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답하라! 변진섭의 추억의 명곡 주목
1989년 2월 14일 「경향신문」에 실린 변진섭(50)의 인터뷰 기사 중 일부다. 88서울올림픽의 잔상이 남아 있던 1988년 가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그의 첫 앨범「홀로 된다는 것」이 나왔다. 부드럽고 잔잔한 음색은 뭇 여성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하루 150통이 넘는 팬레터가 그의 집으로 배달됐다. 앨범이 20만 장이나 팔려 난생처음 차(현대의 ‘스텔라’)를 구입했다고 자랑하던 그는 어느새 데뷔 29년 차 베테랑이 됐다. 12집 후반 작업이 한창이던 무렵, 녹음실에서 그를 만났다.
정규 앨범은 참 오랜만이에요. 많이 설레고 조심스러워요. 오랜만에 내는데다 이번 앨범은 반은 신곡이고, 반은 여태껏 불렀던 음악으로 구성됐거든요. 어떻게 보면 제 음악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 펼쳐놓은 듯한 느낌이에요. 보통 신곡 음원 낼 때보다는 더 조심스럽죠.
12집이 늦어진 이유가 있나요? 그런 건 없고요. 8년 만에 정규 앨범을 냈다고 하면 음악을 쭉 쉰 것처럼 들리는데, 매년 신곡을 발표해왔어요. 근데 잘 안된 거죠(웃음). 그래서인지 그 8년이 마치 공백기처럼 느껴지는 것 같아요.
앨범 소개 좀 해주세요. 리메이크 곡들은 말할 필요 없이 ‘변진섭’ 느낌이고요. 신곡 같은 경우에는 그래도 제가 인생을 조금은 살았기 때문에 인생에 대한 느낌을 담담하게 표현해봤어요. 우리 또래의 성인들이 듣기에도 참 좋은 발라드랄까요?
리메이크 버전은 색다르게 편곡이 된 건가요? 원곡이랑 똑같은 느낌을 원하는 분들도 있어요. 근데 지금은 목소리가 변했으니 거기에 맞게 편곡도 해야 할 것 같더라고요. 목소리가 변하면 음악도 변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시대도 많이 변했고요. 쉽게 말하면 이번 리메이크 곡들은 좀 세련돼졌는데, 예전의 풋풋한 맛은 덜할 수 있어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느낌이 나게끔 바꿔봤거든요.
응답하라 변진섭
‘날아가는 새들 바라보며 나도 따라 날아가고 싶어. 파란 하늘 아래서 자유롭게 나도 따라 가고 싶어.’
1집 수록곡인 ‘새들처럼’이 흘러나오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첫 회가 시작된다. 여주인공 덕선(혜리 분)이 짝사랑하던 친구 선우(고경표 분)에게 건넸던 선물도 변진섭 1집 테이프였다. 그녀는 수록곡 목차 중 ‘네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에만 형광펜을 칠해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다. 지금은 좀처럼 보기 힘든 풋풋한 아날로그 감성이다. 선우가 영어 사전을 빌리러 덕선의 집을 찾은 날엔 ‘숙녀에게’가 잔잔히 흐른다. 덕선은 자신을 만나러 온 줄 알고 기뻐했지만, 선우가 진짜 보고 싶어 했던 ‘숙녀’는 덕선의 언니인 보라(류혜영 분)였다. 이렇듯 ‘변진섭’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본인의 노래가 드라마에 쓰일 걸 알고 있었어요? 예상은 했죠. 매니저가 제일 먼저 그러더라고요. ‘응답하라 1988’이 방영된다는데, 1988년이면 딱 데뷔할 때니까 제 노래가 재조명될 것 같다고요. 사실 저는 그 시리즈를 못 봤거든요. 그래서 별 감흥이 없었는데, 아내도 제 노래가 많이 나올 거라고 말해줬어요. 첫 방송한 날 지인들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오더라고요. 첫 곡으로 제 노래가 나왔다고, 정말 좋았다고요.
