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곁에 길해연
“일주일에 한 번 임권택 영화학교 초빙교수로 부산에 가요. 올라오는 길에 울산연극협회에 들렀는데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나 밤새 얘기하느라 목이 다 쉬었어요. 이렇게 마음 놓고 쉬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하는 일 없이 바쁘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2015년은 길해연에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한 해였다.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이하 풍문)’를 시작으로 ‘어셈블리’와 ‘발칙하게 고고’에 연달아 출연했고, 지금도 드라마 ‘라이더스’와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을 촬영 중이다. 그 와중에 강의와 공연도 하고 있으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다 싶은데 표정에선 여유가 넘친다.
사실 길해연은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바삐 살아왔다. 1986년 극단 ‘작은신화’를 공동 창단하며 연극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연극배우로, 작가로 쉬지 않고 달려왔다. ‘풍문’에서 한정호(유준상 분)의 비서 양재화 역으로 출연하며 시청자에게 눈도장을 찍었지만 연극계에선 이미 널리 알려진 베테랑 배우다. 무대 위의 삶을 살아오던 그녀가 드라마를 통해 시청자를 만난 건 2012년, 안판석 감독의 드라마 ‘아내의 자격’을 통해서다. 그녀가 맡은 인물은 조선족 가사 도우미 하섬진. 연기 같지 않은 리얼함에 ‘어디서 진짜 연변 사람을 데려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그녀는 이전에 한 번도 사투리를 써본 적이 없단다.
“사투리라는 것이 어느 정도 훈련을 하면 비슷하게는 할 수 있겠지만 토박이들의 그 느낌은 따라갈 수가 없거든요. 제가 아무리 흉내를 내도 못 쫓아가겠다 싶어 몇 번 영화 출연 제의가 왔을 때 고사한 적이 있어요. 사실 그래서 ‘아내의 자격’도 못하겠다 싶었죠. 한번은 식당에서 일하시는 조선족분을 찾아간 적이 있는데, 이분이 하시는 말씀이, 할 거면 제대로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드라마에 나오는 조선족 사투리는 죄다 엉터리라면서요. 말도 말이지만 그분들이 풍기는 당당한 이미지가 있어요. 중요한 건 그 캐릭터가 풍기는 느낌이겠다 싶어 사투리보다는 전반적인 느낌을 표현하려고 애썼죠. 그런 점을 리얼하게 봐주신 것 같아요.”
그 후로도 안 감독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이듬해 ‘세상의 끝’과 ‘밀회’, ‘풍문으로 들었소’까지 매년 한 편씩 작품을 함께했으니 ‘안판석 사단’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사실 그동안 ‘꼭 연극만 하겠다’ 그런 건 없었어요. 워낙 하던 일을 쭉 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작품이 들어와도 공연이 먼저인 경우가 많았고, TV 쪽으로는 적극적인 액션을 취하지 않았죠. 그러다 안판석 감독님을 만났는데 생각이 굉장히 앞서 계시더라고요. 시스템이나 방식에 대해 소리 없는 운동을 하시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자리에 꼭 필요한 캐릭터를 만들어주시고요. 가까이서 작업하다 보면 경외심 같은 게 생겨요. 특히 ‘풍문’은 저희들끼리도 대본 나올 때마다 토론하고 생각하며 이야기를 많이 나눈 작품이에요.”
지금, 우리 곁에 길해연
‘풍문’에서 그녀가 연기한 양재화는 충직함과 노련함으로 대변되는 인물이었다. 거대 로펌 대표 한정호의 ‘왕비서’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좌하는 조력자이자 지략가. 드라마를 즐겨 봤던 시청자라면 한 번쯤 ‘옆에 저런 비서 한 명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어 출연한 정치드라마 ‘어셈블리’에서 의석 4개짜리 미니 야당의 대표 ‘천노심’ 역을 맡으며 국회의원으로 나름 ‘승격’됐지만 아직 그녀를 ‘양 비서’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어셈블리’를 촬영하러 갔는데 다들 저보고 ‘양 비서님’이라고 하더라고요. 나름 국회의원인데 비서로 다시 강등됐어요(웃음). ‘풍문’이 작품도 큰 사랑을 받았지만 양재화라는 캐릭터를 많이 기억해주시더라고요.”
