낯선 모습의 친구가 나타났다.

“이화여고를 다닐 때였어요. 어느 날 한 친구가 눈에 들어왔는데, 굉장히 독특한 분위기에 무척이나 자유로워 보이는 아이였어요. 전에 보지 못한 스타일이었죠.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생겼는데, 알고 보니 그 친구가 연극반이더라고요. ‘아, 연극반 친구들은 다 저런 느낌인가?’ 싶기도 하고, 호기심이 일어서 연극반에 들어갔죠.”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대학은 연극과로 진학하지 못했다. 차선책으로 원예학과를 선택했다. 학교 연극부 활동으로 연기에 대한 갈증을 풀었다. 대학 졸업 후에 극단 연우무대에 들어가면서부터 본격적인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96년 ‘떠벌이 우리 아버지 암에 걸리셨네’가 데뷔작인데, 이때 아버지께서 직접 공연을 보러 오셨다. 맏딸의 연기를 처음으로 보는 순간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아버지께서 ‘이왕 하려면 잘하고, 열심히 해라. 그리고 왜 하려고 하는지 알겠다’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처음엔 반대하시던 분이 제 무대를 보고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무척 기뻤죠. 그때부터 정말 열심히 했어요.”

7년간의 극단 생활은 그녀에게 배우로서 영광스러운 굳은살을 만들어줬다. 백지원의 탄탄한 연기력의 기원은 무대였다. 연극배우였다고 하면 의례히 떠올리는 힘든 시절이 그에게는 없었을까.

“극단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서 슬럼프를 한 번 겪은 것 말고는 크게 힘들었던 적은 없었어요. 저는 정말 운이 좋은 케이스였어요. 다행히 작품을 꾸준히 쉬지 않고 할 수 있었거든요. 연극배우로서 부족한 게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게 더 급하고 중요했죠. 그래서 딱히 영화나 드라마 등 다른 장르를 마음에 품어본 적도 없었고요.”

그녀의 말대로 운이 좋았던 것만은 아닐 것이다. 어떤 작품이든 믿고 역할을 맡길 수 있는 연기력을 갖췄기에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그래서 늘 캐스팅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을 것이다.

전무후무한 연기로 브라운관의 신스틸러가 된 배우 백지원

전무후무한 연기로 브라운관의 신스틸러가 된 배우 백지원


전기가 된 안판석 감독과의 만남
이후 백지원은 자연스럽게 영화와 드라마로 영역을 넓히게 됐다. 스스로가 먼저 애써서 영화, 드라마 오디션을 본 적은 없었다. 당장 하고 있는 공연에 대한 고민만으로도 바빴기 때문이다. 주로 공연을 본 제작진이 그녀를 캐스팅하면서 이뤄졌다. 그러다 브라운관에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리게 된 것이 2012년 JTBC ‘아내의 자격’이다. 드라마 판의 콤비로 이름난 안판석 감독, 정성주 작가의 작품이었다. 백지원의 공연을 본 캐스팅 디렉터가 그녀를 추천해서 출연이 성사됐다. 매일 무대 위에서 라이브로 관객과 만나다가 수십 대의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려니 혹시 어색하진 않았을까. 이를테면 바다에서만 수영하던 사람이 난생처음 수영장에서 수영을 해야 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처음에 ‘아내의 자격’을 촬영할 때는 ‘이건 드라마다’라는 생각을 아예 안 했어요.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 그냥 똑같은 연기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그 생각은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아요. 연극적 발성이나 과장된 연기가 아닌 리얼한 연기를 추구하는 소극장 공연을 주로 해왔기 때문인지 드라마에 대한 어색함은 거의 없었어요.”

그 자신은 ‘똑같은 연기’라고 생각했다는데. 드라마로는 처음인 백지원의 연기를 지켜본 안판석 감독은 좀 다른 느낌을 받았단다.

“저 혼자 똑같다고 생각한 거지, 안 감독님은 제 모습을 되게 재미있게 보셨나 보더라고요. 전형적인 드라마 연기가 아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저 아이는 뭐지?’ 싶었다는 걸, 나중에야 들었어요(웃음).”

