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로미오앤줄리엣’ 이후 한동안 중앙 무대에서 모습을 볼 수 없었던 박소연이 창작 뮤지컬 ‘투란도트’로 오랜만에 관객들 곁으로 돌아왔다. ‘투란도트’는 박소연에게 의미가 큰 작품이다. 2011년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을 통해 초연부터 함께해온 작품인 동시에 무려 7년 만에 서울 대극장 무대 복귀작이기도 하다. 차세대 뮤지컬 디바로 주목받던 그녀가 긴 공백기를 가지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로미오앤줄리엣’을 통해 만난 뮤지컬 배우 임태경과의 결혼이 8개월 만에 종지부를 찍게 된 것. 운명처럼 찾아온 사랑은 무척이나 짧은 시간에 막을 내렸고 전도유망하던 뮤지컬배우 박소연의 삶에도 먹구름이 드리웠다. 상처가 치유되는 시간이 사랑했던 시간과 반드시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이별의 아픔은 그녀에게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치유해야 할 상처였고 다시 무대로 돌아오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박소연은 더욱 깊고 단단해져 있었다. 여태껏 많은 ‘투란도트’를 연기해온 그녀이지만 이번만큼 강렬하게 표현해낸 적은 없었던 듯하다. 증오로 똘똘 뭉친 차가운 복수의 여왕 ‘투란도트’. 그녀는 격정의 ‘투란도트’를 완벽하게 연기해냈고 “역시 박소연”이라는 찬사를 이끌어냈다.
오랜 어둠을 지나 비로소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그녀와의 인터뷰는 놀라우면서도 유쾌했다. 일반적인 경우보다 매우, 뛰어나게, 특별히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했을 때 으레 그렇듯, 가까이서 듣는 박소연의 목소리는 무대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이토록 아름답고 비현실적인 “기자님, 주차장을 못 찾겠어요”라니. 한동안 이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뮤지컬 팬으로서 억울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3개월 동안 격정의 ‘투란도트’를 연기하는 동안, 곧 막을 올리는 뮤지컬 ‘파리넬리’ 준비로 연습에 매진하는 동안, 봄이 오고 꽃이 폈다. 이제 다시 시작이라고, 어떤 무대라도 오르고 싶다고 말하는 그녀. 길고 긴 인터미션을 끝내고 마침내 인생 2막의 커튼을 연 박소연이 여기 있다.
오랜만에 대극장 무대로 돌아온 소감이 어때요? 감회가 남다를 것 같아요. 설렘 반 긴장 반이었어요. 그동안 몇몇 무대에 오른 적이 있지만 이렇게 대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난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투란도트’는 여러모로 저와 인연이 깊은 작품이에요. 뜻깊은 작품으로 돌아오게 돼 무척 기쁘죠.
2011년 대구 초연 때부터 출연한 작품이라 그런지 ‘투란도트’ 하면 ‘박소연’이 떠올라요. 오래 해서 그래요(웃음). 그만큼 본전 찾기가 힘들어요. 이런 경우 중간 이상만 해도 욕을 안 듣는데 중간을 하면 욕을 먹더라고요. 솔직히 긴장과 부담감도 컸어요. ‘투란도트’는 창작 뮤지컬임에도 초연부터 전석이 매진될 정도로 호평을 받은 작품이에요. 매회 관객들의 피드백을 적극 반영해 업그레이드가 돼왔고요. 그래서인지 작품과 함께 성장했다는 느낌이 있어요.
처음 ‘투란도트’ 역을 맡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전까지 박소연 하면 여성스럽고 지고지순한 이미지가 컸거든요. 저주의 칼날을 갈고 있는 마녀 ‘투란도트’를 어떻게 소화할까 궁금하기도 했고요. 제 목소리가 서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편이라 과연 이 센 걸 할 수 있을까 염려하시는 분들도 많았어요. 우선은 대구에서 제작하는 작품이라는 게 가장 컸어요. 제 고향이 대구거든요. 도전해볼 만한 창작 뮤지컬이라는 것도 의미가 있었죠. 사실 처음 추구했던 ‘투란도트’는 차갑고 냉철한 이미지였어요. 근데 작품에 음악 편성이 크다 보니 목소리도 같이 커지더라고요. 그렇게 앙칼지고 무시무시한 ‘투란도트’가 탄생했죠(웃음). 지금은 악기 편성도 많이 빠지고 어느 정도 밸런스를 많이 맞추게 됐어요.