어린 시절 글쓰기를 좋아했던 그녀가 처음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고등학교 때 우연히 본 희곡의 매력에 빠지게 되면서부터였다. ‘희곡을 써보면 재밌겠다’ 싶어 동덕
여대 국문과에 진학했고 1986년 서강대, 중앙대, 국민대 등 10여 개 대학극회 출신의 또래들과 ‘작은 신화’라는 극단을 만들었다. ‘사막에 한 줄기 물을 뿌리는 심정으로, 오만하고 거창하지 않게 해보자’라는 것이 창단 취지였다.
“배우와 연출 구분 없이 우리끼리 모여 대본 읽고 작품 번역하고 연극 얘기하며 시작한 극단이었어요. 의욕은 충만했지만 운영이 어려워 라면 먹다 젓가락 던지며 울기도 했죠. 그때까지만 해도 평생 배우를 하리라 생각하지 못했어요.”
극단의 운명은 뜻밖의 비극에서 다시 한번 출발점을 찾게 된다. 운영이 너무 힘들어 마지막 공연이란 생각으로 작품을 준비하던 중 극단 대표이자 연출가였던 고 이유철씨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 남겨진 단원들은 의리로 똘똘 뭉쳐 추모 공연을 준비했고 결국 그것이 평생 연극에 대한 의리로 발전하게 됐다. 그녀의 운명도 극단과 함께였다.
“그 친구가 연습하던 작품을 꼭 무대에 올려야 한다는 것이 저희에게는 숙제로 남았던 것 같아요. 추모 공연을 마치고 지금 극단 대표인 최용훈씨와 저 그리고 몇 명이 남아 10년만 더 해보자 한 거예요.
그때쯤엔 뭔가 돼 있겠지 하고요. 근데 10년이 지나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더라고요. ‘야, 이상하다. 10년만 더 해볼까?’ 그렇게 해서 20년을 했어요. 그러고 나니 그 후부터는 그냥 가는 길이 됐어요. 그렇게 30년을 왔네요(웃음).”
농담처럼 웃으며 30년을 이야기하는 그녀이지만 여느 연극배우들의 삶이 그렇듯 그녀 역시 배고픈 연기자의 길을 걸어왔다. 1990년대 초반부터 어린이 극단 연극 교실을 통해 아이들을 만나온 경험은 그녀의 연기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간이다.
“당시 연극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시기였어요. 제가 아무리 무대 위에서 열심히 한들 빵 한 조각의 가치만큼이라도 세상에 도움이 될까 싶더라고요.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어린이 극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됐는데 그때 연극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아이들이 연극을 통해 행복해하고 변해가는 과정은 정말 놀라워요. 마술 같은 경험이었죠. 저 역시 아이들에게 많은 걸 배웠고요. 그러다 보니 처음엔 연극과 5:5 정도로 비중을 두고 시작한 일이 점점 그쪽으로 중점을 두게 되더라고요.”
어느 순간 ‘내가 이걸 왜 시작하게 됐지?’ 싶었단다. 어린이 연극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여기저기 일이 들어오던 시기에 과감히 그만두고 다시 연극판으로 돌아왔다. 주변에서는 후회할 거라고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좀 더 연극에 올인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돌아온 연극판에서 그녀의 진면목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2001년 관객과 평단의 뜨거운 찬사를 받은 연극 ‘돐날’은 초연 당시 제10회 대산문학상과 2001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선정 베스트3, 2002 동아연극상 작품상·연출상 등을 수상하며 수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 됐다. ‘돐날’의 연출가 심재찬은 그녀를 두고 “침착하면서 힘 있는 그로테스크함을 겸비했다”라는 찬사를 보낼 정도였다. 그 후 ‘양파’, ‘꿈속의 꿈’ 등 쉴 틈 없이 연극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연기 인생은 동료 배우였던 남편이 2007년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며 또 다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신증후군을 앓고 있던 중학생 아들을 돌보며 1년에 5, 6편의 연극 출연과 대학 강의, 연기 레슨에 매진했고, 어린이 극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경험을 바탕으로 10여 권의 동화책도 냈다. 그때부터 그의 별명은 ‘힐러리보다 바쁜 길러리’가 됐다. 영화와 드라마 출연도 그 연장선에 있다. 그러는 사이 연극판을 주름잡던 길해연은 대중곁에 가까이 다가오게 됐다.
