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동네방네 떠들었는데 살려줘요 잉~"

배장수기자의 카메오 일기

(2)"동네방네 떠들었는데 살려줘요 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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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원은 ‘주유소 습격사건’에 폭주족으로 출연, 3일 동안 촬영했지만 영화에는 헬멧을 쓴 눈만 나왔다. 단역의 경우 이처럼 편집 과정에서 출연한 장면이 가위질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개인적으로 편집의 쓴 맛을 본 첫 경우에 해당된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에선 모두 잘렸다가 최소한의 장면이 가까스로 복원됐다. ‘남남북녀’에서도 두 컷(Cut)만 살아남았다. 단역의 생사는 출연 장면이 많고 적음이 아니라 편집에 좌우된다.

‘외다수’. 무명배우는 물론 스타들 역시 데뷔 초에는 엔드 크레디트(End Credit)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외(外) 다수(多數)에 속하고는 했다. 예명이 ‘외다수’라고 소개한 이도 없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한석규의 첫 배역은 대사가 없는 ‘가마꾼1’이었다. 송강호는 대사가 한 마디인 주인공의 친구로 출연했다. 이는 화면에 등장이라도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동네방네 자랑했는데 출연한 장면이 편집 과정에서 잘려 식구들에게 무안했다는 일화는 숱한 배우들이 겪은 일반적인 경험의 하나에 속한다.

39번째 출연작인 ‘태극기 휘날리며’(감독 강제규)는 이와 같은 ‘첫경험’을 하게 된 영화다. 진태(장동건)와 진석(원빈) 형제의 엄마가 하는 국수집에 온 손님으로 출연했는데 최종 편집에서 잘리고 만 것이다. 지난해 말 공교롭게 잇따른 연세대·이화여대·중앙대 신문방송학과 특강에서도 ‘태극기 휘날리며’에 국수집 손님으로 출연했다고 자랑했는데 수강생을 비롯해 주위 여러 사람에게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한 셈이 되고 말았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강제규 감독이 처음에 제안했던 인물은 북한군 고위 장교였다. 촬영은 경남 합천에 마련된 평양 시가지 세트에서 진행되고 국군의 사격으로 장렬하게 전사하는 인물이라는 게 강 감독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태풍 ‘매미’로 시가지 세트가 무너지면서 촬영이 지연됐고 이후 연출부로부터 국수집 손님으로 캐스팅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장교는 최민식이 맡았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혼잣말로 “잘려도 상관없는 장면 아냐?”라고 중얼거렸는데 그것이 실제상황이 되고 말았다.

아무튼 다소 찝찔했지만 부천 세트장에서 촬영할 당시에는 즐거웠다. 강 감독은 촬영에 앞서 대낮부터 술에 취한 인물이라고 설명해 주면서 대사를 경상도 사투리로 하든, 표준말로 하든 편한 대로 하라고 배려해 주었다. 엄마를 돕는 진석에게 “니, 내 알겄나?”라고 으스대고, 그의 엄마에게 “형수님예~ 점점 이뻐지네예~”라고 농을 거는 등 대사도 서너 마디 늘려주었다. 진석이 옆에, 진태와 영신(이은주)이 뒤에 위치해 잘릴 거라는 생각은 까맣게 잊은 채 그들과 제작진에게 연기력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일념에 다소 오버를 하면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송두리째 거세되고 말았다. 영화 초반, 전쟁이 터지기 전 주민들의 평온한 일상을, 진태·진석 형제의 단란한 가계를 보여주는 장면의 하나인데 러닝타임(2시간 20분)에 쫓겨 삭제된 것이다. 강 감독이 “DVD에는 복원될 것”이라고 말한 만큼 이 장면은 훗날 볼 수 있을 듯하다.

사실 카메오나 단역의 경우 편집과정에서 잘리는 경우는 적지 않다. ‘주유소 습격사건’(감독 김상진)의 차승원, ‘유령’(감독 민병천)의 정은표, ‘베사메무쵸’(감독 전윤수)의 최일화가 겪은 에피소드가 그 일례이다.

차승원은 ‘주유소 습격사건’에 극중 주유소 부근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폭주족으로 출연했다. 촬영기간은 3일. 그런데 완성된 영화에서 그는 눈만 조금 보인다. 두 눈을 부릅뜨고 보지 않으면, 아니 부릅뜨고 봐도 폭주족이 차승원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편집에서 많은 장면이 잘리는 바람에 그가 ‘주유소 습격사건’에 출연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관계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유령’에서 정은표는 잠수함 내 조리장으로 나왔다. 촬영에 앞서 그는 민 감독으로부터 조리장보다 출연 장면이 더 많은 인물을 제의받았다. 정은표는 적잖이 욕심이 났지만 그 인물은 부함장(최민수) 찬석(정우성) 등 주인공과 크게 관련이 없지만 개성은 있는 주변인이었다. 그럼에도 편집할 때 러닝타임에 쫓기다 보면 통째로 빼도 무방해 보였다. 정은표는 민 감독의 제의를 고사했고,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모든 장면이 살았다면 조리장보다 더 눈길을 끌만한 배역이었지만 정은표의 분석대로 그 인물은 모두 삭제됐다.

