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학중인 외아들 사고로 잃고 통곡한 박영규

미국 유학중인 외아들 사고로 잃고 통곡한 박영규

댓글 공유하기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아들,

아버지의 인생을 이해해주고

힘들고 지칠 때 든든한 어깨가 되어주었던

아들이었기에 박영규의 가슴은 더욱 무너져 내린다.

박영규는 미국 워싱턴에서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들을 화장했다.

지난 14일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 아들 시신 화장하고 당분간 미국에 머물듯

두 해 전, 박영규와 긴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서울 신사동의 앤티크풍 카페에서 늦은 밤까지 이야기를 나누며 그는 아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숨기지 못했다. 전처와 함께 미국 워싱턴에 살고 있는 아들 박달군(21)의 이야기할 때, 아버지 박영규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고 두 눈은 반짝였다. 인터뷰를 하기 얼마 전 미국으로 날아가 아들을 만나고 왔다는 그는 공항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며 한참을 웃기도 했다.

“이 녀석이 공항으로 마중나온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거야. 한참을 두리번거리는데 아들 놈하고 비슷한 녀석이 눈에 띄더라구. 근데 레게 파마를 하고 힙합 바지를 입은 게 우리 달이 모습은 아니다 싶더라구. 배까지 내려오는 긴 목걸이에 귀를 4개나 뚫어 귀걸이를 했더라구. 그래서 아닌 줄 알았지. 근데 그 녀석 옆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아빠“ 라는 거야. 놀라서 쳐다봤더니 틀림없는 우리 아들인 거야. 어찌나 어이가 없고 황당하던지. 그냥 공항 바닥에 주저앉아서 한참을 웃었지.”

그렇게 즐겁게 이야기한 게 두 해 전의 일이다. 워싱턴 공항에서 오랜만에 만난 아들의 훌쩍 커버린 모습에 당황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아들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박영규와 아들은 세상에 하나뿐인 부자지간처럼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특별했다. 박영규가 이혼을 하자 아들은 아버지에게 “저랑 상의도 없이 그러실 수가 있어요?”라고 따지듯이 물었단다. 그때 박영규는 자신이 살아온 세월과 이혼을 하게 된 이유를 솔직하게 이야기했다고 그러자 아들은 “이제야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어요. 아버지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셔서 고맙습니다”라며 오히려 아버지를 위로했단다.

“그날 공항에서 그런 생각을 했지. 이 녀석이 나를 닮아 끼가 많구나. 옛날에 내가 대전에서 상경할 때 그랬거든. 주황색 바지에 초록색 재킷, 노란색 와이셔츠를 입고 다녔어. 그러면 영화 캐스팅 매니저들 눈에 띌까 해서. 나를 표출하는 거, 그런 게 끼거든. 워싱턴 공항에서 ‘이 놈이 내 아들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 처음에는 지저분한 힙합맨으로 변한 아들을 보고 웃음이 터졌는데 나중에는 대견스럽더라구. 그리고 ‘이제 다 컸구나’ 그런 생각도 했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표현한다는 건 어른이 됐다는 증거거든.”

박영규의 아들은 미국 워싱턴에서 컴퓨터 그래픽을 전공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 시간으로 지난 14일 친구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동승했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박영규는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들은 후 큰 충격에 휩싸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바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고. 그의 측근에 의하면 “박영규씨는 이 소식이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걸 원치 않았어요. 그래서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언제 돌아올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 ‘고독이 몸부림칠 때’가 개봉됐기 때문에 특별한 스케줄이 있는 건 아니거든요. 아들은 화장을 했어요. 아마 많이 우셨을 겁니다.”

박영규가 외아들을 잃고 얼마나 통곡을 했을지는 그가 어머니를 잃었을 때를 떠올리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박영규는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 영안실로 달려가 시신을 안고 얼굴을 부비며 오열을 했다. 염을 하고 나면 다시는 어머니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이렇게 어머니를 안는다는 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그는 어머니의 시신을 오랫동안 부둥켜안고 영안실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천수를 누리고 하늘나라 간 어머니를 보내면서도 오열한 그가 장성한 아들을 멀리 떠나보내며 얼마나 통곡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박영규는 얼마 전 개봉한 코믹 영화 ‘고독이 몸부림 칠 때’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한방의 웃음 펀치를 날려 ‘역시 박영규’라는 찬사를 듣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 한몸 바쳐 감동과 웃음을 선물해 주는 그가 참을 수 없는 슬픔에 잠겼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다. 박영규의 전 소속사 매니저는 “너무 가슴 아픈 일이다. 박 선생님께 아들은 이 세상 전부였는데… 아들에 대한 사랑이 특별했던 분이다.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미국에 있는 아들이 보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1년에 두세 번은 워싱턴으로 날아가 아들을 만나곤 했는데…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마음이 너무 아프다”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박영규는 지난 98년 재혼해 새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현재 부인과의 사이에 2세가 없어 그에게 박달군은 유일한 혈육이었다. 박영규는 미국에서 아들의 유품을 정리한 후 귀국할 뜻을 비쳤다고 한다. 귀국 후 그의 연기 인생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변함 없이 우리에게 웃음과 감동을 선사해주리라 믿는다.

취/재/후/기

박영규는 미국으로 날아간 그날 본지와 인터뷰 약속이 있었다.오후  2시, 강남의 어느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우리의 약속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인터뷰를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매니저의 말에 “무슨 일이냐?”고 여러 번 물었지만 그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며 말을 아꼈다.

마지막으로 “박영규씨와 언제 만날 수 있겠냐?”는 질문에 한참 뜸을 들이다가 “일주일 후에 다시 전화해주세요”라고 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난 후 그에게 전화를 할 수 없었다. 어떤 말로 위로를 전달해야 할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혼자 남은 아버지의 슬픔에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한다.

글 / 경영오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화제의 추천 정보

    Ladies' Exclusive

    Ladies' Exclusive
    TOP
    이미지