“저는 세월 얘기하는 걸 싫어해요. 30년이라고는 하는데 연극에 제 몸과 마음을 다했던 시간은 저만 알아요. 후배들에게 그런 얘기를 해요. 날개가 돋을 때 날아오르려고 하면 못 난다, 절벽에서 뛰어내려야 필사적으로 날게 된다, 라고요. 물론 죽을 수도 있지만요(웃음).”
지금, 우리 곁에 길해연
“제가 사는 방식이 무언가를 정해놓고 가진 않아요. 그냥 뚜벅뚜벅 걸어가는 거죠.”
그녀가 또 한 번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인생에서 몇 번의 큰 절벽을 건너며, 염세주의 문학소녀는 세상에 둘도 없는 낙천주의자가 됐다.
“얼마 전에 한 후배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그 친구가 이혼을 두 번 했는데 그래도 저를 못이기는 것 같다고요. 그래서 ‘그래, 고맙다’ 했어요(웃음). 저희 아버지도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고 남편도 그렇게 갔어요. 가까운 이의 느닷없는 죽음은 사람을 굉장히 혼란스럽게 만들어요. 당황스럽고 받아들여지지 않죠. 그 시련들을 이겨내기 위해선 담대해지고 씩씩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살면서 힘든 일을 겪었을 때, 내가 정말 죽을 게 아니면 어떻게든 헤쳐 나가야 해요. 슬퍼할 땐 슬퍼해야죠. 마지막까지만 주저앉아 있지 않으면 돼요. 그렇게 얼마간을 슬퍼하고 괴로워하다 다시 일어나서 가야 하는 게 인생이에요.”
30대에는 힘든 시간을 버티느라 눈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단다. 아이도 어렸고 경제적으로도 힘든 시기였다. 40대가 되면서부터는 하나둘 고민을 놓기 시작했다. 상황이 좋아졌다기보다 마음이, 뚜벅뚜벅 인생을 걷는 보폭이 달라졌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에게서 에너지를 얻어요. 연기하며 만나는 사람들과 학생들, 동료들…. 생각해보면 시련은 계속 있었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을 통해 더 건강해지고 의연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그랬듯 저 역시 힘든 누군가를 다독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해요. 제가 하는 연기 역시 마찬가지고요”
연기하며 가장 뿌듯했던 순간을 묻자 그녀는 어머니 얘기를 꺼냈다. 오랜 시간 연극을 반대해온 어머니가 지난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는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했을 때 오랜 세월 풀지 못했던 서로에 대한 마음의 빚을 던 기분이었다고.
“그때 후배들이 참 부러워했어요. 대부분의 연극배우들은 부모님께 죄송함을 가지고 있거든요. 연극을 한다는 건 어찌 보면 유명하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거니까요. 어떤 어머님은 딸이 아침드라마에 나오는 게 소원이라고도 하세요. 저 역시 집에서는 매일이 투쟁이었어요. 지금도 지나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이 계속되는 한 언젠가 또 시련은 찾아올 테니까요. 거짓된 희망으로 위로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고 씩씩해지자고 말해요. 연기자로서 ‘시련은 없어요’가 아닌 그걸 딛고 일어나는 모습으로 희망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유난히 바빴던 한 해를 마무리하며 그녀는 다시 스스로를 재정비하고 있는 중이다. 세계 각지의 영화제에서 극찬을 받은 그녀 주연의 화제작 ‘인 허 플레이스’도 해가 바뀌기 전 한국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시련과 수없이 많은 좌절의 시간을 겪었지만, 이제껏 배우의 길을 걸어온 걸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그녀. 길해연은 누구보다 멋지게 살고 있다. 듣는 사람을 안도하게 하는 그녀의 호방한 웃음만큼이나 말이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원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