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은색 세미 정장에 긴 가죽 부츠를 신고 나온 배인순은 30분 전에 도착해 방청석에 앉았다. 다른 재판을 지켜보다 순서가 되자 변호사의 지시에 따라 증인석에 섰다. 이날 법정에 출두한 배씨는 법정에서 “추가로 할 말이 있습니까”라는 재판부의 질문에 머뭇거리며 미소를 짓기도 했다. 재판부는 “여기서 말하기 곤란하면 서면으로 제출해도 괜찮습니다”라고 했으며, 이에 배씨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며 짧게 대답했다. 배씨가 별다른 추가 진술을 하지 않아 새로운 증언이 나오지 않은 채 1분 만에 끝났다.
재판이 끝나자 법정에서 나오는 배씨를 기다리기 위해 수많은 취재진이 모여들었다. 검은색 모자를 깊게 눌러 쓴 배씨는 도망치듯 법정을 빠져 나왔다. 소감을 묻는 취재진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이렇게 모일 줄 몰랐습니다. 뭔가 새로운 사실을 알려드려야 하는데 죄송합니다”라고 전했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대처할지 묻는 질문에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날 재판은 지난달 19일 열린 1차 공판에서 이 소설을 놓고 최 전 회장측 변호인과 배씨측 변호인이 픽션과 논픽션 논쟁을 벌였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배씨만이 책의 진실을 알 수 있다며 이날 배씨를 증인으로 출석토록 했다.
최 전 회장 변호인측은 서면을 통해 “소설이라는 단어 하나로 회피하려 합니다. 배씨가 낸 책 내용에 대해 모든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황당한 섹스 장면 묘사는 완벽한 인신공격입니다. 여러 명의 여자 연예인들이 집으로 직접 찾아왔었다면 집에서 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소문이 났을 것입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으면서 참고 지낼 아내가 몇이나 되겠습니까”라며 반박했다.
이날 재판부는 양측 변호인들에게서 추가로 제출할 자료가 없다는 말을 듣고 조만간 이 책의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 들일지에 대한 최종 판결을 내릴 것으로 보인다.
배씨 법정 출두 하루 전날인 1월 8일, 최 전 회장은 법정 구속됐다. 서울고법 형사3부(재판장 신영철)는 배임 및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기소된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에 대한 항소심에서 특가법상 배임 혐의에 대해 징역 2년 6개월, 분식회계 혐의에 대해 징역 6개월을 각각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최씨가 계열사에 수백억원을 지원한 사실을 몰랐다는 주장은 말이 안 되고, 수천억원대 분식회계도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인정된다”고 밝혔다. 최 전 회장의 구속에 대해 배씨는 “할 말이 없습니다”로 일관했다.
글 / 강수정(객원기자) 사진 / 이건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