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17세 소녀, 보아.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을 나이에 그녀는 세계를 거머쥐었다. ‘노래하는 1인 기업’이라고 불릴 만큼 벌어들이는 수입을 가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성공했지만, 그녀의 성공 뒤에는 어린 나이에 그녀 혼자 감당해야 했을 땀과 눈물이 있다.

지난 98년, 다섯 살 차이가 나는 둘째 오빠를 따라 SM 오디션장을 갔다가 캐스팅된 보아. 당시 국내가 아니라 세계 시장에 내놓을 작정으로 전국적으로 인물 찾기에 나선 SM이 오디션을 보러온 학생들에게 일일이 동생이 있는지의 여부를 물었다. 3년여의 트레이닝 기간을 거쳐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어 내겠다는 계획이기도 했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15세 전후반의 어린 나이의 소녀들이 인기를 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뒤에 앉아 작은 오빠의 오디션을 지켜보던 보아는 기획사 직원에게 갑자기 불려나와 노래와 춤을 추게 됐고 SM에서는 이 작은 꼬마의 끼를 놓치지 않았다.(사실 그녀는 당시 한창 유행하고 있던 SES, 핑클 등의 댄스 음악을 좋아해 평소에 즐겨 불렀었고, 오락시간엔 이것을 장기로 드러내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예기치 못한 캐스팅 소식을 접한 그녀의 부모님은 그리 반기지 않았다. 아니, 결사적으로 반대를 했다. 전교 1등으로 중학교 입학했을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기에 그녀에게 거는 부모님의 기대는 컸고, 그 기대는 가수로서의 성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인의 완강한 뜻을 꺾지는 못했고, 그렇게 그녀는 험난한 트레이닝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기초가 없었다. 보통 아이들 이상으로 노래하고 춤을 추기는 했지만 그건 그저 원초적인 그녀의 끼에 불과했다. 그래서 학교 수업이 있는 날은 5시간, 수업이 없는 날은 10시간씩 춤의 기본 동작과 발성법을 갈고 닦았다. 그리고 1년 후인 99년 여름에 도쿄로 건너가 6개월 가량 연예인 양성 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수업을 받았다. 그녀에서 처음 주어진 과제는 바로 외국어.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외국어가 필수였기에 그녀는 이것을 집중적으로 교육 받았다.
그 해 일본에 머무는 동안 NHK의 아나운서인 구미코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발음교정을 받았고, 일본어 외에는 의사소통을 할 수 없게끔 환경을 만들어 놓은 덕에 그녀는 하루가 다르게 일본어를 습득할 수 있었다.(물론 그 후에도 틈이 날 때면 NHK를 틀어 놓고 언어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쓴 덕에 지금은 네이티브 스피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도쿄 FM 라디오 ‘비트 잇 보아스 월드’라는 프로그램을 일어로 진행했을 정도로 유창하게 일어를 구사하고 있다.)

2000년 8월 27일, 보아가 드디어 공개됐다. 데뷔 전부터 SM에서 거물급 신인을 키우고 있고, 그 아이의 이름이 ‘보아’라는 것 외에 거의 알려진 것 없이 비밀리에 준비하고 있던 그녀가 SBS ‘인기가요’를 통해 데뷔 무대를 가진 것이다. 자그마한 체구로 파워풀한 춤을 소화해내며 제목도 특이한 데뷔곡 ‘ID: Peace B’를 부르는 보아의 모습은 14살이라는 나이가 도저히 오버랩 되기 힘들 정도로 성숙해 보였다.
데뷔 당시 그녀를 주목할 수밖에 없던 조건들은 너무나 많았다.
최연소의 나이, 능통한 외국어 실력, 춤과 함께 소화해내는 라이브 무대, 국내에서 내로라 하는 최고의 뮤지션들의 참여, 그리고 마이더스의 손인 기획사 SM… 그래서인지 그녀는 ‘지에닉 화이트 C’ ‘신비로 샤크’ ‘초코틴틴’ 등 동시에 3개의 CF의 모델로 발탁이 됐고, 가요프로그램에서 1위 후보에 오르고 연말에는 평생 단 한번 탈 수 있다는 신인상까지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그러나 솔직히 데뷔 전 그녀에게 걸었던, 가요계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킬 거라는 모두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보아’라는 이름을 알리긴 했지만 깊게 뿌리 박진 못한 것이다. 하지만 어디 첫 술에 배부르랴. 그녀는 이것에 더욱 자극을 받아 이듬해 3월 일본으로 진출한다.