극 중에서 음악의 역할이 굉장히 커요. 드라마가 내세우는 게 그 시대를 추억하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거잖아요. 제일 빠질 수 없는 게 음악이에요. 화면 속에 보이는 소품들을 보면서 “그래, 기억나” 하는 부분도 많지만 가장 강하게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건 음악이라고 봐요. 음악 하나만으로도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으니까요.
‘응팔’은 시청하나요? 식구들이 한번 보자고 해서 첫 회를 봤어요. 소품부터 시작해서 당시 상황을 어찌나 잘 재현해놨는지 제대로 만들었단 생각이 들던데요. 근데 그 뒤론 못 봤어요. 주변에서 얘기는 많이 들어요. 어느 장면에서 어떤 노래가 나왔다고 지인들이 중계해주거든요(웃음). 한번은 큰아이가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여주면서 이거 아빠 얘기 맞느냐고 물었어요. 여주인공이 좋아하는 연예인이랑 자기 이름을 가지고 ‘이름 점’을 보는 장면이었는데, 제 이름이 나왔더라고요. 아들한테 “아빠 얘기 맞겠지~” 하니까 막 웃었어요. 근데 우리도 남자들이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하면 쑥스러워요. 계속 신기해하기에 “그럼 아빠 얘기지, 누구 얘기겠냐?” 그랬더니 “우와 웃긴다~”라는 반응이었죠.
1988년, 스물세 살의 변진섭을 기억해요? 디테일하게 다 생각나는 건 아니지만 전 그때 음악 말고는 아무것도 못하는 젊은 청년이었어요. 경희대학교 밴드 ‘탈무드’ 5기 출신인데, 맨날 합주실에만 있었어요. 저녁 되면 김치찌개에 소주 먹다가 방배동, 명동, 이태원 다니면서 생음악 하고, 12시 넘어서 집에 들어가 쓰러져 자고 그랬죠. 데뷔 당시에는 내가 가수가 됐다는 개념이 별로 없었어요. 이 생활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요.

응답하라! 변진섭의 추억의 명곡 주목
가수가 되지 않았다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사실 음악 외에는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도전 대상이 없었어요. 부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면 의사나 선생님으로 살지 않았을까 싶어요. 저 역시 계속 가수로 살 생각이 없었는데도 자꾸 손에 앨범이 들려 있고 무대에 올라가고 있더라고요. 무수히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도 한편으론 남의 인생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가수왕이 됐을 때도 담담했고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느끼는 게 있어요. 내가 그동안 가면을 쓰고 이중생활을 했던 게 아니라, 나는 가수가 되고 싶었고 가수가 되기 위한 길을 걸었다는 것을요.
1988년 하면 생각나는 아이템을 꼽아주세요! 데뷔를 했던 해라서 그런지 가수들의 패션이 생각나요. 어깨에 주먹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뽕’이 어마어마했어요. 어깨가 엄청 넓어지니 그만큼 얼굴이 주먹만 해 보이는 효과가 있었죠(웃음). 게다가 TV도 지금처럼 와이드 HD가 아니라 진공관 TV였으니까 어깨가 화면에 꽉 찼어요. 저도 여러 벌 맞춰서 입었는데, 가끔 옛날 영상들 보면 정말 웃겨요.
그 시기에는 어떤 노래를 좋아했어요? (이)문세 형 노래 중에 ‘소녀’, ‘휘파람’, (조)용필이 형 노래 중에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를 좋아했고요. 들국화의 ‘사랑일 뿐이야’랑 송골매 노래도 많이 들었어요. 그때 좋은 노래가 참 많았죠.