처음보다 톤이 다운됐다고 하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강도 높은 발성과 극단적인 감정을 이어가요. 여간한 체력과 내공이 아니면 소화하기 힘든 캐릭터인데 괜찮을까 싶더라고요. 아마 처음 뮤지컬을 하는 친구들이 저처럼 소리를 지르면 목이 많이 상할 거예요. 매회 배우의 컨디션이 베스트일 수는 없기 때문에 적절한 체력 안배가 필요한데 이제 어느 정도 요령이 생긴 것 같아요. ‘내가 여기서 더하면 내일 공연을 못할 것 같다’라는 느낌이 와요. ‘앞으로 두 시간을 더 불러야 되는데 그럼 여기서 힘 조절을 해야 하는구나’라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게 되는 거죠. 공부로 아는 것은 아니고 겪으면서 체득되는 것 같아요. 오래 했기 때문에 노하우가 생긴 게 아닌가 싶어요.
혹시 ‘투란도트’와 비슷한 부분이 있어요? 저는 화내는 거, 무서운 거 정말 싫어해요(웃음). 그래서 공연이 끝나고 나면 기운이 다 빠져요. 극도의 감정을 2시간 이상을 끌고 가다 보니 감정적 탈진 상태가 되는 거예요. 보약 먹으면서 했어요. 안 먹고는 못하겠더라고요. ‘투란도트’는 정말 제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제 인생에 중요한 작품이에요. 배우로서, 한 사람으로서 많이 성장했고 성숙하게 한 무척 고마운 작품이죠.
스스로에게 허락한 치유의 시간
실제 성격은 어때요? 여린 부분도 있는데 강하게 살려고 노력해요. 여리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사람은 누구나 그런 부분이 있잖아요. 그나마 장점은, 밝아요. 긍정적이고요. 3남매 중 둘째라 나름 생존력이 강해요(웃음).
공백기 동안 무대에 대한 갈증은 없었나요? 사람이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조급해하지는 않았어요. 때가 되니 닿게 되더라고요. 작년부터 작은 소극장 공연을 시작으로 다시 무대에 서게 됐어요.
중앙 무대로 돌아오기까지 7년이 걸렸어요. 짧은 결혼생활에 비하자면 긴 시간이에요. 그게 상처의 크기가 아닐까 싶어요.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기간은 사람마다 체력과 상태에 따라 다르잖아요. 제가 약한 사람이었던 것도 있었고. 그러다 보니 회복 기간이 오래 걸린 게 사실이에요. 지금도 결코 그 일이 가벼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에게는 필요한 시간이었고, 충분히 아파했고 극복했다고 생각해요.
다시 돌아오기로 마음먹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저는 제가 하는 모든 일을 혼자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주변의 조력자들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요즘 정말 절실히 느끼고 있어요. 제가 크리스천인데 주변에서 격려를 많이 해주셨어요. 재능을 쓰지 않고 묻어두는 건 옳은 일이 아니라고요. 그러던 중에 ‘세상을 바꾸는 15분의 시간’이라는 강연 프로그램에 나가게 됐어요. 직접 관객들 앞에서 내 입으로 아픔을 털고 다시 일어서자, 라고 마음먹었죠.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요. 그렇게 떨릴 수가 없더라고요. 보통 강의를 하면 지식 뒤에 숨을 수 있어요. 발성을 가르친다면 발성법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하면 되는데 이건 처음부터 끝까지 제 이야기를, 그것도 내가 겪었던 일 중 가장 아팠던 걸 꺼내야 하는 상황이니 발가벗겨진 기분이더라고요. 몇 천 명 앞에서 노래하면서도 그렇게 떨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오죽하면 “너무 떨리네요”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홀가분해 보여요. 이제 앞만 보고 가려고요. 올해 대구 KBS 신년 음악회에서 오프닝 곡으로 뮤지컬 ‘엘리자벳’의 ‘나는 나만의 것’을 불렀어요. 그 노래처럼 이제 다시 제 인생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밝게 살아가고 있어요.