타국 땅 일본에서의 성공, 금의환향하다
2001년 3월, 보아는 일본에서 단독 쇼케이스를 여는 것과 동시에 일본 ‘기린음료’의 모델로 발탁되어 일본 진출의 순항 조짐을 보인다. 그리고 그 후 1년 동안 그녀는 과히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에서 발표한 첫 싱글 앨범 ‘ID: Peace B’가 일본 오리콘 차트에서 17위를 차지하는 걸 시작으로, 두 번째 싱글 앨범 ‘Amazing Kiss’는 16위를, 세 번째 싱글 앨범 ‘키모치와 츠타와루’는 11위, 미국 테러 추모 앨범으로 일본의 여가수 코오다 쿠미와 함께한 듀엣 앨범 ‘The Meaning of Peace’는 7위를 차지한다.
그리고 네 번째 싱글 앨범 ‘Listen to my heart’가 오리콘 차트에서 3위를 차지하면서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 1면에 대서특필되는 영광을 안았다. 외국에서, 그것도 1면 톱기사로 다뤄졌다는 소식은 국내 팬들을 놀라게 하고도 남음이었고 더불어 이것은 그녀의 위상 또한 드높이는 계기가 됐다. 또한 그 한 달 후엔 일본 정규 첫 번째 앨범인 ‘Listen to my heart’가 오리콘 차트에서 드디어 1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이 뒤따랐다.
명실 공히 일본 최고의 가수로 인정받은 그녀는 꼬박 1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2집 앨범 ‘NO.1’을 발표했다. 그리고는 1집의 부진을 보란듯이 씻어내고 각종 가요 프로그램에서 줄줄이 1위를 차지하며 국내에서도 자신의 입지를 단단히 굳힌다. 2002년 6월 2일자 프랑스 르몽드지에서는 ‘보아의 성공은 일본과 한국의 기성세대가 갖고 있던 증오심을 잘 모르는 일본과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며 그녀를 한일문화 교류의 핵심적인 인물로 내세웠고, 아니나 다를까 그 해 겨울, 그녀는 일본 관광청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등 그 몫을 톡톡히 해냈다.
일본에서 그녀가 얼마나 놀랄만한 성과를 거두었는지, 그녀의 인지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일일이 열거하려면 지면 부족을 탓해야 할 테니 대표적인 몇 가지 사례만 간략히 열거하고자 한다.

둘. 지난 3월 일본 골든 디스크 대상에서 본상을 수상했다. 일본에서 발표한 2장의 정규 앨범이 각각 100만장을 넘었고, 그밖에 싱글 앨범들도 훌륭한 성과를 거둔 것을 감안, 그녀에게 ‘Rock&Pop album of the Year’를 수상한 것. 그도 그럴 것이 두 번째 앨범 ‘VALENTI’가 발매 당일 오리콘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해 모두를 주목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이것은 당대 최고의 그룹 글레이의 베스트 앨범과 맞붙어 1위를 차지했다는 데 그 의미가 더욱 크다 하겠다.
셋. 지금 일본 TV에선 동시에 그녀의 CF가 여기저기에서 방영되고 있다. ‘혼다’, ‘스케쳐스’, ‘칼피스’ CF가 그 것. ‘스케쳐스’는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모델로 활동하면서 세계적으로 10대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운동화 브랜드. 4회 지면 광고 촬영에 3억 5천만 원을 받으며,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제치고 일본과 아시아 지역의 모델로 발탁된 것이다. 또한 일본 음료인 ‘칼피스’의 광고 발표회장에는 현지 언론매체의 기자들이 150여 명 대거 몰려 그녀에 대한 인기를 실감케 했다.
넷. 일본 가수들이 1년여를 준비해 출연한다는 NHK의 권위 있는 프로그램 ‘홍백가합전’에 출연했다. 지난 연말 그녀는 이 프로그램에 최연소, 유일한 외국인 가수로 참여하는 영광을 누렸다. 출연 그 자체만으로 그녀의 인기는 입증된 셈이나 진배없다.
5개월간 5백억원 매출 올린 노래하는 1인 기업!