본인의 노래 중에 재조명 받았으면 하는 곡이 있다면? ‘지금 이대로’랑 ‘눈물이 쓰다’라는 노래요.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제가 좋아하는 곡이에요. 이번 앨범에도 제 욕심으로 집어넣었죠. 다른 히트곡만큼 노래가 좋아요. 어떤 특징이 있는 건 아니지만 딱 들으면 ‘변진섭표 발라드’라는 걸 느낄 수 있어요.
변한 듯 변함없는
영원한 오빠로 남을 줄 알았던 그는 2000년 수중발레 국가대표 출신인 이주영씨와 결혼했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됐다. 열여섯, 열네 살인 두 아들은 그를 똑 닮았다. 특히 둘째는 아빠의 절대음감을 물려받아 음악에 재능을 보이고 있다. 열두 살 어린 아내는 그의 전성기 시절을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언제나 그의 노래에 귀 기울인다. 오빠의 눈짓, 말 한마디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소녀 팬들도 이제는 30, 40대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토록 소중한 추억을 공유하기에 그들의 인연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매년 여름 팬들과 캠프를 떠난다고 들었어요. 작년에 했던 캠프가 21회였어요. ‘나는 가수다’ 때문에 도저히 시간이 안 맞아서 못 갔을 때 빼고는 매년 참가했죠. 캠프에서 하는 건 다 비슷해요. 밥 해 먹고, 레크리에이션 하고…. 제가 미니 콘서트 하고 캠프파이어 하는 것까지는 똑같은데, 그 뒤가 옛날이랑 조금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촛불 의식 하고, 분단별 대화를 했다면 지금은 ‘위하여’, ‘건배’죠(웃음).
꽤 익숙한 얼굴들이 많겠어요. 많죠. 매년 100명 정도가 캠프에 오는데, 이름을 다 알진 못해요. 가끔 이름을 아는 친한 팬들 앞에서도 머릿속이 하얘질 때가 있죠. 그래서 우리는 모이자마자 이름표를 목에 걸어요. 물론 저도 걸고요. 오래 세월 봐왔던 팬들이라 가족 같아요. 근데 신기한 건 해마다 신입들이 생겨요. 팬클럽이 있는지도 몰랐다가 인터넷 서핑하면서 우연히 발견하고 들어온 거죠. “저, 변진섭 오빠 정말 좋아했던 팬이었는데~” 하면서요.
소녀 팬들에 얽힌 일화도 많았을 텐데요. 지방에서 올라온 팬들이 집 앞에서 계속 기다릴 때가 참 난감했어요. 어머니께서 동네 여관이랑 계약을 해가지고 거기서 팬들을 재워주기도 했어요. 내일 꼭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받고 일일이 팬들 집에 전화도 해주셨죠. 제가 독산동에 살았는데, 바로 근처에 대림여중이 있었어요. 어느 날 교감선생님께서 집에 찾아오시더니 저 때문에 면학 분위기 조성이 안 된다고 이사를 가달라고 하신 적도 있어요. 저랑 어머니는 충분히 이해가 갔어요. 어쩌다 타이밍을 잘못 맞춰서 학생들 쉬는 시간에 나가면 난리가 나곤 했거든요. 그래서 결국 이사 갔어요. 재미있게 말하면 추방당한 거죠(웃음).
새해잖아요. 올해 계획이 있다면? 저는 항상 그런 질문 받을 때마다 “그런 게 없는 가수예요”라고 답해요(웃음). 되도록 일관성 있는 아티스트가 되자는 게 다짐이고요. 20, 30년 뒤에도 지금처럼 콘서트를 하는 게 제 인생 계획이에요.
계속 노래하는 모습 볼 수 있는 거죠? 그럴 것 같아요. ‘내가 계속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면서 20대 초반에 이 일을 시작했는데, 나이 50이 다 되도록 하고 있는 걸 보면 앞으로 죽을 때까지 하지 않을까요? 그때도 이런 인터뷰를 하면서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계속 음악만 하면서 살았네”라고 제 생을 되돌아보게 될 것 같아요.
■글 / 노도현 기자 ■사진 제공 / J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