배우들에게 인생의 굴곡은 더 좋은 배우로 성장하는 과정이 되기도 하죠. 한창 힘들 때 한 선배가 저에게 “배우니까 괜찮아”라고 하셨던 적이 있어요. 사실 전 그때 배우를 그만두려고 했었거든요.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넌 배우니까, 괜찮을 수 있는 이유가 정확한 사람이야”라는 말이 그땐 잘 와 닿지 않았어요. 내가 너무 아프다 보니 어떤 위로의 말도 겉치레로 들렸죠. 근데 지나고 나니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아요. 만약 20대 때 이 역할을 했다면 이만큼 푹 빠져들지 못했을 거예요.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뭔가요? SNS을 시작했어요. 요즘 소통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어요. ‘세바시’ 강연이 끝나고 놀랐던 것이 생각보다 저와 같은 상처를 가지신 분들이 많더라고요. 사랑 때문에, 사람 때문에 힘겨워하는 분들이 저를 보고 힘을 얻었다는 이메일을 많이 받았어요. 그중에 직접 만난 친구도 있어요. 저도 겪어봤던지라 힘든 마음을 잘 알겠더라고요. 안타깝고 가슴이 아팠어요.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해줬나요? 이제 와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내가 그렇게까지 힘들 건 없었는데’ 하는 후회와 아쉬움이 있어요. 같이 밥을 먹으며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고, 남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중요한 거라고, 힘내라는 말을 해줬어요. 제가 그분들을 통해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었듯이 저도 그분들에게 힘이 돼주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힘든 일이 없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인연이네요. 그럼요.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는 그 안의 상처를 알 수 없잖아요. 어찌 보면 전 아픈 사람이었는데, 한때 힘들었던 사람이었다는 게 누군가 저에게 기대올 수 있는 공간이 되더라고요.
다시 부르는 나만의 인생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그전에 저는 성취만을 위해서 달려왔어요. 내가 잘해서 더 많은 관객들 앞에서 노래하고 더 큰 작품을 하고 이런 것만 생각하고 달려왔다면, 지금은 저를 구해준 것도 다시 노래하게 한 힘도 관객과 팬들이었다는 생각을 해요. 이게 정말 남다르더라고요. 정말 보잘것없더라도 목소리를 통해 누군가에게 위로와 따뜻함을 줄 힘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노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2005년 데뷔 후 꽉 채운 10년 차 배우가 됐어요. 돌아보면 어때요?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만 정말 빨리 지나가기도 했어요. 앞으로 남은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무대에 오르고 싶어요. 요즘 쉬지 않고 달리고 싶은 욕구가 샘솟아요. 이제 소처럼 일해야죠.
새롭게 맡은 역이 ‘파리넬리’의 남장 카스트라토인 안젤로 역이에요. 공주 전문인데 할 수 있겠어요? 진짜, 제가 안 그래요(웃음). 목소리가 곱상해서 그동안 ‘투란도트’를 제외하곤 강렬하거나 섹시한 캐릭터를 못했어요. 그래서 이번 역할이 정말 새로워요. 변신이기도 하고요. 그동안 꽁꽁 싸매고 있던 모습, 박소연 안의 남자를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이 공연을 통해 얻고 싶은 건 여성 팬들입니다(웃음).
배우로서, 한 사람으로서 인생 2막이 시작됐어요. 앞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박소연의 인생은 어떤 이야기가 될까요? 배우로서 무대에 오를 수 있다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기쁨이에요. 그런 기쁨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고, 한 인간으로서의 삶의 기쁨들도 새록새록 생겨났으면 좋겠어요. 마음이 됐든 노래가 됐든 끊임없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새로운 사랑도? 준비를 단단히 하고(웃음).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김태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