‘아내의 자격’으로 시작된 인연은 2014년 JTBC ‘밀회’, 2015년 SBS-TV ‘풍문으로 들었소’까지 내리 이어졌다. 세 드라마 모두 큰 화제와 인기를 얻은 작품. 감독이 한 배우를 연속해서 캐스팅한다는 것은 웬만한 신뢰와 애정이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인데, 이쯤 되면 ‘안판석 사단’이라고 불러도 모자람이 없지 싶다.

“제가 느낀 안판석 감독님, 정성주 작가님은 아주 정확한 분들이에요. 배우를 볼 때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구나, 어떻게 살았겠구나’라는 걸 쭉 스캔해내는 능력이 탁월하신 것 같고요. 특히 안 감독님의 작업 스타일이 굉장히 좋아요. 현장에서 콘티가 상당히 정확한데, 그래서 배우들이 연기하기가 정말 편해요.”

가늠할 수 없이 깊은
백지원은 JTBC ‘밀회’에서는 남몰래 신분 상승을 꿈꾸는 왕비서 역할을, SBS-TV ‘풍문으로 들었소’에서는 유능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유신영 변호사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다. 비중이 큰 역할은 아니었어도 늘 제 몫을 톡톡히 해내는 믿음직스러운 연기를 선보였다. 덕분에 올 한 해에만 SBS에서 내리 세 작품(떴다 패밀리-풍문으로 들었소-애인 있어요)을 할 정도로 캐스팅 1순위 배우로 자리 잡았다. 연극 무대에서 쌓아온 내공이 브라운관에서 더 많은 대중을 향해 만개한 셈이다. 연속으로 캐스팅이 잘되니 배우로서 행복했겠다 싶었는데, 사실 2013년 즈음 그녀는 심한 슬럼프를 겪었단다. ‘밀회’에 캐스팅되기 직전이었다.

“많이 지쳐 있었어요. ‘아, 이제 연기를 그만둬야지’라는 생각까지 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마흔앓이’였던 것 같아요. 나 잘 살고 있나? 똑바로 살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배우로서의 삶에 회의가 밀려왔어요. 그런데 딱 그때 안판석 감독님께 전화가 왔어요. ‘지원씨 요즘 뭐 해요?’ 하는 감독님의 목소리를 듣는데 다 풀리는 거예요. ‘저 갈게요!’라고 냉큼 대답했죠. ‘밀회’를 하면서 신나게 연기하다 보니 ‘마흔앓이’가 완전히 사라졌어요. 제가 의외로 단순하기도 하거든요(웃음).”

신중하게만 보이던 그녀가 실은 자신이 단순한 성격이라고 고백했다. 의외의 모습은 또 있었다. 사진 촬영 중 백지원은 불현듯 힙합 가수 에미넴의 ‘Lose Yourself’를 틀어달라고 청했다. 우아한 스커트 차림을 한 채 이 여배우는 힙합 비트를 타며 즐겁게 포즈를 취했다. ‘즐겨 듣는 노동요’라면서 말이다. 인터뷰 내내 신중하고 단정한 모습이었던 백지원은 연신 웃음을 터뜨렸고, 얼핏 개구쟁이 같은 모습도 비쳤다. 그 모습이 반가웠다. 이렇게 다양한 면모를 지닌 사람이라면 앞으로 더 다채로운 모습을 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좀 더 묵직한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풍문으로 들었소’에서 맡았던 유신영 변호사보다 좀 더 깊고, 더 속을 알 수 없고, 저 사람이 어떻게 할 것인지 궁금해지는 그런 역할을 꼭 해보고 싶네요.”

듣다 보니 궁금하다. 매번 전무후무한 연기로 브라운관의 신스틸러가 된 배우 백지원이 앞으로 어떤 작품을 선택하고, 또 어떤 기막힌 연기를 보여줄지 말이다.

■기획 / 노정연 기자 ■글 / 정성민(프리랜서) ■사진 / 이민희(프리랜서) ■제품 협찬 / 도로시 슈마흐 by 피에르테·오스칼리토 by 피에르테(02-549-7710) ■스타일리스트 / 김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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