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TN 김선영 앵커의 이유 있는 이야기
“뉴스를 진행할 땐 주로 중립적인 표정을 짓잖아요. 물론 일상에선 많이 웃지만, 카메라 렌즈를 보고 웃는 게 조금은 어색했던 것 같아요(웃음).”
대학 졸업반이던 2003년 겨울, 운 좋게 방송국에 발을 들인 이후 꼬박 12년을 앵커로 살았다. 입사 계기를 묻는 식상한 질문에 재미있는 답이 돌아왔다. 이야기는 할리우드 배우 키아누 리브스를 좋아하던 중학교 시절로 돌아간다.
“어느 날 방송에서 한국인 리포터가 그를 인터뷰하는 장면을 봤는데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어요. 마이크 들고 TV에 나오면 나도 저렇게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키아누 리브스를 만날 수 있을까, 생각했죠(웃음). 그때부터 큰 끌림이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여덟아홉 살 때 아동 모델을 한 적이 있어요. 워낙 어릴 때부터 방송 관련 일을 꿈꿔왔는데, 그 인터뷰를 통해 구체화된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 아나운서로 꿈을 굳혔고 대학에 가서는 그 길만 바라보고 준비했어요.”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아나운서가 된 이후 키아누 리브스를 실제로 만났다는 것. 중학생 소녀가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장면이 현실이 된 순간을 그녀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키아누 리브스가 영화 홍보 차 내한을 한 거예요. 별 기대 없이 현장에 갔는데, 몇몇 방송사에 공동 인터뷰를 할 기회가 주어졌어요. 물론 중학교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정말 좋아하던 분을 눈앞에서 만나니 소름 끼치게 기뻤죠. 그때 저는 느꼈어요. 마음속에 간절한 꿈의 이미지를 심어두면 어느 순간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요.”
이름 세 글자를 걸고
줄곧 여자 앵커가 단독으로 진행하는 뉴스를 꿈꿨다. 그 안에 사람의 향기를 넣고 싶은 소망도 있었다. 지난해 10월 YTN ‘김선영의 뉴스나이트’가 출범하면서 그녀의 꿈은 또다시 현실이 됐다. 매일 밤 10시부터 자정까지 이어지는 종합 뉴스 프로그램으로, 일주일에 한 번 명사들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공감 토크’ 코너도 진행한다.
“일단 여자가 혼자 진행한다는 것에 대한 경계심과 우려가 많아요. 괜히 시선이 더 쏠리기도 하고요.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여자여서’라는 얘기가 나올까 봐 조심스러워요. 여성 앵커 단독 진행도 괜찮은 방식이라는 걸 보여주는 게 제 과제예요. 아직은 시작 단계이지만요.”
이름 세 글자를 걸고 하는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대단한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진행이 확정됐을 땐 괜스레 기분이 좋고 어깨가 무겁기도 했지만, 4개월 차에 접어든 지금은 예전과 같은 안정감을 되찾았다.
“YTN은 보도 전문 채널이다 보니 앵커의 역할이 많아요. 직접 기사도 쓰고 큐시트에도 많이 관여하죠. 그렇다고 해서 제가 과한 욕심을 부리면 시청자들이 불편해할 것 같더라고요. ‘이름을 걸었다’, ‘여성의 뉴스다’라고 해서 확 달라져야 하기보다는 천천히 편안하게 변화해가고 싶어요.”
뉴스에서는 아직 연차 높은 남자 앵커와 젊은 여자 아나운서가 함께하는 것이 일반적. 남자인 후배 기자가 보조 앵커로 나선 그녀의 뉴스에서는 조금 색다른 장면이 연출된다.
“처음에는 후배에게 되게 미안했어요. 고정관념을 깨는 자리에 배치되는 게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미안해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고정관념이니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 시간에 일하는 탓에 애로 사항이 많다. 한 번 늘어지기 시작하면 하루 종일 늘어지기 때문에 되도록 오전과 낮 시간을 알차게 보내려고 노력한다. 피로감을 덜기 위해 오전에는 주로 필라테스나 산책을 한다. 오후 4시 30분쯤 회사에 도착하면 그날의 주요 뉴스부터 챙긴다. 5시 20분쯤 편집 회의에 들어가 PD와 함께 뉴스 제작 전반에 대해 논의한다. 저녁을 먹은 뒤엔 기사를 쓰고 분장을 시작한다. 큐시트의 앵커 멘트를 손보고 나면 ‘On Air’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 생각보다 빽빽한 일정이다.