1973년 8월에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을 그린 일본영화 ‘KT’(감독 사카모토 준지)에 김대중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로 출연한 연극배우 최일화는 ‘베사메무쵸’에 철수(전광렬)의 돈을 떼먹고 도망간 친구로 나왔다. 그는 극중 말미에 철수에게 “미안하다”며 “나중에 네 돈은 꼭 갚도록 하겠다”고 울먹이고 철수는 그런 그에게 차비를 쥐어준다. 그러나 이 장면은 모두 잘리고 말았다.

요즘은 다소 느슨해 졌지만 예전에는 출연작을 나름대로 엄격하게 정했다. 직업 등 개성이 있는 인물이냐, 주인공과 맞물리느냐는 점 등을 고려했다. 출연을 하는 데에는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만 충족되어도 꺼렸다. 단역의 경우 두 가지가 모두 충족되지 않으면 훗날 편집을 할 때 러닝타임이 예상보다 길어지면 우선순위로 잘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노하우는 1998년작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감독 이은)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93년 ‘참견은 노 사랑은 오 예’(감독 김유진)로 데뷔한 지 5년 만에 알게 된 사항이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에는 현주(고소영)를 캐스팅한 드라마 PD로 출연했다. 서울 반포대교 아래에서 극중 드라마의 야외 장면을 찍고 현주의 매니저(명계남)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연기했다.

그런데 순서 편집을 했을 때 러닝타임이 예상보다 훨씬 길게 나왔다. 이 감독은 부득불 남녀 주인공 위주로 편집하면서 이 장면을 모두 잘렸다. 그러자 문제가 발생했다. 대학생 현주가 탤런트가, 스타가 되었다는 과정과 이에 따른 설명이 부족한 것이다. 이 감독은 결국 드라마 촬영 장면은 최소한으로 추가했다. 원래 촬영한 장면은 1분이 넘었는데 20초 정도가 되살아 날 수 있었다.

‘두사부일체’(감독 윤제균)의 경우 촬영 하루 전 날 연락을 받았다. 펑크를 메우는 일명 ‘땜빵’으로 여겨졌다. 배역은 담배를 사러 온 교복 차림인 두식(정준호)에게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 운운하며 뒤통수를 때려 내쫓는 구멍가게 주인이었다. 하나의 에피소드로 장면 자체가 송두리째 잘릴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두식이 반 친구들에게 맞고 담배를 사오라고 강요받는 모습과 연결되는 장면이어서 편집과정에서 잘릴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다. 촬영은 수원의 한 고등학교에서 했고, 예상대로 이 장면은 잘리지 않았다.

지난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출연한 ‘남남북녀’(감독 정초신)는 경우가 좀 특이하다. 남한 대학생 철수(조인성)와 북한 여대생 영희(김사랑)의 결혼을 승낙하는 김 위원장 역은 대사가 한 마디도 없었지만 경쟁이 치열했다. 이 영화 제작자이자 CF모델·연극배우인 주종휘 아시아라인 대표도 탐을 냈었다. 그런가 하면 “영화광인 김 위원장이 반드시 볼 것”이며 “김 위원장의 기분에 따라 북한에서 남파된 비밀요원에게 요주의 인물로 찍힌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촬영은 세종대학에서 했다. 북한에서 열리는 학술대회 장면에는 300여명의 보조출연자(엑스트라)가 동원됐다. 분장을 마치고 촬영장으로 나가자 여기저기에서 “똑같다”는 말들이 나돌았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여성들도 적지 않았다.

철수는 이 학술대회장에서 영희에게 감동적으로 프로포즈, 김 위원장에게 결혼 승낙을 받는다.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무척 중요한 장면인 만큼 잘릴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 장면은 최종 편집에서 김 위원장의 표정 두 컷만 남고 철수의 학술발표 내용을 경청하고, 박수로 결혼을 승낙하는 모습 등이 모두 잘렸다. 이는 촬영된 영상에 문제가 있어서도, 러닝타임 때문도 아니었다. 개봉을 앞두고 열린 몇 차례의 일반인 대상 시사회에서 많은 관객들이 김 위원장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부득불 가위질을 해야 했다. 콧등이 시큰해질 정도로 감동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웃기 때문이었다. 오호 통재라.

profile

배장수. 경향신문 전문위원. 영화담당 15년에 최근작 ‘하류인생’까지 40편에 카메오로 출연했다. 대표작으로 ‘마누라 죽이기’ ‘태백산맥’ ‘은행나무침대’ ‘박하사탕’ ‘엽기적인 그녀’ ‘취화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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