그렇다면 과연 보아의 성공 요인은 무엇인가? 우선 철저한 준비를 거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출발한 데서 그 원인을 찾아볼 있다. 3년여의 트레이닝을 거쳐 해외 시장에서도 부끄럽지 않을 외국어 실력을 갖추었고, 격렬한 댄스와 라이브 노래를 동시에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솔로 여가수들 중에는 이런 가수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녀의 작은 체구 또한 단단히 한몫을 했다. 우리나라는 외모가 ‘쭉쭉빵빵한’ 여가수들을 선호하기 때문에 한국 시장만을 놓고 볼 때 그녀의 키는 플러스 요인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다르다. 일본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여가수들은 대부분 160cm를 넘지 않는다. 일본 대중들이 자그마한 체구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컴플렉스로 느끼던 그녀의 신장은 오히려 역으로 작용했다. 여기에 치밀한 계산이 그녀의 성공을 보장했다. 아무로 나미에, 우타다 히카루, 하마자키 아유미 등 현재 일본에서 손꼽히는 여가수들이 배출되기 전이었던 2001년에 그녀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간 것이다. 톱스타 감을 애타게 찾고 있던 일본 현지 상황과 그녀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총력을 기울였던 일본 소속사 AVEX가 지금의 보아를 있게 했다.
어느 시사 프로그램에서 ‘보아의 경제적 가치는 과연 얼마인가’라는 주제로 삼성 경제연구소, 보아의 일본 소속사 AVEX, ‘산케이 신문’ 기자, 일본 음악 PD 등에게 자문을 얻어 보아의 몸값을 추정했다. 그 결과 나온 수치는 무려 1조원. 사실 그녀는 지난해 5개월 동안 한국과 일본에서 5백억원이라는 매출을 세웠다. 이는 일본에서만 300만장이 넘는 음반 판매량을 기본으로 CF, 콘서트, 그밖에 핸드폰 벨소리, 보아 티셔츠 등의 관련 부수입 등을 통 털어 계산한 액수. 일본에 진출한 이후 그녀가 벌어들인 외화만도 1000억원이 넘는다.
과히 ‘걸어 다니는 1인 기업’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도 한데 막상 보아는 만나는 사람마다 그녀를 돈으로 보는 것이 너무 싫다 불평이다. 그만큼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삶을 완전히 포기하면서 정신 없이 활동했고, 그만큼 피땀 어린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런 모든 것들은 가려진 채 돈에만 초점이 맞춰진 탓이다. 그녀는 그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고 거기에 그 댓가가 따른 것일 뿐이라고. 그리고 청담동에 집 한 채 마련한 정도일 뿐이라며 새초롬한 표정을 짓는다.
보아는 지난 해 국내 연말 시상식에서 대상을 휩쓸어 버렸다. 이제 그녀는 누가 뭐래도 최고의 위치에 자리해 있다. 덕분에 한일 양국은 물론 미국, 중국 등 세계 각지를 다녀야 하는 형편이라 갈수록 비행기에서 지내는 시간은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는 매니저를 동반하지 않고 혼자 비행기를 타고 이동할 때도 있다고 하니 이제 그녀에게 비행기는 거의 대중교통인 셈이 돼버렸을 정도이다.
“평범한 학생시절이 그리울 때가 참 많아요. 친구들과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볶이, 김밥을 사먹으며 놀았던 기억들이 이제는 먼 옛날같이 느껴져요.”
그녀를 노래하는 ‘보아’가 아닌 17살 소녀 ‘권보아’로 보면 이처럼 애처로울 수가 없다. 잘 생긴 연예인을 보며 가슴 설레여 하고, 시간이 주어진다면 친구들과 지방으로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하는 그녀를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가 위로하듯 그녀는 지금 제일 하고 싶은 일, 제일 잘 하는 일,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하고 있기에 더 이상의 투정은 부리지 않는다. 지금은 그저 국내에서 발매한 세 번째 앨범 ‘아틀란티스 소녀’의 활동에 주력하며 앞으로, 저 앞으로 달려 나가는 일에만 전념할 것이다.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많이 우울한 우리 사회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고 싶어 희망찬 메시지를 담았다는 그녀의 이번 노래처럼 그녀는 앞으로도 우리에게 ‘희망’의 의미로 다가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글 / 김미선 사진 / SM 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