YTN 김선영 앵커의 이유 있는 이야기
일주일에 한 번 진행되는 ‘공감 토크’는 그녀가 특별히 애정을 갖는 뉴스 속 코너다. 배우 문숙·강수연, 가수 신승훈·김준수, 시인 고은 등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자리를 빛냈다. 그중에서도 MC 송해 선생과 최현석 셰프와의 만남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송해 선생님은 인터뷰이 중 최고령이셨는데, 가장 겸손하시고 에너지가 넘치셨어요. 손녀뻘인 저의 서툰 인터뷰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해주셔서 가슴이 뭉클했죠. 최현석 셰프의 경우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장난기 가득한 인물로 비쳐지잖아요. 실제로 만나보니 자존감이 높고 요리에 관한 철학이 있는 분이었어요. 더 뜨고 싶냐고 물었더니 셰프들끼리 유머 대결하는 건 되게 우스운 일이라고, 요리로 진정한 승부를 봐야 한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죠. 어떤 분야에서든 꾸준히 한길을 걷는 사람들은 반짝반짝 빛이 나요. 소위 전문직보다 더 멋있는 전문직인 거죠.”
그녀를 말하는 단어, 앵커
소수라서 더욱 무거운 책임을 안고 있는 여성 앵커인데다 긴박함이 흐르는 순간순간을 홀로 견뎌내야 하니 늘 외롭고 힘들다. 하지만 이런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여 ‘앵커’라는 정체성을 확립하게 해줬다.
“다들 한 번씩 위기가 오잖아요. 힘들 땐 퇴근하는 차 안에서 운 적도 있어요. 그럴 때마다 마음을 가다듬고 카메라 앞에 선 ‘나’를 생각해봤어요. 이 일이 숙명이고 천직인 것 같더라고요. 지치고 힘들다가도 앵커 멘트를 시작하면 그 모습이 진짜 ‘나’인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기회라는 게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는 않잖아요. 항상 방송 시작하기 3초 전에 마음속으로 감사하다고 말해요.”
뉴스뿐만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으로 영역을 넓히는 아나운서들이 많은 요즘, 보도국에만 있는 것이 답답하진 않은지 궁금했다. 조심스레 끼를 발산하고 싶은 생각은 없을까?
“5, 6년 차 때 나도 오락 프로그램 나가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지금 이 나이에 와서 생각해보니 제가 그때 다른 활동도 했다면 지금의 정체성이 생겼을까 싶어요. 사실 앵커도 고도의 끼가 필요해요. CNN의 앤더슨 쿠퍼 같은 앵커들은 참 끼가 많잖아요. 시청자들에게 호소력이 있거든요. 저는 아직 그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그렇게 성장해가고자 해요. 또 ‘뉴스는 지루하다’라는 공식을 깨는 것이 목표예요. 뉴스는 재미있어야 하거든요. 우리 주변 일에 대해 수다 떨듯 이야기하는 뉴스를 만들고 싶어요.”
결혼 생각은 있지만 아직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는 그녀에게 멀리서 찾지 말고 주변을 둘러보라는 말을 건넸다. 동종 업계에서 상대를 찾는 건 서로 간의 ‘룰’이 아니라며 손사래를 친다.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5년 전부터 있었는데 인연이 안 나타나네요. 큰 산같이 듬직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저와 함께 세상을 넓고 높게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요.”
외롭긴 해도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줄 안다.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 또한 혼자 있는 것이다. 자기만의 시간을 잘 채울 수 있는 사람이 인생을 더 잘 살 수 있다는 나름의 결론에 도달하기도 했다.
“어차피 모두가 외롭고 고독한 거니까요. 예전에는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힘든 걸 날려버렸는데, 요즘에는 ‘나’를 더 많이 들여다보는 것 같아요. 좋아하는 음식을 만든다든지, 가보고 싶은 곳으로 훌쩍 드라이브를 떠난다든지, 개봉을 기다리던 영화를 보고 온다든지.”
사막에서 길 잃은 여행자들이 밤하늘의 북극성을 따라가듯, 그녀도 자신만의 북극성을 따른다. 스스로 정해놓은 이상향이자 삶의 이정표인 셈이다.
“제가 현실에서 하고 있는 방송과 북극성에서 하고 있는 방송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머릿속으로 제가 추구하는 앵커의 모습으로 방송을 해보죠. 지금은 뉴스 공급자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걸 시청자들에게 강요하는 경향이 커요. 현재보다 백배는 더 깊숙이 시청자의 눈으로 접근해 궁금증을 속 시원히 해결해주고, 뉴스 이상의 영감을 주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요.”
“앵커가 방송을 귀찮아하면 그것이 고스란히 렌즈로 투영된다.” 언젠가 그녀의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는 ‘에이, 그냥 예쁘게 나오면 되는 거지’라며 흘려들었지만 지금은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앵커가 사랑받는 이유는 이목구비가 예뻐서도, 목소리가 좋아서도 아니다. 성의와 진심이 통해서라는 걸 깨달은 지 오래다. 오늘 밤, 뉴스 스튜디오에 온에어를 알리는 빨간 불이 들어오기 전까지 그녀는 여느 때처럼 바쁘게 움직일 것이다.
■글 / 노도현 기자 ■사진&리터칭 / h.gio, 김도훈(쟈뎅 드 라망, 02-3445-2927) ■스타일리스트 / 박남일, 천다이(어시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